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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한 시민을 위한 국가의 재구성

강한 시민을 위한 국가의 재구성

서로 연결된 시민들이 경험의 공유와 권리의 주장을 통해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제도를 상상

하승우 풀뿌리자치연구소 이음 운영위원 / 녹색당 공동정책위원장 anar00@hanmail.net

2016년 11월 12일, 故 백남기 농민의 쾌유와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던 촛불집회가 최순실-박근혜 게이트를 비판하고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촛불집회로 번졌다. 횃불처럼 타오르는 촛불이 12월 9일 국회의 탄핵소추안이 가결되도록 234명의 국회의원을 압박했고 2017년 3월 10일 헌법재판소의 탄핵 인용 결정을 유도했다. 시민들의 힘이 한국 헌정 사상 최초의 현직 대통령 탄핵 결정을 이끌어냈다. 이렇게 헌법은 살아있는 생명력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사태를 낳은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여전히 남아 있다. 개헌이 논의되고 있지만 시민들은 배제되고 있고 기득권 정치인들의 야합으로 끝날 불안한 가능성은 되려 시민의 정치를 위협하고 있다. 시민들의 봉기가 기득권 정치인들의 개헌으로 끝난 역사는 1960년 4월, 1987년 6월, 중요한 고비마다 반복되어 왔다. 2017년의 시민들은 새로운 역사를 쓸 수 있을까?

무너진 삼권분립, 시민의 자리는 어디인가?

모든 권력은 부패할 수 있고 견제받지 않는 강력한 권력일수록 그럴 가능성은 커진다. 그래서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보통 행정, 입법, 사법, 세 권력을 분립시키고 서로 견제하며 균형을 유지하도록 하고 이를 ‘삼권분립’이라고 부른다. 대한민국 헌법도 입법권은 국회에, 사법권은 법관으로 구성된 법원에 속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문제는 행정부로 통칭되는 대통령과 내각의 권한 및 이를 뒷받침하는, 전체 공무원 총수의 61.2%를 차지하는 628,880명의 행정부 국가공무원이다(2016년 12월 31일 기준). 헌법에 따르면, 행정권은 대통령을 수반으로 하는 정부에 속하는데, 대통령의 권한이 포괄적이고 강력하다 보니 ‘제왕적 대통령제’라는 말이 등장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대통령의 권한이 강한 데다, 국회는 자신의 입법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않는다. 지난 국회의 의원발의 법안 실적을 보면 증가추세이고, 제 19대 국회는 의원발의로 총 6,487건을 처리해 정부가 제출한 법안을 제외하고 자체 통과된 법안이 89.9%나 된다. 이렇게 의원발의가 늘어나는 것은 긍정적이나, 국회가 발의해 가결된 법안의 78% 정도는 공업소유권, 환경, 상업·무역·공업, 해운 등의 분야로서 시민들이 참여하거나 사회의 관심을 받기 어려운 분야였다. 그리고 19대 국회의 경우 국회법에 따라 시민이 국회에 낸 227건의 청원 중 본회의가 채택한 것은 단 2건이었다. 유권자를 대표한다는 국회가 제 몫을 하고 있는지 의심을 받는 대목이다.


✽ 시민이 실제로 권력을 행사할 수 있게 하는 스위스의 직접민주주의 주민투표(좌), 스페인의 전국정당 포데모스(우)

특히 한국의 국회는 여당, 야당으로 나뉘어 정책에 대한 공론장 역할보다는 정부 정책을 일방적으로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역할을 주로 맡는다. 각 정당이 소속 의원들에게 당론을 따르도록 요구하는 것도 정치적인 논쟁을 가로막는다. 그러다 보니 시민들의 다양한 의견이 국회를 통해 논의되고 법률로 입안되는 대의민주주의의 정치과정은 한국정치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행정부와 입법부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사법부는 애초에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라 시민의 공식적인 통제가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다. 물론 사법부가 적극적으로 법을 해석해서 시민의 기본권과 자유를 보장할 수도 있지만 정치권력과 사법부가 결탁하는 ‘사법의 정치화’는 외려 시민의 권리를 위협해 왔다. 그리고 행정수도 이전이나 통상임금과 같은 주요한 정치의제가 법원으로 넘어가서 대화나 협상 같은 정치과정이 작동하지 못하고 소수의 법관들이 다수의 결정을 뒤집는 ‘정치의 사법화’도 시민의 참여를 가로막고 있다. 한국의 사법부에 대한 신뢰도가 27%로 OECD 국가들 중 최저수준인 것은 이런 현실을 반영한다(덴마크는 83%, OECD 2015년 보고서).

