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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투정 - 가톨릭노동청년회

 

아름다운투정

- 가톨릭노동청년회


글·송기역 songazzinaver.com



『요셉 조성만 평전』을 탈고할 무렵, 박순희(아녜스)를 만났다. 사람들은 그 이를‘선한 싸움꾼’이라고 불렀다. 우리가 만난 곳은 향린교회 목회실이었 다. 향린교회에서 판넬골목을 지나 백여 미터 오르면 그이가 숱하게 드나들 었던 명동성당이 있다. 박순희는 매일 명동성당에 들른다. 성당에 가면 추위 에 아랑곳하지 않고 서각을 하는 문정현 신부가 있다. 그이는 문정현 신부와 함께 침묵과 기도로 한강, 낙동강, 금강, 영산강에서 죽어가는 생명들과 함께 하고 있다. 우리의 만남은 70년대에 인권변호사로 거듭난 이돈명 변호사의 선종으로 하 루 연기되었다. 만나자마자 박순희는‘커다란 동지를 또 한 명 잃었다’고 애석 해했다. 우리의 대화는 이돈명에서 조성만을 거쳐 까르딘 추기경으로 이어졌 다. 벨기에의 까르딘 추기경은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노동자들의 사제가 될 결심을 한다. 그는 사제가 된 후‘지역노동조합’,‘ 청년노동조합’을 결성한 다. 1915년 독일군이 벨기에를 침공하자 저항 활동을 벌였고 곧 체포되어 감 옥에 갇힌다. 석방 후 다시 투옥되어 10년 형을 선고받고 감옥에서 가톨릭노 동청년회를 구상한다. 1925년 인간의 존엄성과 노동의 소중함을 일깨우기 위 한 운동 단체 가톨릭노동청년회(약칭‘지오쎄’)를 만든다. 지오쎄의 활동은 교역자가 아닌 평신도 중심의 운동이고, 노동자가 주체가 되는 운동이다. 일평생을 노동자와 함께하며 수백만 명의 사도들을 투사로 이끈 까르딘 신부는 1967년 세상을 떠났다. 그는‘전 세계 노동자의 구원은 지금부터 시작된다.’라는 말을 남겼다.

‘인형의 나라’의‘노라’들

1958년 11월 16일 까르딘 신부가 한국을 방문해 명동 성당에서 첫 투사선서식을 진행한다. 박성종을 지도신부 로 성모병원 간호사 9명이 한국가톨릭노동청년회를 만 든 날이다. 미사와 함께 진행하는 투사선서는 하느님과 신도들 앞에서 투사가 되기로 맹세하는 의식이다. 가톨 릭에서 공식적으로‘투사’라는 용어를 쓰는 게 낯설었 다. 박순희가 설명한다. “앞서서 나가는 사람을 투사라고 해요.‘ 레지오 마리 애’라는 평신도 단체가 있는데‘마리아의 군단’이라는 뜻이에요. 견진 받는 것을 하느님의 군단이 되는 것이라 고 표현해요. 세상의 것을 따르지 않고 하느님의 것을 따 르는 군인이 된다는 뜻이죠. 가톨릭엔 이렇게 군대 용어 가 많아요.” 가톨릭노동청년회의 초창기 활동은 서울지역 넝마주 이들을 대상으로 한 위생교육과 한글교육, 그리고 가난한 노동자들을 위한 식당‘보리싹’운영 등이었다. 지오쎄 정신이 사회의 전면에 부상하기까지 기다림이 필요했다. 1964년 10월 지오쎄 농촌청년부가 만들어진다. 아직 농업국가인 한국에서 농촌청년들의 비중이 크기 때문이 었다. 1966년 농촌청년부는 지오쎄에서 독립했고 1972년 가톨릭농민회를 탄생시킨다. 성모병원에서 근무하던 간 호사 9명의 여성 투사로 시작된 지오쎄는 1961년 5월 한 국여성지오쎄(JOCF)를 만든다. 서울대교구 여성지오쎄 회장 전지숙은‘JOC 여성의 위치’라는 글에서 회원들에 게『인형의 집』의‘노라’의 입장에 서자고 역설한다. “남성들의 인식을 그대로 감수할 것이 아니라, 여성은 여성으로서 독특한 성격이 있다는 것을 계몽하는 데 더 많은 적극성을 띤‘노라’의 입장에 서야 하지 않을까?” 이 같은 환경은 지오쎄 역사를 수놓는 무수한 여성 노 동자들의 활약상을 낳았다. 박순희는 지오쎄의 가장 큰 장점이 여성과 남성의 동등한 지위라고 말한다. “남자 회장 따로 여자 회장 따로 있어요. 그땐 가부장 적이고 여성비하적인 문화가 심했잖아요. 여성 노동자들 이 오빠며 남동생 공부시키느라고 시골에서 올라왔어요. 어떤 모임을 가도 자기 발언권이 없었어요. 그래서 독자 성을 두는 거죠. 거기서 여성들이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 었어요.” 1962년부터 경제개발계획이 시작되었다. 정부는 노동 자들을 산업화의 역군이라며 찬양했지만 저임금 정책으 로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했다.‘ 죽음의 노동’시대였다. 지오쎄의 활동을 지지하고 뒷받침한 교황 비오 11세가 회 칙에 기록한 글은 70년대 한국 노동자들의 모습 그대로다. “생명 없는 물질은 공장에서 값있는 상품이 되어 나오 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인간은 그곳에서 한갓 쓰 레기로 변하고 만다.” 70년대 지오쎄 청년 투사들의 역할은‘고기를 낚는 어부’가 아니라 갈릴리 호수를 정화시키는 것이었다. “웅덩이에 물고기들이 살고 있는데 물이 썩었어. 맑은 물로 옮기면 물고기가 살잖아요. 하지만 웅덩이를 맑게 하면 앞으로 태어날 물고기까지 살리는 거예요. 그것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거예요.”

