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등과 민주주의, 작아지고 내려가고 옆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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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등과 민주주의, 작아지고 내려가고 옆으로

갈등의 자리에서 경계를 가로지르며 꾸준히 발명되고 변형되는 민주주의를 위하여

김종휘 성북문화재단 대표 / whee212@gmail.com

갈등의 인정, 직면, 실천적 학습
우리-나, 라고 하는 내면세계와 외부세계에는 갈등이 있다. 생활 상식과 경험에 의하면 갈등은 “내 안엔 내가 너무 많아”부터 “다 너 때문이야”까지 그 소재와 인과를 가리고 싶어하는 인위적 분별과 의도된 착각으로 포착된다. 하지만 원인과 결과에 이어 결과가 다시 원인이 되며 소재를 넘나드는 상호작용의 과정으로 전개되는 것이 갈등이다. 여기에 주변 인물과 제3자가 관여되고, 법률적 중재자가 의뢰를 받고, 대중매체의 프레임에 끌려가고, 정부가 국익을 논하며 특정한 입장을 밝히면, 갈등은 당사자들의 문제를 넘어 진영과 진영의 힘겨루기 양상으로 치닫는다.

주로 보도를 통해 학습되고 감정 이입되는 갈등 이슈는 주민과 주민, 지역과 지역, 세대와 세대, 국가와 국가, 이념과 이념 등 여러 차원에서 발생하는 여러 수준의 중첩된 갈등 중에서도 특별히 미디어가 주목해서 편집하는 피장파장과 이판사판의 ‘나쁜 장면-기사’들에 집중되어 있다. 이런 ‘나쁜 장면-기사’ 뒤에 기자나 앵커는 파국을 우려하고 양비론을 취하다가 ‘그럼 소는 누가 키우나?’ 하며 갈등의 본말을 흐려버린다. 이처럼 눈길을 돌리고(mislead) 딴 것으로 덮어버리고(cover up) 얼버무리며 둘러대는(gloss over) 호도(糊塗)에 갈등 이슈와 그것을 접하는 우리-나가 유독 취약한 요인들 중에서 두 축의 큰 문제-뼈대만 간추리면 이럴 것 같다.

첫 번째 문제는 ‘갈등이 있어선 안 된다’(우리는 하나다)거나 ‘갈등이 드러나면 곤란하다’(좋은 게 좋은 거다)고 믿는 우리-나 내면의 집단 무의식이다. 여기에는 우리-나의 생존 논리와 감정을 틀 지운 근현대의 역사적 체험-이미지가 드리워있다. 식민지 해방 이후부터 추려본 그 역사는 유시민에 의하면 ‘반공 난민촌 → 병영 산업화→ 광장 민주화 → 신자유주의 욕망’을 거친 지금 여기의 우리-나다(『나의 한국 현대사』, 2014, 돌베개). 유병선에 의하면 크게 ‘공감 없는 국가주의 → 연대 없는 개인주의’를 거친 지금 여기의 우리-나다 (『고장 난 자본주의에서 행복을 작당하는 법』, 2016, 위즈덤하우스). 이진순에 의하면 ‘반공 민주주의 → 반독재 민주주의’를 거친 지금 여기의 우리-나다(『듣도 보도 못한 정치』, 2016, 문학동네).

이 역사의 줄기에 엉킨 채 그 역사의 여러 장면-기사에 투사하며 삶의 논리와 감정을 일궈온 서사가 바로 ‘지금 여기의 우리-나’라는 정체성이라면, 우리-나의 역사적 경험에 뿌리를 두고 있는 갈등의 체험-이미지는 평화적 해결이나 승화가 아니라 압도적인 폭력에 의한 해소다. 제주 4.3 학살과 광주 5.18 학살을 비롯해 평택 미군기지, 밀양 고압송전탑, 강정 해군기지, 성주 사드배치 등등, 지역 주민과 국가 정부의 갈등은 일방적으로 지역감정이나 지역 이기주의로 폄하되고 국가 정부의 폭력에 의해 강제 해소되었다. 뒤이어 등장하는 ‘평온’의 집단 연출 속에서 기억의 배제와 자기 억압의 징후를 숨기며 40년, 70년에 이른 이력이 우리-나의 현대사다.

이렇듯 우리-나의 몸과 정신, 감정 안에 각인된 갈등이란 아예 없어야 하거나 있어도 없는 척 해야 하는, 이것이 여의치 못하면 진영과 진영의 갈등만 남겨놓고 다른 모든 갈등일랑 진영 대결로 환원시켜야 생존할 수 있다는 공포와 불안의 집단 최면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요컨대 갈등에 대한 우리-나의 집단 무의식 혹은 집단 감정은 가급적 갈등을 회피하고 싶고 은폐하고 싶고 목도한 폭력적 해소의 광경을 마치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망각하고 싶은 ‘마음의 체제’(『사회학적 파상력』 김홍중, 2016, 문학동네)다. 내면세계에 자리 잡은 이 ‘마음의 체제’로부터 우리-나가 모색한 외부세계의 출구 중 하나가 민주주의다.

