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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고통받는 이들을 도운 한국수난자가족돕기회


1974년에 한국 상황은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1973년 8월 이른바 김대중납치사건으로 국내외 여론이 크게 자극되어 반 유신운동이 활발해졌다. 급기야 박정희는 1974년 1월 8일 긴급조치 1,2호를 공포했으며, 같은 해 4월에는 조작된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을 발표하면서 긴급조치 4호를 발동했다. 이 사건으로 구속된 180명 가운데 인혁당 계 23명 중 8명에게 사형이, 민청학련 주모자 급에게는 무기징역이 그리고 나머지 피고인들에게는 최고 징역 20년에서 집행유예가 선고되었다.
연일 보도되는 조국의 암울한 현실을 수수방관할 수 없었던 해외동포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조국의 민주화를 돕고자 하였다. 그중에는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고통받는 수난자들과 더불어 그 가족이 겪어야 할 생활고에 주목하고 이를 돕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민주화운동 가족의 생계 후원을 위해
필라델피아에 있었던 한국수난자가족돕기회(The Korea Relief Fund in Greater Philadelphia)는 템플대학 화학과 교수인 김순경과 드럭셀 대학 정치과 교수 김응택, 펜실베니아 대학 정치학 교수 이정식 박사 등이 중심이 되어 1974년 8월 1일 필라델피아 인터내셔널 하우스에서 결성되었다. 모임의 목적은 아래의 발기 취지문에 잘 나타나 있듯 모국의 수난자 가족을 돕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였다.

우리들의 걱정의 초점은 이러한 긴장상태 하에 흔히 망각되기 쉬운 이들 수난자 가족들의 복지에 관한 문제입니다.(중략)
동포 여러분! 만일 우리가 다만 몇 푼의 돈을 모아서라도 이들 가족들에게 몇 끼의 따듯한 밥을 제공할 수 있다면 하는 것이 우리가 이 가족돕기회를 조직하려는 까닭입니다.(후략)

 

한국수난자가족돕기회가 언제 해산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1987년까지 활발한 활동을 벌인 것으로 기록에 남아있다. 제1대 김순경 회장(1974~1981년), 제2대 이행우 회장(1981~1987년), 제3대 강근 회장(1987년~?) 체제로 이어지면서 회칙에 명시되어 있듯이 수난자 가족을 돕기 위한 모금, 강연, 간행물 발간과 기타 사업을 전개해 나갔다.
1984년 발표한 10년 활동보고서에 의하면, 한국수난자가족돕기회는 1974년부터 1984년까지 총 13회의 강연회와 13회의 좌담회를 개최하고 약 44,500달러의 지원금을 한국으로 송금하였다.


강연회와 좌담회에는 한국의 현황을 중심으로 김재준 목사, 조지 오글 목사, 짐 시노트 신부, 패리스 하비 목사, 함석헌 선생, 오재식 선생, 한완상 교수, 임창영 박사, 문동환 목사, 이문영 교수 등이 초청되었으며 이러한 자리를 통해 모금운동을 전개하였다. 한국수난자가족돕기회의 정식명칭은 재필라델피아 한국수난자가족돕기회였으나 지부는 없었다. 모금지역을 살펴보면 미국 각 지역을 망라하고 있으며 멀리 캐나다에서까지 한국수난자가족돕기회에 성금을 보내왔다. 각 성금들은 대부분 익명으로 기부되었는데, 이는 성명공개 시 발생할 수 있는 불이익을 처음부터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재정보고서를 살펴보면 익명의 기부자들의 성(姓)과 지역, 모금액수만 적혀 있다.

한국으로의 송금은 대체로 다음 세가지 방법으로 전달되었다. 먼저 메리놀 선교회에서 한국 주서울 책임자 토마스 이곤(Thomas Egon)에게 전달하면, 이를 지학순 주교에게 전해서 필요한 곳에 쓰여지도록 하였다. 또한 함석헌 선생에게 보내 실무적으로 이관복 선생이 필요한 곳에 전달하는 방식을 취하거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를 통해 전달하는 방법으로 수난자 가족을 도왔다

 


매년 보고되는 재정보고서에 기록된 모금사용 출처를 살펴보면 3·1민주구국선언구속자 가족, 평화시장 청소년 노무자 가족, 김지하·문익환 가족, 동아투위 구속자 가족, 평화시장 노동교실 가족, 5·18민중항쟁 희생자 가족, 부산미문화원 방화사건 가족, 송건호·백기완·김재준·이문영·성내운·한신대 고난선언구속자 가족, 이우정·YH노동자·재일교포 수난자 가족, 인혁당 가족과 각 교내시위 사건 등으로 구속된 구속학생들에게 도움을 준 것으로 나타나 있다.

 

해외 동포들의 간절한 염원이 담긴 사료
지난해 사료수집 홍보를 위해 미국을 방문했던 필자는 필라델피아 어느 한식당에서 고 김순경 선생의 아내 김정희 여사로부터 한국수난자가족돕기회 사료를 기증받았다. 필자가 한국수난자가족돕기회 활동을 지면에 소개할 수 있었던 것은 김순경 선생이 자필로 쓴 발기 취지문, 회칙, 정기총회 자료, 각 성금현황을 적은 노트 등이 고스란히 보관되어 있었고, 2대 회장이셨던 이행우 선생으로부터 생생한 활동상황을 직접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면을 빌어 두 분께 감사를 드리고 싶다.

흔히 역사의 현장으로부터 떨어져 현장감이 결여된 안전지대에서 국내 민주화운동의 소극적 지원활동만으로 해외민주화운동을 평가하는 시선이 있었다. 그러나 해외운동권은 주어진 조건과 상황 속에서 나름대로 조국의 민주화와 통일을 위해 다양한 방법을 통해 최선을 다해왔다.


생각해 보라. 그들은 고문과 투옥, 생업의 박탈 등 물리적 핍박이 없는 해외에서 일신의 편안함만을 추구할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조국의 민주화를 외면하지 않고 심화된 모순을 극복하고자 다양한 방법으로 노력하고 활동했다는 사실은 쉽게 폄하되거나 평가절하될 사항이 아니다.

한국수난자가족돕기회를 결성한 주체들이나 성금을 보낸 동포들에게는 소박하지만 간절한 조국 민주화에 대한 염원이 있었다. 아마도 소개할 편지의 한 구절이 한국수난자가족돕기회를 결성한 분들과 이를 지탱해주었던 동포들의 마음을 대변한 것이 아닐까 싶다.



늘 생각해 왔습니다. 어떻게 하면 박해를 받는 이들을 조금이라도 도울 수 있었으면 하는 소망을 갖고 있었는데 좋은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적은 힘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 이상 바랄 것이 없고 우리가 희망한대로의 나의 조국이 될 것이라는 것을 바라면서……(1982년 5월 26일 이금녀 드림)

 

<이현정>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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