한국정치의 문제점에 관해서는 다양한 진단이 가능하겠지만 삼권분립이라는 가장 근본적인 구조를 거론하지 않고서는 그 해법을 이야기하기 어렵다.

하나씩 시민의 정치구조를다시 조립하는 방법

행정, 입법, 사법 모두가 시민을 외면하는 구조에서 시민이 택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대통령의 퇴진을 외치며 거리로 쏟아져나온 수많은 시민들이 가슴 졸이며 국회와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기다려야만 했던 상황은 지금 헌정체제의 한계이자 또 그것을 넘어설 수 있는 가능성이기도 하다. 거리로 나서는 시민들이 없다면 기득권 정치구조는 제도적으로 주어진 권한조차 제대로 행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개헌 과정에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2010년 아이슬란드는 정치개혁을 추진하기 위해 인구비례에 맞춘 950명의 시민들로 국민포럼을 구성하고 전국선거를 통해 25명의 헌법의회 위원들을 선출했다. 그리고 국민포럼과 헌법위원들이 논의한 개헌안은 2011년에 의회로 제출되어 2012년 국민투표로 통과되었다. 비록 보수정당이 최종 표결을 무산시켜 개헌안은 공포되지 못했지만 이 과정은 시민들에게 내 삶과 헌법이 어떤 연관성을 가지는지를 학습시켰다.

한국에도 비슷한 과정이 필요하다. 1960년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고 난 뒤 수립된 과도정부는 불과 50일 만에 헌법개정안을 마련해 국회에서 통과시켰다. 1987년 6월항쟁 이후에도 민정당과 민주당을 대표하는 8인 정치회담이 헌법조문의 37퍼센트를 개정하는 개헌과정을 불과 48일 만에 끝냈다. 시민들은 이 과정에서 자신들이 꿈꾸는 나라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다. 시민들이 헌법을 이해하고 헌법에 관해 논쟁할 수 있어야 정치의 주인이 될 수 있다.

단순히 모든 권력이 시민에게서 나온다는 조문만으로는 부족하다. 시민이 실제로 권력 을행사할수있도록헌법이권한을보장해야한다.대다수시민들의삶에영향을미치는 주요한 사안이나 법률에 관해서는 반드시 시민투표를 거치도록 규정하고, 필요하다면 일 정수이상의시민들이현안에관한시민투표를요구할수있도록법률로보장해야한다.

스위스의 직접민주주의를 보면 현안에 관한 잦은 투표야말로 가장 좋은 시민교육이고, 시민참여를 실질적으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이다.

그리고 입법부가 제 역할을 다하지 않는다면 그 구성을 바꿔야 한다. 그런 점에서 선거제도 개혁이 중요하다. 선거가 민주주의의 모든 것일 수는 없지만 입법부의 구성은 사회변화의 도화선이 될 수 있다. 현재의 소선거구제도를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제안한 연동형 비례대표제도나 더 적극적으로 전면적인 비례대표제도로 바꾸는 것은 국회 개혁을 위한 필수과정이다. 정치개혁과 개혁적인 입법을 위해서는 시민들의 성별, 연령별, 직업별 비율에 최대한 일치하도록 국회구성이 바뀌어야 한다.

더 급진적인 상상을 한다면 성별, 연령별, 직업별 비율에 따라 구성되는 시민의회나 시민평의회를 상상할 수도 있다. 시민의원을 선출하는 과정에 전면적인 추첨제도를 도입할 것인가, 어느 정도의 인원으로 구성할 것인가에 관해서는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대의정치제도가 정말 시민을 대의하도록 만드는 과정이 필요하다.


✽ 시민들은 2016~17년 촛불광장 자유발언대에서 개인의 문제를
사회화하는 경험을 했다. ©민주노총

입법부만이 아니라 시민이 행정부를 직접 견제할 방법에 관해서는 한국과 비슷하게 정치부패를 경험한 나라들의 사례를 살펴보면 좋다. 예를 들어 스페인의 전국정당 포데모스와 지역정당 아오라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엔 코뮤는 시민들이 주요한 정책과 직책을 맡을 정치인들을 선출하는 온라인 투표를 활성화시켰다. 이 정당들은 특정한 정치조직이 권력을 장악하는 것보다 시민들이 권력의 주체임을 자각하고 스스로 정치무대에 오르도록 해서 누가 권력을 잡든 예전의 기득권 정치로 돌아가지 못하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그래서 이들 정당에서 주요한 정책결정은 반드시 총회에서 내려지고, 주요 정치인들은 특권을 포기하고 자신과 가족의 재산을 비롯한 여러 정보를 공개하고 공개토론을 거쳐서 정책을 결정한다는 ‘윤리강령’에 동의해야만 공직을 맡을 수 있다. 이를 위해 주요 정책과 관련된 정보들은 물론이고 정치인들의 일정이나 회의록도 모두 공개된다.

