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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주기에 다시 바라보는 인혁당의 진실 황현승, 신동숙, 이영교, 전창일의

 

 

 

30주기에 다시 바라보는 인혁당의 진실
 


인혁당 사건은 우리의 굴곡 많은 현대사, 특히 독재권력 시기의 대표적인 비극적 사건 중 하나이다. 1975년 4월 9일, 소위 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련자 8명이 대법원에서 사형 확정 판결을 받은 지 불과 20여 시간 만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스위스 제네바에 본부를 둔 국제법학자협회는 이날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했다.
하늘도 놀라고 땅도 흐느낄, 당사자에게는 죽어서도 잊지 못할, 희생자들의 가족들에게는 치유될 수 없는 처절한 한과 치 떨리는 분노를 그리고 살아남은 자들에게는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이라는 무거운 짐을 새겨 놓은 이 처참한 사건이 발생한 지도 올해로 벌써 만 30년이 되는 셈이다. 그렇지만 이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과 사형수 8명을 포함한 관련자들에 대한 명예회복은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져 가고 있다.

 

사법사상 암흑의 날
소위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2차 인혁당 사건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74년 4월 25일 신직수 당시 중앙정보부장의 발표에 의하면 “북한의 지령을 받은 인혁당 재건위 조직이 민청학련의 배후에서 학생시위를 조종하고 정부 전복과 노동자, 농민에 의한 정부 수립을 기도”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명칭에서부터 많은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세칭 1차 인혁당 사건이 64년 8월 14일 중앙정보부(중정)을 통해 세상에 알려진 이후, 중정이 발표한 혐의를 뒷받침할 만한 증거를 찾지 못한 채 사건을 맡은 서울지검 공안부는 ‘기소할 가치가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검사의 기소거부라는 초유의 검찰파동을 겪었으며 재판과정에서도 이렇다 할 실체가 입증되지 못한 인혁당을 ‘재건’하려 했다는 발표 자체가 참 해괴한 것이었다.
2차 인혁당 사건은 박정희 독재권력이 한국적 민주주의를 내세우면서 유신독재를 출범시킨 뒤 두 해째를 맞는 시점에서 발표되었다. 대학가에서는 반 유신데모가 잇따르고 양심적인 언론인, 교수, 종교인, 재야인사들이 유신체제에 반대하는 개헌서명운동을 벌이는 등 유신체제에 대한 반발이 거세게 일어나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그러던 중 74년 4월 3일에 민청학련 사건이 터졌다. 이날 민청학련의 명의로 작성된 선언문이 각 대학가에 뿌려졌고 서울대를 비롯하여 이화여대와 성균관대 등 여러 대학에서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이날 유인물은 전국민주청년학생연맹(민청학련)이란 이름으로 뿌려졌고, 박정희 정권은 대학가의 반 유신활동을 억누르기 위해 4월 3일 당일 긴급조치 4호를 발동하여 민청학련과 관련된 모든 활동을 불법으로 규정·금지했다.


이런 일련의 반 유신독재권력에 대한 저항이 거세게 일어나는 과정에서 박정희를 정점으로 하는 유신체제는 민청학련의 배후로 인혁당 재건위를 지목했다. 그 당시 인혁당 재건위와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된 사람은 무려 1천 24명에 이르렀고, 그중에 253명이 구속 되었다. 그 가운데 인혁당 관련자 23명, 민청학련 관련자 27명을 포함하여 180명이 비상보통군법회의에 기소되었다.
75년 2월에 민청학련 관계자들은 대부분 감형 또는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으나, 인혁당 관련자들은 제외되었다. 그들은 74년 5월 27일 국가보안법, 반공법, 내란예비음모 등의 혐의로 기소되었고, 그 후 비상고등군법회의는 그들에게 사형과 무기, 징역 20년, 징역 15년 등 중형을 선고했다. 사형을 선고받은 사람은 모두 8명이었으며, 대법원 확정판결을 받은 바로 그 다음날인 75년 4월 9일에 국방부는 그들에게 서울 구치소에서 전격적으로 사형을 집행하는 만행을 자행하였다.
이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사람들은 바로 서도원, 도예종, 송상진, 우홍선, 하재완, 김용원, 여정남, 이수병 등 8명이었다.
 