‘갈등의 표출은 곧 파국인지라 폭력적 해소 말고는 답이 없다’고 내면화된 우리-나의 역사적 체험-이미지를 극복하고자 쟁취한 소망-이미지가 민주주의라면, 두 번째 문제는 갈등 해결 또는 관리의 제도이자 집단적 ‘마음의 체제’여야 할 민주주의가 되려 갈등을 합법적이고 대의적으로 더욱 조장하고 있다는, 특히 미디어에 의해 증폭된 피로와 불신이다. 이 점에서 2014년 4.16 세월호는 갈등의 중재자로서 국가에 대한 최후의 믿음이 와해되고 시민적 연대와 저항의 흥행사라 여겼던 대의제 민주주의가 무력하기 짝이 없는 막다른 길의 체념을 비로소 민낯 그대로 상대하게 된 우리-나의 역사적 집단 체험의 변곡점이라고 할 수 있다.

4.16 이후 2년이 넘는 사회적 우울의 시간-기억을 거치고 맞이한 2016년 겨울부터 2017년 봄까지, 전대미문의 평화적 촛불집회와 대통령 탄핵 및 구속을 겪자마자 세월호 인양에 따라 호환된 그날의 집단적 체험-이미지는 우리-나에게 갈등에 대한 새로운 마음먹기와 그 규칙이자 규범으로서 민주주의라는 소망-이미지를 다시 사유하게 만들고 있다. 이것은 우리-나의 역사적 집단 체험의 변곡점 4.16 세월호와 함께 그 굴곡의 방향이 아래로 다시 위로 어떻게 움직이는지에 따라 우리-나의 정체성-역사를 전환시킬 수 있는 중대 사건이다. 4.16 세월호로 시작된 변곡점의 움직임은 현재 진행형으로 갈등에 대해 다음과 같은 집단적 자각을 통해 수면 위로 가시화되고 있다.


✽ 광화문 세월호 광장에 세워진 대형 노랑리본

1. 갈등은 있는 것이다. 그것도 도처에 많이 있는 것이다. 이 많은 갈등을 더는 덮어버릴 수 없다. 2. 갈등을 직면하는 것 외에는 방도가 없다. 갈등을 우회해서는 갈등과 만나지지 않는다. 3. 갈등의 인정과 직면은 그 자체로 갈등에 대한 실천적 학습을 만든다. 잊지 말고 기억하고 아무런 척하지 말고 애도하는 과정에서 집단적 학습이 이뤄진다. 이처럼 갈등의 인정하기→직면하기→실천적 학습하기는 4.16 세월호와 더불어 국가에 대한 우 리-나의 인식과 감정을 뒤바꾸고 있다. 갈등의 자리 저쪽에 국가를 세우게 되면, 국가에 대 한 우리-나의 갈등을 인정하고 직면하며 실천적 학습을 하는 이쪽에는 민주주의가 놓인다.

문제는 이 민주주의가 국가 관료제의 거수기나 정치 엘리트만의 의회가 아니라 우리-나의 민주주의가 되도록 하기 위해 우리-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기억하고 애도하기), 혹은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가(망각하고 무탈한 척)이다. 국가 폭력에 의한 강제 해소가 아닌 대안으로 다시 불러낸 민주주의라는 외부세계엔 이미 여러 소망이 투영되어 있다. 유시민은 ‘복지국가 기반의 자기 존중과 타인에 대한 공감의 능력’을 소망한다. 유병선은 ‘공감과 연대로 둘러앉은 사회경제적 공동체’를 소망한다. 이진순은 ‘민주주의의 민주화를 통한 수평적 연대와 상향식 의사결정’을 소망한다. 이 모든 소망이 절실하게 요청된다.


✽ 지난 3월 11일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직후 열린 시민대회에서 한 어린이가 촛불을 들고 있다. © 연합뉴스

그러나 이들 소망을 직접 개발하고 건사해야 할 주체의 집단 역량을 단련하기 위해서는, 즉 갈등과 더불어 민주주의를 우리 ‘마음의 체제’로 작동시키기 위해서는 ‘갈증 해소’처럼 ‘갈등 해소’를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즉 ‘갈등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는 인정과 직면에서 거듭 출발해야 한다. 갈등은 없어지거나 해소되어야 좋은 것이 아니다. 우리는 갈등을 없애거나 해소하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반대로 갈등의 있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첫 번째의 능동적인 행위가 되어야 한다. 그 다음에서야 갈등을 종래와 다른 자리에서, 다른 관계로서, 다른 이름으로 부르며 새로운 무엇으로 탈바꿈-발명하는 길이 열린다.

작아지고 내려가며 옆으로 커지는 민주주의
이 탈바꿈-발명이 곧 갈등의 해결 또는 관리일 것이며 이 해결과 관리의 과정 안에 있을 때라야 민주주의 역시 지속적인 자기 변형을 이루어나갈 수 있다. 갈등의 실천적 학습이란 갈등을 인정하고 직면하고 있을 때 갈등의 대상-주체가 변화되고 더불어 갈등 해결 또는 관리의 주체-대상 역시 변화된다는 것을 뜻한다. 이 변화를 수용할 태세를 갖추고 출발해야 민주주의는 고정 불변의 법칙이 아니라 갈등-사이의 자리에서 너와 나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적절한 이동(liminality)이자 관계를 조정하는 매개(interface)가 된다. 이렇게 꾸준히 발명되고 변형되는 민주주의가 일어나려면 몇 가지 선결해야 할 과제가 우리-나의 외부세계에 있다.