노동은 하느님께 드리는 제사이다

박순희가 투사가 된 것은 1968년이었다. 한 해 전, 대한 모방의 직포기술자로 일할 때 동료 송숙자의 소개로 지 오쎄를 만난다. 가정 형편으로 고등학교 진학과 교사의 꿈을 포기하고 노동자가 된 후 성당에 발길을 끊었을 때 였다. 영아세례를 받은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 시절 그이는 꿈을 이루어주지 않는 하느님에 대한 원망이 가 득했다. 그이가 송숙자를 따라간 곳은‘노동자 모임’이었다. “성당에 청년 모임이나 학생 모임은 있는데 노동자 모 임은 없었어요. 그러니까 소속감이 없죠. 공장에 다닌다 는 것 때문에 누구한테 말도 못하고 창피하고 열등감에 눌려 있었어요.” 이날 지도신부인 도요안을 통해 까르딘 신부를 알게 되었고, 근로기준법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다. 눈이 뜨이 고 귀가 열리는 체험이었다. 노동자는 창피한 존재가 아 니라‘금은보화보다 소중한 존재’였던 것이다. 이날부터 그이는 지오쎄 활동에 투신했고 투사가 되었다. 박순희는 1968년 당산동 성당에서 투사선서식을 했다. 그이가 속한 팀은‘잔다크팀’이었다. 투사 아녜스는 근 로기준법을 달달달 외웠고, 노동자들의 권리를 많은 이 들에게 알리기 위해 잠을 아꼈다. 대한모방에서 지오쎄 에서 배운 것을 실천했다. “‘기도하며 노동하라. 노동은 기도요, 작업장은 제대 (제단)이다. 노동은 그 자체로 하느님께 드리는 제사이 다. 일하는 현장에서 예수의 정신으로 세상을 변화시키 자’고 했어요. 지겨운 노동이 아니라 기쁨의 노동, 절망 이 아니라 희망의 삶으로 인도하는 것이 지오쎄의 활동 이었어요.” 전도에 급급해 보는 이마다 교회로 끌고 가는 게 아니 라 예수쟁이의 삶을 묵묵한 실천으로 보여주었다. 지오 쎄 청년의 모습에 반한 노동자들이 하나둘 함께하며 새 로운 지오쎄가 되었다. 노동환경이 변화되는 것을 보면서 신바람이 났다. 한 때 교사가 되고 싶었던 박순희는 이러한 활동이‘선생님 못지않은 역할’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가족들 모두 그이 의 노동운동을 지지했다. 특히 아버지는 누구보다 잘 이 해하고 격려했다. “내가 전태일 열사 얘기를 하니까 통하더라고요. 평생 나를 지지해줬어요.” 박순희가 투사선서를 하던 즈음 구로공업단지가 건설 되었다.‘ 노동자의 터전을 만든다’는 소식에 전국의 지 오쎄 회원들이 공단을 찾아가 시찰을 했다. “우리가 일할 터전이 생긴다. 신세계가 열린다고 들떴 어요. 나중에 보니까 노동자들 착취의 현장이더라.” 박순희는 1972년 구로공단 지역에서‘성심회 공동체’ 를 시작한다. 이에 앞서 1970년 11월 독실한 크리스천인 전태일이 분신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때 전태일은 스 물 두 살이었고, 그이는 스물 세 살이었다. 전태일처럼 죽 을 용기가 없다고 생각한 그녀는 수녀원에 갈 결심을 한 다. 하지만 수녀원은 인연이 닿지 않았다. 지도신부 도요안이 노동자와 함께 일하는 공동체를 만 들자고 제안한다. 김수환 추기경의 도움으로 가리봉시장 인근에 공간을 얻고, 정인숙 등과 함께‘성심회 공동체’ 생활을 시작한다. 프라도수녀원의 전신이다. 김수환 추기경은‘까르딘 정신’의 신봉자였다. 프라도 는 원래 프랑스에서 노동사제들이 노동자들을 만나는 술 집 이름이었다. 인천에서 김정대 신부가 운영하는 술집 ‘삶이 보이는 창’을 연상시킨다. “외국에선 신부들이 노동현장에서 일하고 노동자들과 함께 투쟁하며 지내요. 성직자 우대하고 이런 건 우리나 라 문화죠. 신부도 현장에서 노동하고 가난한 삶을 살아 야 한다 해서 만든 거예요.”