이렇게 행정부의 권한을 최대한 분산시키고 투명하게 만든다면 시민들이 정부에 관해 더 많이 이야기할 수 있고 더 많이 참여할 수 있으며 그런 결정에 대한 책임도 더 많이 분담할 수 있다. 권력의 재분배는 권한만이 아니라 책임도 재분배한다. 시민은 참여하는 만큼 자신의 결정에 책임을 진다. 그런 시행착오를 거치며 시민이 정치를 담당하도록 돕는 것이 바로 민주주의이다.

국가, 시장, 시민사회의 유동적인 경계

벤자민 바버는 『강한 민주주의』에서 민주주의의 목적은 추상적인 개념들을 구체적인 상황에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구체적인 상황으로부터 실제로 도움이 될 만한 추상적인 개념들을 추출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정치는 절대적인 진리를 인간관계에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관계를 진리의 문제에 적용하는 것이다. 이런 정치가 가능하려면 시민들이 개인의 문제를 사회화하고 자신의 경험을 객관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 사회적인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받아들이도록 강요하는 한국사회의 압력에 맞서 시민들이 자신의 문제와 경험을 공개적으로 드러내고 그런 과정을 정당한 권리로 누릴 수 있어야 한다. 2017년 촛불광장의 자유발언대와 뒤이은 토론은 이런 장의 필요성과 시민들이 실제로 그 장을 현명하게 활용할 수 있다는 점을 증명했다. 그 장을 광화문에서 더 많은 일상으로 확대해야 한다.

그리고 바버는 『강한 시민사회, 강한 민주주의』에서 시민사회가 활성화되려면 정치적인 권리와 공간만이 아니라 노동권과 기업의 사회적 책임 강화, 정당한 보상을 받고 안전하게 일할 수 있는 작업장, 시민활동에 필요한 시간적인 여유와 공간도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정치민주주의에 경제민주주의가 뒤따르는 것이 아니라 경제민주주의가 실현되어야 정치민주주의도 살아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권력의 재분배는 국가만이 아니라 시장에서도 이루어져야 한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서 드러났듯이 한국의 재벌체제를 개혁하지 않고서는 정치개혁도 어렵다.

그런 점에서 시민에게는 작업을 중단할 수 있고 때로는 정치적인 결정을 거부할 수 있는 권리가 필요하다. 세월호 이후 한국사회를 규정하는 단어는 ‘안전’과 ‘존엄’이다. 사회를 더 발전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회를 단단하게 구성하고 잘 지키기 위해 이런 권리들이 필요하다. 지금 당장 정부가 이런 권리를 보장하지 않는다면 시민들이 서로의 권리를 구성하고 지켜줘야 한다.

특히 2017년의 시민은 국가와 시장, 시민사회의 경계가 흐릿해진 시대를 살고 있다. 거버넌스와 사회적 경제, 사회혁신 등의 개념들은 그 흐릿해진 경계들에 주목하고 있다. 그리고 국경의 경계도 다소 흐릿하게 만드는 세계화와 정보화의 시대가 이미 도래했다. 이런 흐릿함 속에서 새로운 권력이 출현하기도 하고 기존의 권력이 무기력해지기도 한다. 그래서 어떤 점을 상세하게 규정하는 것이 시민의 권리 강화에 도움을 줄 수도 있고 그 반대일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시민의 정치는 이런 경계들을 넘나들 수 있고, 때로는 어느 지역에 뿌리를 내리며 구체적인 가능성을 증명해야 한다.

그 형태가 정당이든, 결사체이든, 마을이든, 공동체이든 그 형식은 크게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우리끼리’, ‘끼리끼리’의 장벽은 넘어서야 사회변화의 동력을 만들 수 있다.

1987년의 직선제 요구는 그 시대의 정신이었다. 30년이 지난 2017년의 정신은 ‘누구에게 권력을 줄 것인가?’만이 아니라 ‘어떤 권력인가?’라는 물음을 던지고 있다. 이 질문은 ‘우리는 어떤 시민인가?’라는 질문과 맞물려 있다. 지금 우리는 어떤 삶으로 스스로를 증명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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