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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운동의 현장을 끝까지 지키겠다는 [박래군]

인권운동의 현장을 끝까지 지키겠다는 [박래군]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고 존엄성과 권리에서 평등하다. 사람은 이성과 양심을 부여받았으며 서로에게 형제의 정신으로 행동해야만 한다.(세계 인권선언 제1조)

 

 

 

프랑스혁명 선언에서 유래하여 1948년 세계 인권선언에 의해 세계적으로 승인되고 공표된 위 주장은 인간의 자유와 권리의 보편성 그리고 인간의 존엄성을 엄숙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는 자유롭고 평등한 공동체 형성을 향한 기나긴 투쟁의 역사에서 인류가
이룩한 중요한 이정표이자 고귀한 업적들 중 하나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인간은 본래 자유로운 존재이며 존엄함에서나 권리에서나 평등하기에, 이런 권리와 자유를 누릴 자격은 인종, 성, 종교적 혹은 정치적 입장, 사회적 출신이나 재산 그리고 기타 지위 등의 차이로 인해 훼손될 수 없는 신성불가침한 것이라는 점은 이제 우리 사회에서도 외견상으로나마 많은 사람들의 동의를 얻고 있다. 지금은 상식이 된 이런 주장이 우리 사회에서 불온한 것으로 여겨지고 이를 주장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용기와 희생을 필요로 했던 것이 불과 십수 년 전의 일이다.

 

 

20여 년 이상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을 거쳐 인권운동의 한 길을 지켜온 박래군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를 만나 우리 사회의 인권운동의 역사와 과제에 대해 들어보는 기회를 가졌다. “우리나라에서 인권운동의 역사는 30여 년 정도 됩니다. 1974년에 유신독재가 정권 유지를 위해 희생양으로 삼았던 민청학련과 인혁당 사건이 터지면서 종교단체를 중심으로 인권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는 독자적인 인권운동이라기 보다는 독재 권력과의 싸움의 일부였기에 민권운동의 성격이 더 강했습니다.”
87년 6월항쟁 이후 각 분야의 운동들이 자기 자리를 잡아간 반면 인권운동은 90년대 초반 이후에야 본격화 되었다고 한다. 인권을 침해당한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시작하는 운동의 특성으로 인해 자생성이 특징인 인권운동은 80년대 말부터 시작된 장애인운동, 90년대 초반에 나타나는 성적 소수자와 이주노동자 문제 등을 대표적으로 떠오르게 한다.
“자발적으로 모이다 보니 인권운동 분야에는 구멍가게들이 난립하고 있어 제대로 된 힘을 갖기가 어렵다”며 한국의 인권운동을 다른 나라와 비교하였다. “치열한 반독재투쟁의 일환으로 진행된 우리와 달리 외국의 경우에는 정권을 정면으로 비판하지 않고 우회하여 교육이나 지역 공동체운동 차원으로 진행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다른 시민사회운동 분야와는 달리 여전히 권력에 편입되기를 거부하는 경향이 우리 사회의 인권운동 분야에는 강하다는 설명에서 그의 강한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다.
자생성이 특징인 인권운동
인권운동을 오래 동안 해서일까, 이웃집 아저씨처럼 편안하고 소탈한 느낌을 주는 그가 인권운동을 하게 된 계기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경기도 화성이 고향인 제가 81년에 대학에 입학했을 때 저는 부모님의 자랑이었습니다.” 4년제 대학에 그것도 명문대학에 들어가는 경우가 그의 고향에서는 드물었다고 한다. 어려운 살림에도 성실히 일하시면서 자식들 교육에 열성이셨던 그의 부모님의 기쁨은 그러나 오래 가지 못했다. “광주항쟁 세대인 저는 학업에만 전념할 수 없었습니다.” 운동권 학생들에 대한 독재정권의 탄압의 수단이었던 강제징집의 대상이 된 그는 83년 4월에 전방 부대로 끌려가게 되었다. “그때 어머니는 협심증을 얻으셨고 아버지는 폭음을 하셨다고 합니다.” 평생 자식만을 위해 살아오셨던 그 분들의 심정이 오죽했겠는가.

그러나 자기 민족에게 총을 겨눈 불의한 독재 권력과 그는 타협할 수 없었다. 부모님의 시름과 애환만을 보듬어 안을 수 없는 시대적 상황이 제대 후의 그를 노동현장으로 인도하였다.
“85년에 제대를 하고 부평에서 노동야학을 준비하면서 노동운동에 뛰어들었습니다. 86년부터는 공장에 다니다가 해고되어 해고투쟁을 하고 있었지요.

5·18민중항쟁 이후 다시 시작된 반미운동은 그를 영등포 한미은행 점거농성투쟁으로 이끌었다. “그때 홍보활동을 맡았기 때문에 TV에 제 얼굴이 많이 나왔었나 봅니다. 그 후 고향 사람들이 저희 집에 발길을 끊었답니다. 빨갱이와 만나면 다친다 뭐 이런 거죠.”

87년 6월항쟁 이후 감옥에서 나온 그를 영웅처럼 대접하는 동네 어른들의 달라진 모습 속에서 그는 세상의 변화를 실감할 수 있었다. 계속 민주화운동의 한 길을 걸어가던 그에게 88년 6월, 평생 잊을 수 없는 충격적인 사건이 닥쳐왔다. 친동생 박래전 열사가 “광주는 살아있다”, “청년학도여 역사가 부른다. 군사파쇼 타도하자.”고 외친 후 분신으로 군사독재에 항거한 것이다. 비슷한 현장과 상황은 봤지만 자신의 일이 되리라 생각지 못했던 그에게 동생의 죽음은 말할 수 없는 슬픔과 번민을 안겨다 주었다.