1. 우리-나의 민주주의는 충분히 작아져야 한다. 국가 단위→광역 단위→기초 단위→생 활 단위→마을 단위→모임 단위 이하로 더 작아져서 개념적인 단위(unit)로 엉성한 군집 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개성적인(unique) 만남-관계로 생생하게 작용할 수 있는 데까지 작아져야한다. 우리-나는 서로 같지 않고 같지 않기 때문에 만나는 것인데 만나는 목적을 같아지는 것으로 두는 이율배반의 과정을 거치며 개념적이고 추상적 원리로 민주주의가 멀어진 끝에 다시 대의제 민주주의를 지켜보지 않으려면 우리-나의 민주주의는 계속해서 매우 작아져야 한다. 충분히 작아져서 다른 가운데 같고 같은 가운데 다른 ‘유니크한 만남-관계’로 다양해도 괜찮아야 한다.

2. 우리-나의 민주주의는 바닥까지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 신영복 선생의 지론에 따르면 ‘다수가 곧 정의라는 사실이 바로 민주주의’인데 그 유일한 방도는 ‘아래로 내려가는 실천론으로서 민주주의를 수행’하는 길 말고는 없다. 하방(下方)할 때에만 바닥의 연대(連帶)라는 관계가 생기는 것이다. 신영복 선생이 강조하는 실천론이자 관계론으로서 이 민주주의는 하방연대 민주주의다. 반대는 ‘위에서 하는 민주주의’고 ‘갑 민주주의’로 을로서는 ‘너나 잘해 민주주의’일 수밖에 없다. 이 점에서 좌클릭 진보냐 우클릭 보수냐의 갑론을박은 실체 없는 허상일 뿐, 그것은 결코 아래로 내려가려 하지 않는 ‘당신들의 민주주의’에 한 표를 보태는 일이다.

3. 우리-나의 민주주의는 옆으로 커져야 한다. 1600만 명이 20차례 촛불집회를 통해 커지는 길이 있다면, 2497개의 읍·면·동이 옆으로 커져서 228개의 기초를 이루고 이것이 옆으로 커져서 17개의 광역으로 커지는 길이 있다. 지역분권은 중앙권력을 쪼개서 나누는 것이자 동시에 지역분권을 기반으로 다양한 매개권력이 옆으로 커지는 것이다. 17개의 지역정부가 옆으로 통치하고 이를 연결하기 위해 한 개의 매개정부가 연방(federation)으로 있으면 된다. 이것은 승패로 나뉘는 갈등 증폭과 폭력 해소의 국가가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권력을 운영하며 옆과 옆이 승승하는 갈등 해결과 관리의 경계적 시간이자 매개적 공간으로 국가를 우리-나가 통치하는 길이다.


✽ 시민주주의는 국가→광역→기초→생활→마을→모임단위 이하로 충분히 작아져야 한다. © 서울시 마을공동체종합지원센터

황현산 선생은 어느 칼럼에서 이렇게 말했다. ‘개념이 내 삶 속에서 성장한 것이 아니라 헛것으로 떠돌았을 뿐’이라고, 하여 ‘모든 것이 외부에서 강제 주입된 경험이자 외부 충격에 휩쓸린 것이며 언제든 과거 회귀로 귀결되는 성향’이 우리-나의 역사로부터 마치 체질처럼 도사리고 있다고. 4.16 세월호와 더불어 역사적 집단 체험의 변곡점을 겪는 가운데 작아지고, 내려가고, 옆으로 커져야 할 민주주의가, 그래서 도처에 있는 갈등과 함께 우리의 집단적 ‘마음의 체제’로 자리 잡기를 소망한다. 이 소망-이미지를 부여잡고 선명하게 간직하기 위해 삼년상에 맞추어 육지로 돌아오려는 4.16 세월호의 지금 여기를, 이 여정을 다시 시작할 때다.

이 여정은 우리-나의 내면세계와 외부세계를 가로지르며 우리-나를 흔들 것이다. 흔들릴 때마다 파머 파커의 말처럼 “무심한 자기 이익 추구와 공동체에 대한 갈망이 뒤섞인 복합체”인 마음을 지닌 우리-나는 민주주의라는 외부세계의 소망-이미지를 실천하고 관계하면서 그 민주주의를 부단히 우리-나의 마음에 들여야 할 것이다. 우리-나는 갈등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매번 민주주의를 탈바꿈-발명하는 수고를 감당해야 한다. 그렇게 흔들릴 때마다 “더 좋은 미래를 원한다면 매 순간 우리들 각자의 내면에 좋은 것을 쌓아야 한다”는 유시민의 믿음이 부럽다. 이 마음은 “미래는 우리 안에 이미 와 있다”는 그의 소신을 나눠 갖고 싶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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