고문을 통한 조작극이었다 - 황현승
그는 당시에 일반사회 교사로서 광신상고에 재직 중이었다. 인혁당 사건과 관련하여 사형을 당하신 고 김용원 님과 오산고와 명성여고에서 동료교사로서 친분을 쌓았던 그는 74년 5월 2일 남산의 중정으로 끌려갔다.
‘4월 중순에 잡혀갔다는 김 선생 관련인 것 같은데, 내가 왜 끌려왔을까?’ 이리저리 추측을 해봐도 광화문 다방에서 민청학련 선언문과 ‘민중의 소리’를 같이 본 일 외에는 특별히 짚어지는 데가 없었다.

 

3일이 지난 5일 저녁부터 그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가 시작됐다. 조사관이 부드럽게 물어왔다. “자본주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 조직 활동을 한 것도 아니고 조사 받는 것에 대한 경험도 전혀 없었던 그는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말했다. 케인즈의 경제이론을 소개하면서 자본주의의 흐름도 소유 위주에서 분배 위주로 바뀌어가고 있다 등등. 그 순간 담당 조사관은 “요시”(‘그래?’, ‘좋아’ 라는 정도의 일본말)라고 외쳤고 그는 곧바로 지하실로 끌려 내려갔다. 만 이틀 동안 물고문과 전기고문 등 매서운 고문에 시달려야 했던 그는 결국 그들이 불러주는 대로 자술서를 써야만 했다.


2002년에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문사위)에서 조사한 조사관과 대질심문을 할 때 보니까 글씨는 분명 그의 것인데 왜 썼는지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많았다고 한다. 김용원 님의 집에 모여서 정부 전복을 논의했다고 하나 모두 거짓이었다. 심지어 그는 자신이 인혁당 사건으로 구속되었다는 것을 1년 뒤인 75년 4월 9일(8명의 사형 집행 이후) 처음으로 있었던 가족면회를 하고서야 정확히 알았을 정도였다. 그 전에는 민청학련사건이라 생각하고 구치소에서도 자신을 그렇게 소개하곤 했었다.


74년 5월부터 82년 3·1절 때 형집행정지로 나올 때까지 그는 어떤 심정으로 그 억울하고도 원통한 시간들을 보냈을까. 개인적인 분노는 몇 년이 이어졌다고 한다. 심지어 감옥에서 갑자기 머리가 하얗게 세어 버리기도 했다.


 

그는 한때 격했던 감정의 편린들을 들춰내는 대신 인혁당 사건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내보였다. 의문사위의 조사 과정에서 몇몇 증인들의 증언에서 이미 드러났듯이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관여한 사건이었으며 이것이 진상규명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재판과정에서 1,2심은 비상군법회의이었으니까 차치하더라도 대법원 판사들이 세계적으로 지탄을 받는 재판을 진행한 것에 대해서 양심고백을 해주기를 바랬다.
그는 고문 사실 보다 진상규명이 핵심이라며 정치폭력의 대상이 되었던 인혁당 관련자들은 국가폭력의 최대 피해자이며 희생자라고 말한다.
가족에게는 더없이 미안하다는 그는 끝으로 “사람들은 8인의 죽음에 대해 개죽음, 억울한 죽음이라고 하는데 일면 타당하나 일면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다.”고 조심스럽게 말을 잇는다. “4·19 공간에서 진보적인 분들이었고 한 것은 그리 많지 않으나 박정희의 친일, 반통일, 반민중에 대한 역사적 대결로 봐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고 했다. 구체적인 실천은 뚜렷이 없었지만 고인들의 생각을 제대로 알려주는 것도 명예회복의 중요한 부분인 것 같다고 덧붙이면서.