“신부님때문에우리인생완전조졌다구요”

1974년 12월 말, 원풍모방은 민주노조를 만든다. 노동 조합 지부장으로 뽑힌 지동진이 회사 상무에게 구타당하 자 박순희는 병문안을 갔다. 그곳에서 원풍모방에 입사 해 도와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어렵게 민주노조를 만들었는데 여기가 제대로 뿌리내 리게 하는 게 중요하다고 공동체에서 논의했어요. 그때 는 소개로 공장에 들어갔잖아요. 그 끈 때문에 제대로 활 동하지 못해요. 그래서 소개자 없이 직포 기능공을 모집 할 때 시험 보고 붙어서 들어갔어요.” 원풍모방에서 박순희는 인기 있는 언니였고,‘ 선한 싸 움꾼’이었다. 그이는 한때 지오쎄의 모토였던‘공장 안 에 교회를 세우자’는 슬로건을 바탕으로“원풍모방에서 일하는 내가 몸된 교회다.”라며 공장 안에 교회를 세웠다. 그이는 원풍모방 노동운동 성공의 요인을 지오쎄 운 동의 특징인 소그룹 활동이라고 말한다. “지오쎄 방식을 원풍모방에 적용한 거죠. 자기 혼자 똑 똑한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이 역할을 할 수 있게 파견을 하 는 거죠. 노동자 한 명 한 명을 리더로 만들어요. 피를 나 눈 형제보다 더 긴밀한 관계가 됐어요.” 그때 맺은 소그룹 모임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1980년대가 되자 광주에서 피를 부른 신군부는 맨 먼 저 노동운동을 탄압한다. 노동법을 바꾸고 노동운동가를 잡아들인다. 신군부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에 연루되었 다며 박순희를 사회 정화책에 의해 해고시키고, 제3자개 입금지법 위반으로 감옥에 구속시킨다. 지오쎄 청년들은 광주 민중항쟁 기간에도 활발하게 활 동을 벌였다. 도청에서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홍순권이 죽 었고, 광주교구의 김성용 신부는 계엄군의 진압을 막기 위 한‘죽음의 행진’에 참여하고, 광주에서 빠져나온 후‘광주 항쟁, 분노보다 슬픔이’라는 글로 광주의 실상을 세상에 알린다. 이외에도 많은 회원들이 항쟁 기간 부상당했다. 박순희가 마지막으로 감옥생활을 마치고 나온 건 1983년 이다. 서울의 공장마다 학생운동 출신들이 노동운동에 투신하고있었다.‘ 학출’운동가들은70년대노동운동가 들을‘조합주의자’라며 비판했다. 70년대 노동운동가들 과 80년대 노동운동가들의 만남이 발전적이지 못했던 부 분은 여러모로 아쉽다. 일부 신세대 노동운동가들의 모 습에 회의하고 절망할 때도 많았다. “그때 정치적 바둑을 두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자 신의 출세를 위한 징검다리로 노동운동을 하고 있다는 걸 느꼈죠.” 미련 없이 지방으로 발길을 돌렸다. 