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책 저런책]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 - 왜 민주주의에서 마음이 중요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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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
-왜 민주주의에서 마음이 중요한가

글 홍순성 rosaleo@naver.com



“우리는 민주주의를 두 가지 이유로 환호한다. 하나는 그것이 다양성을 허락하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비판을 허용하기 때문이다. 그 두 가지면 충분하다. 세 가지도 필요 없다”
(『민주주의에 대한 두 가지 환호』, E. M. 포스터. 재인용)




힐링. 마음의 치유를 다루는 소위 힐링 관련 도서들이 베스트셀러의 상위를 점령하고 있다. 낙담하고 상심하고 우울한, 상처받은 자들이 “위로와 위안이 내게 정말 필요해.”하고 동시에 소리 없이 외치는 것은 아닐까? 그 치유라는 행위 자체가 마음의 상처를 근원적으로 회복할 능력이 있는 것인지, 혹시 탄산수처럼 일회적이고 찰나적인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든다. 그렇다고 치유행위를 포기하자는 것은 아니다. 특히, 우리의 일상생활을 잘 다듬어 가려는 핵심적이고 영원한 인간적 노력으로서의 정치(政治)가 단순히 청와대, 여의도 국회, 관료사회, 언론 등의 한심한 작태가 전부인양 되어버린 상황에서 우리 스스로가 더 이상 어찌해 볼 도리가 없다고 체념하며 그에 대한 치유를 포기한 채 살아간다면 우리 사회는 더욱 더 아비규환의 생지옥이 될 것이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이 상처를 깊이 들여다보기를 두려워하며 스스로의 마음의 문을 굳게 닫고 소비주의와, 희생양 만들기라는 거짓 치료제에 중독되어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파커 J. 파머의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 이 책의 원제는 "Healing the heart of Democracy"로 ‘민주주의의 마음을 치유하기’ -이 눈에 들어온 것도 어쩌면 이런 비통함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차이의 가치

파커 J. 파머(1939~) 또한 미국의 정치문제가 너무 광대하고 복잡하며 일상의 뿌리에서 매우 멀어서 우리같이 평범한 사람들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무력감을 느끼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 무력감은 결국 타자에 대한 불신과 두려움을 조장하고 종국적으로는 미국 사회의 공동체 기능을 마비시킬 것이라고 경고한다. 그는 미국 사회를 떠받치고 있는 다양성이 미국 민주주의의 진정한 가치라고 말한다. 그러나 특히 9.11 이후 정치권력과 거대자본은 정보를 통제, 조작하고 규제를 무력화시키는 방식을 통해 ‘공포’를 유포시키며 차이에 대한 뿌리깊은 두려움을 조장하면서 시민들로 하여금 증오심을 부추기고 폭력을 유발시켰다. 이로 인해 미국 사회에 전통적인 가치로 자리 잡고 있던 ‘다양성’으로 이루어진 공동체가 급속하게 붕괴되어 가고 있다고 개탄한다. 일자리, 집, 저축을 잃고 정치와 경제 시스템에 대한 자신감을 상실하고 테러의 공포에서 비롯되는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이다. 파머는 다시 다양성을 회복하기 위한 노력을 호소한다. 그 다양성은 저절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고, 필연적인 긴장을 관찰하고 공손하게 ‘차이의 가치’를 인정하는 데서 온다.


파커 파머가 말하는 민주주의란 무엇일까

파머는 글머리에 소개한 E. M. 포스터의 말을 인용하며 민주주의에 대해 길게 설명한다. 다양성의 허용과 비판의 허용이 민주주의를 다른 정체(政體)와 구별시키는 요체라는 것이다. 물론, 다양성은 필연적으로 낯선 것에 대해 긴장하는 본성을 유발할 것이고, 다양성이 커질수록 공동체는 이완된다는 점을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낯섦은 긴장을 낳고 긴장은 폭력과 전쟁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역사적 경험도 인정한다. 하지만 파머는 민주주의를 더 번영시키기 위해서는 오히려 필연적으로 이러한 긴장을 관찰해야 하며, 그리고 그 긴장을 “줄이려는 노력이 아니라 마음속에 품어야하는 에너지로 바라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에너지는 다름 아닌 다양한 사람, 다양한 갈등이 공존하는 공적영역에서 배양되기에, 사적인 영역 속으로 더 이상 숨어들어가지 말고(텔레비전이나 인터넷에 흠뻑 젖어들지 말지어다!) 일상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공적인 삶의 장소와 활력을 회복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 공적인 영역에서 사람들은 다양한 이해관계와 갈등을 끌어안은 가운데 발언하고, 행동하고, 모두에게 영향을 끼치는 사안에 대해 결정하게 되며 그러한 일상의 경험들이 쌓여 종국에는 “최선의 지도자를 선택하고 최악의 지도자에게 저항”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민주주의의 에너지는 공적인 영역 속에서 다듬어진 “상호존중, 너그러움, 타인의 말에 열린 마음으로 경청하는 것, 용기, 신뢰 그리고 결심을 위한 내적인 능력”에 다름 아니다.