조국의 자주평화통일을 기원했다고 들었다 - 신동숙, 이영교
돌아가신 분들의 가족들의 지난 30년은 어땠을까! 고 도예종 선생님과 하재완 선생님의 부인이신 신동숙·이영교 님은 어떻게 살아왔을까!
동네아이들이 ‘빨갱이 자식이다’라고 놀려도, ‘저 아줌마가 빨갱이야’라고 해도 그리고 집 담벼락에 ‘간첩이다. 잡아 죽여라!’ 낙서를 해도 얘들을 울리지 않고 잘 키우려고 이를 악물었다가도, 너무 억울하고 분해서 슬픔을 드러내기조차 싫었다고 한다. 너무 어처구니없는 일이라 사형이 쇼일 거라고 생각도 하고 바람도 가져 봤지만 그것은 차가운 현실이었다.


일체 면회가 허용되지 않은 상황에서 방청이 제한된 군사법정에서나마 남편들의 얼굴을 보고 그들의 억울함을 믿었던 아내들은 남편의 석방을 위해 동분서주했다. 함석헌 선생이 기독교회관에서 열리는 목요기도회와 천주교를 찾아가 호소해 보라고 일러줘서 대구에서 5남매를 각각 돌보면서도 사형이 집행되기 전까지는 서울에 수시로 올라와서 남편의 구명운동을 벌였다.


처음에는 설움도 많았다고 한다. 혹여 남에게 피해가 될까 봐 목요기도회에서도 인혁당 가족들끼리만 한 귀퉁이에 모여 있다가, 누가 다가오면 먼저 ‘가까이 오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엄혹했던 유신독재시절에 빨갱이로 몰렸던 사람들의 가족의 고립된 애환이 얼마나 깊고 사무쳤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뜻 맞는 동료들끼리 모여 그 당시의 시대상황에 대해 걱정과 논의만 했기에 남편들한테 혐의를 못 잡는 와중에 부인들마저 백방으로 뛰어다니는 게 거슬렸던지 중정은 부인들까지도 끌고 가서 3일씩 잠도 안 재우고 남편의 죄를 강요하기도 했다.
 

 



 

심지어 물에 약물을 넣어 성적 흥분을 일으킨 비정상적인 상태에서 조사관들이 불러주는 대로 ‘내 남편은 간첩’이란 글을 쓰고 지장을 찍게 하는 고초를 겪은 부인도 있었다. 집에 돌아와서까지 환각상태에 시달리던 그 부인은 약 기운이 떨어지면서 밀려오는 자책감을 견디지 못하고 아이들과 함께 집단자살을 꾀했으나 때마침 찾아온 친정어머니의 만류로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친정어머니는 그때의 충격으로 인해 한 달 뒤에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남편들이 처한 기가 막힌 상황도 상황이지만 주위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도 가족들의 아픔을 더해줬다고 한다. 그들 가운데는 정신적 충격을 견디다 못해 정신이상을 보이다가 남편이 풀려나기 얼마 전에 비극적인 삶에 스스로 종지부를 찍은 경우도 있었다.
유족들이 겪었던 일들 중에서 지금도 가장 개탄스럽고 분노를 자아내게 하는 것은 사형수들의 시신을 가족들에게 넘기는 과정에서 일어난 어처구니없는 사건들과 유언까지 당국이 조작했다는 의혹이 있다는 점이다. 8명의 사형이 집행된 뒤 시신은 시차를 두고 따로따로 유족들에게 인도되었는데, 유언이라며 가족들에 전해진 내용은 그야말로 믿기 어려운 것들이었다.


또한 고 송상진 님의 시신을 영구차에 실은 유가족들은 함세웅 신부가 주임신부로 있던 응암동 성당에서 연미사를 드리려고 했는데, 성당에 이르기 전에 경찰 당국에 의해 강제로 영구차는 벽제 화장터로 끌려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고 송상진 님의 시신은 유족들의 허락도 없이 화장이 되었다. 그렇게 무리한 조치를 취한 이유는 그의 시신에서 고문의 흔적을 없애려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유족들의 주장이다.
가까운 친척들마저도 당국의 탄압이 두려워 그들을 멀리할 수밖에 없었던 그 암울한 시기에 믿고 의지할 사람은 오직 사건 관련 가족들뿐이었다. “혼자 당했으면 아마 일가족 자살로 끝맺었을지도 모르나, 같이 당한 사람들이 옆에 있어서 그나마 버틸 수 있었어요. 죽고 싶어도 남편의 누명을 벗겨야 한다는 집념 하나로 더 열심히 살았습니다.”