동생의 죽음
그에게 영향을 받아 민주화운동에 뛰어들었던 박래전 열사는 동생이자, 그 누구보다도 가까운 동지였다. 운동을 하면서 한번도 크게 방황하거나 회의한 적이 없었지만, 동생의 죽음으로 인해 심각한 마음의 상처와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동생의 죽음을 실감할 수 없었던 3개월 동안의 방황 끝에 그는 슬픈 현실을 받아들이면서 동생 몫까지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할 것을 다짐했다.
유가족이 된 그는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유가협) 활동에 참여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인권운동과의 인연은 시작되었다. “88년부터 89년까지 135일 동안 지속된 유가족들의 의문사진상규명요구투쟁을 지켜보면서 유가협에서 활동할 것을 결심했습니다.” 그 후 5년 동안 유가협에서 활동하면서 민족민주운동이라는 거대담론으로는 접근하기 힘든 문제가 있음을 느끼기 시작했다.
막연했던 그 느낌은 93년에 UN이 주최한 비엔나 세계인권대회에 참여하면서 구체적으로 다가왔다.  

 

 

인권운동의 소중함을 절실하게 깨닫게 되었고, 그는 이 체험을 ‘개명’이라 표현했다.

우리나라의 인권조직 활동가들이 국제무대에 참가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때까지 우리나라의 인권운동은 양심수 석방이나 고문 추방 등과 같이 정치운동을 하다가 탄압을 받는 사람들과 관련된 범위에 국한되어 있었습니다. 비엔나 인권대회에서 인권운동의 폭이 굉장히 넓음을 알게 되었고 인권운동을 심화시키고 다양화하는 것이 우리나라의 민주화운동에도 절실하게 요청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비엔나 세계인권대회와 ‘개명’

93년에 ‘인권운동사랑방’이라는 단체가 결성되면서 인권운동이 우리나라에서도 본격적으로 시작되기에 이르렀다. 94년부터 그도 이 단체에서 활동하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요구되는 인권운동의 과제에 대한 그의 의견을 듣고 싶었다. 네 가지로 대답은 이어졌고, 과거사 청산을 첫 번째 과제로 들었다. “단순한 과거 청산이 아니라, 그것이 바로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중요한 과제입니다. 과거에 일어난 사건을 중심으로 접근하는 방식을 넘어서서 구조적인 문제로 바라봐야 합니다. 인권유린을 가능하게 한 법과 제도 그리고 비민주적인 사회·문화적 의식들을 극복하는 방향으로 과거사 청산의 문제가 이해되어져야 한다고 봅니다.”
민주주의 발전을 가로막는 과거사 화제는 자연스럽게 최근 국회에서 통과된 ‘진실규명과 화해를 위한 기본법’(과거사법)으로 옮겨갔다. 과거사법이 해방 후에 구성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의 비극적인 실패 이후 처음으로 제정된 과거사를 정리하기 위한 법이라는 점에서 일정한 의미를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심각한 여러 문제점을 안고 있다며 시행 전에 개정운동을 해야 한다고 그는 강조했다.
조사 대상에 ‘대한민국을 적대시하는 세력에 의한 테러, 폭력 등’을 포함시킨 것은 소모적인 색깔 논쟁 등을 일으킬 소지가 있고, 국가보안법으로 처벌받은 사건을 다시 조사하는 식으로 악용될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법안 발의 목적이나 명칭과는 달리 지난 시절 국가 공권력의 불법, 인권유린 행위를 철저히 규명하자는 취지가 크게 퇴색되었고, 위원회의 권한이나 구성 등에서도 한계가 많다고 비판했다.

둘째로 국보법이나 사회안전법과 같은 시민의 정치적 권리를 침해하는 부분에 대한 과제를 제시했다. “우리가 의식을 못하고 있어서 그렇지 정보인권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전통적인 시민적·정치적 권리의 획득과 그 폭의 심화·확산이 여전히 문제가 되기 때문에 우리의 관심 밖에 놓여 있지만, 정보인권의 심각성에 대해 크게 우려하고 있었다.

“셋째, 경제사회문화적 권리 분야로서 빈곤층의 증가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것이 가장 핵심적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IMF 이후 본격적으로 도입된 신자유주적인 경제정책의 결과 경제위기를 극복하는 데는 일정 정도 성공했지만 소득분배구조의 악화, 빈부 격차의 심화, 비정규직 노동자의 급속한 증대, 자살자의 급증에서 확인되는 것처럼 우리 사회의 공동체는 해체와 분열 그리고 갈등의 위기에 노출되어 있다.
형식적·절차적 민주주의의 확산과는 대조적으로 노동과 사회보장 및 복지 분야에서의 발전은 아직도 이렇다 할 진전을 보이지 않고 있다. 그러나 사회적 시민권의 보장 없는 사회적 불평등의 심화와 빈곤의 세습화 현상은 궁극적으로는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불가능하게 할 뿐 아니라, 민주주의 자체에 대한 심각한 부정적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빈부 격차를 해소하고 계속 확대되고 있는 빈곤층을 위한 보다 광범위한 사회안전망의 필요성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고 그는 힘주어 말했다.
마지막으로 성적 차별을 극복하는 양성 평등의 문제 이외에도 외국인 노동자나 성적 소수자 등 다양한 형태의 소수자들의 차별과 배제의 부분과 연관된 인권문제를 거론하면서, 이 분야가 우리 사회에서도 앞으로 점점 더 중심 의제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황정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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