창인동 성당의‘노 동자의 집’에서 노동자들을 만났다. 전주에 내려가면서 문정현 신부와 가까워지게 되었다. 이때 본격적으로 맺 어진 문정현 신부와의 인연은 매향리로, 대추리로, 용산 참사 현장으로, 4대강으로 이어지고 있다. 박순희는 하느님 창조 질서의 기본인 자연을 훼손시키는 것을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그이는 절망을 뚫는 것은 기도라고 말한다. “몸의 핏줄인 강을 파헤치면 살겠어요? 죽지. 강은 핏 줄이잖아요.” 박순희 아녜스의 지난 40여 년은 지오쎄와 함께한 투 사의 삶이었다. 돌이켜보면 그이의 삶에 까르딘과 문정 현이라는 두 명의 닮은 신부가 있었다. “70년대 그 시절에 모이면 까르딘 신부님 사진을 보면 서‘까선생님 때문에 우리가 신세를 조졌다’고 투정하곤 했어요.” 땅바닥으로 내려와 노숙 신부가 된 문정현은 언젠가 박순희에게 말했다. “내가 이렇게 거지가 된 건 다 니들 때문이야.” 『선한 싸움꾼 박순희 아녜스』에 실린 글에 따르면, 문 정현 신부의 사제서품 40주년을 기념하는 자리에서 박순 희는 다르게 말했다. “아니 입이 삐뚤어졌어도 말은 바로 해야지. 신부님이 우리들 인생 조진 것 아녜요? 우리 인생 완전 조졌다구 요. 그러니까 신부님이 일정 정도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런 게 내 생각이예요. 신부님 따라다니면서 성질도 포악해 지고 말이지.” 까신부님‘- 선한 싸움꾼’아녜스‘- 깡패 신부’문정현이 얽히고설킨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투정이다. 현재 가톨릭노동청년회는 명칭을 가톨릭까르딘청년회 로 개정했다. 국제가톨릭노동청년회는 진보와 보수로 갈 리었고, 한국은 보수를 따라가고 있다. 박순희는 지금이 야말로 까르딘 추기경의‘지오쎄 정신’이 필요하다고 역 설한다. “돈만 중요해지고 노동이 천시되는 지금이 더 중요해요. 우리 노동자들도 정신적, 실천적으로 각성할 게 많아 요. 하느님의 창조 사업의 협력자로 살아야 해요. 하느님 이 만들어주신 것을 더 좋게 하는 것이 노동자의 일이죠. 그 역할을 해야 합니다. 기본으로 돌아가야죠. 지오쎄 정 신을‘지금, 여기’에서 부활시켜야 해요.” 노동단체가 없던 1970년대 노동자들의 친구는 개신교 의 도시산업선교회와 천주교의 가톨릭노동청년회였다. ‘지오쎄 정신’은 절망적인 노동을 하던 70년대 사람들에 게 희망을 줬다. 새로운 시대‘지오쎄 정신’부활의 역할 은 이제 다음 세대 가톨릭 청년들에게 주어졌다.

 
 
송기역_ 『허세욱 평전』과 르포집『흐르는 강물처럼』을 펴냈다. 신부의 삶을 꿈꾸다 명동성당에서 할복 투신한 순교자 요셉 조성만의 삶을 담은 평전을 집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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