가족들끼리 같이 장사를 하면서 생계를 유지해 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형극의 세월 속에서도 아이들이 건강하게 잘 자라주어 대견하고 고마울 뿐이라고 한다.


2002년에는 대법원에 인혁당 사건에 대한 재심을 청구했으나 심리를 한번 한 후에 소식이 더 이상 없다고 안타까워 한다. 가족들은 현 정부가 우리의 뒤틀린 현대사의 역사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도 인혁당 사건에 대한 재심을 통해 진상을 규명하고 희생자들의 명예를 회복시켜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인혁당 관련자들은 희생자만은 아닌 민주화운동의 헌신한 인사들이다 - 전창일
모진 고문 속에서도 무고한 동료들을 지켜내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걸었다는 그는 북한의 지령을 받고 민청학련을 배후에서 조종하였다는 인혁당 사건은 완전히 날조된 것이 분명하다고 했다. 그는 지금까지 여러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추진하고 있는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의 노력이 독재권력에 의해 부당하게 희생된 측면에만 치우쳐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지금까지는 날조된 사건의 진상이 정확하게 규명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여겨 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 사건의 진상은 여러 사람들의 노력에 힘입어 어느 정도 드러났다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저는 그들이 평소에 갖고 있었던 생각이나 죽기 전까지의 활동도 이제는 알리는 것이 살아남은 저의 소임이라고 생각합니다.” 라며 인혁당 관련자들 중 일부는 4·19혁명 때부터 계속하여 한일협정 반대와 반 유신투쟁에 다양한 형태로 참여했었다고 덧붙였다.

 

 


 

 

사실 75년 4월 9일 사형으로 이 세상을 강제로 떠난 8명은 그 당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는 재야인사 축에는 끼지 못했으나 대부분 꾸준하게 민주화운동을 위해 헌신적으로 일했던 인사들이라고 한다. 그리고 우리의 분단된 현실에 많은 관심을 갖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많은 고민을 했다는 내용의 증언을 자신이 쓴 글이 담긴 민청학련과 인혁당의 진상을 알리는 책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의 바람은 단순히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인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던 8명의 억울함을 달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부당한 희생자라는 측면을 넘어서 그들이 죽음을 바쳐서까지 소중하게 간직하고 이 땅에 실현되기를 저 세상에서라도 간절히 바라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드러내고 이에 대하여 합당한 평가와 인정이 이루어지기를 진정으로 바라고 있다.


그의 증언에 의하면, 그들은 분명 자신의 독재권력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유지하려고 날뛰는 광기어린 유신독재의 칼날에 쓰러져 간 희생자들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비극적인 남북분단의 상황을 자신의 권력 유지에 끝없이 악용했던 독재권력에 대항하여 민주화와 남북분단의 평화적인 극복을 위한 기나긴 투쟁에 기꺼이 바쳐진 숭고한 희생이기도 한 것이다.

살아남은 자의 의무
암울했던 독재권력의 시절을 지나 우리 살아남은 자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자식 잃은 어머니들, 남편을 졸지에 영원히 빼앗겨 버린 여인들, 다정한 아빠를 잃은 자식들의 30년 묵은 한과 분노는 우리의 폐부를 찌르며 절규를 토해내고 있다. 무고한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고 그들의 명예를 회복시켜야 하는 것은 우리들의 산자들의 의무가 아니냐고.


부족하다고 해도 이만큼 민주화 된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과거의 독재권력이 뿌려 놓은 저 끔찍한 범죄를 단죄하지 못하고 그들에 의해 쓰러져 간 수많은 희생자들의 노력을 망각한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 사회의 진보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더 나아가 그 어떤 광풍 속에서도 희미하게나마 타오르던 우리의 가장 인간다운 내면의 양심과 이상의 불꽃마저 영원히 꺼져버리는 순간을 의미할 것이기에, 우리는 보다 나은 민주화와 한반도의 분단 상황의 평화적 극복을 위하여 더 이상 머뭇거릴 수 없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황정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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