어떻게 민주주의의 마음이 회복되어야하는가.

<근원적 민주주의를 위한 안정한 공간>이라는 장(章)에서 파머는 우리가 민주주의의 시민이 되고자 한다면 혼란스런 대중매체가 아닌 개인적 경험에 의해 규정되는 개념의 공간에서 시간을 보내야하며, 혼자서 자신과 대화를 나눌 능력을 키워야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내면을 바라보는 고독의 공간이 필요하듯, 낯선 사람들과 함께하는 작은 모임의 안전한 공간도 필요하다. 그 공간에서 생기는 신뢰가 정치적인 힘이 된다. 로자 파크스가 그랬듯이 중대한 사회변화는 “흔들의자에 앉아 서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관심사를 공유하는 사람들로부터 비롯된다.”는 게 파머의 제언이다. 그는 미국 국민의 80%가 미국이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국가라는 국가신화에 빠져있다고 통탄한다. 겸허함을 잃은 뻔뻔한 상태의 미국이 다시 민주주의를 회복하려면 ‘로자 파크스의 결정’과 같은, 일련의 운동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교육과 종교에 대한 저자의 식견을 개괄하는 <교실과 공동체> 장(章)은 공감이 컸다. 그것을 제외하고, 내게 흥미와 공감을 준 주장을 하나 들어보라면, “낯선 자들과 함께하는 삶이 민주주의의 마음의 습관을 계발하고 연습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시민들이 책무를 배우고 변화를 위해 투쟁하는 과정에서 공공선의 비전을 읽힐 수 있는 ‘장소’에 대해서도 공감한다. 다시금, ‘장소’의 중요함을 이 책에서도 만난다.


다시,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우리의 민주주의는 선거를 통해서 뽑은 대리인, 선량(選良)에게 나(국민)의 주권을 대리해서 행사토록 위임하는 대의 민주주의다. 어떤 대리인, 어떤 정당 혹은 정파가 나의 정치적 견해(의견, 이익, 선호, 혐오, 우선순위)를 대변할 것이라는 믿음으로 투표장에 간다. 선거와 차기 선거 사이의 정해진 시간동안 유권자는 휴지기다. 통치자이면서 동시에 피통치자인 시민은 대리인들의 정치에 실망하고 분노하고 절망하며 심지어 상처를 받는다.

파머의 책이 나온 이후, 2011년 9월 미국에서는 점거운동(occupy movement)이라는 새로운 양상의 직접 행동이 있었다. 이미 이집트, 그리스, 스페인에서 일상화되었지만 미국에서는 불가능하다고 보았던 직접 행동이었다. 개인으로선 어떻게 할 수없는 절망스런 불가능성.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음을 광장에서, 공원에서 이야기하고 떠드는 점거운동을 시스템의 붕괴를 알리는 신호로 읽을 수도 있겠다. 2008년 있었던 한국의 촛불시위는 2011년 미국 월가 점거운동과 닮아있다. 지도자 없음, 문화제 같은 놀이처럼 진행된 집회 등등. 우리는 이미 대의 민주주의의 한계를 직접 보완해 보았던 게 아닐까.

우리(나)의 상처받음은 대의제 민주주의의 한계에서 오는 필연적인 징후는 아닌가. 스스로 낯선 사람들과 대화하는 안전한 장소에서 공동체를 이루는 가운데 변화를 꾀한다면 상처는 치유될 것이고 건강한 민주주의는 회복되지 않을까. 내적 충실함이 중요하고, 신뢰하는 작은 모임이 중요하다!

하지만 지나친 실천과 행동으로 인한 과로(過勞)가 내적 지혜의 뿌리를 죽일 수 있다는 토마스 머튼의 경구 또한 소중하다. 경건한 신앙심을 가진 파커의 글을 읽고서 든 짧은 생각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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