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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책 저런책] 자기 착취적 노동시대에 ‘좋은 노동’은 가능할까?『굿 워크』

자기 착취적 노동시대에 ‘좋은 노동’은 가능할까?
『굿 워크』 에른스트 F. 슈마허 지음, 박혜영 옮김/ 느린걸음

글 김장환/ 프리랜서 편집자




재독 철학자 한병철의 책 『피로사회』가 지난 해 편집자가 뽑은 올해의 책에 꼽혔다. 한 시대를 꿰뚫는 철학자의 시선이 날카로울 뿐 아니라 이 시대를 정의하는 ‘피로사회’라는 개념이 명쾌해서일지도 모른다. 신자유주의가 열어놓은 성과사회의 음지는 개인이 스스로를 착취하여 가해자이자 곧 피해자로 전락하고 만다는 이야기. 다른 누군가가 아닌 스스로가 스스로를 착취하여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가 된다는 이 책을 읽으며 들었던 의문 하나!

“그렇다면 이 자기 착취의 시대에 맞서는 길은 무엇일까?”

쉬 답을 얻지 못한 채, 신의 저주로 엄청난 식욕을 주체하지 못하고 결국 자기 스스로를 잡아먹은 에릭시톤을 떠올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특히나 자타가 인정하는 일중독자인 나는 피로사회에서 피폐해진 가장 전형적인 현대인의 초상이란 말인가? 생각이 여기에까지 이르자 거울에 비친 내 모습에서 피를 뚝뚝 흘리며 자신의 몸을 씹어 삼키는 에릭시톤의 광기어린 모습이 얼비치는 것 같아 두렵기까지 했다. 그러면서 과도한 노동, 스스로를 착취하는 노동에 대항하지 못한 스스로가 한심해 보였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영 석연찮은 점이 있었다. 그렇다면 적절한 노동이란 무엇일까? 스스로를 착취하지 않는 노동이란 무엇이며, 그것을 통해 어떻게 이 피로사회에서 피로가 아닌 행복을 얻을 수 있을까? 아니 과연 우리 시대에 그런 노동이 가능하기는 할까?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자기 착취적 노동 시대에 노동이 과연 ‘좋은’ 것일 수 있을까?”라는 의문에 대한 답을 찾던 중 만난 책이 바로 『굿 워크』이다.

한창 고민하던 때인지라 제목에 이끌려 집어 들었지만, 실은 저자의 이름을 보는 순간 더 믿음이 갔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라는 정말 아름다운 명구로 근대 이후 지배적 패러다임에 한방 날린 사람, 바로 에른스트 슈마허였던 것이다.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오른 『작은 것이 아름답다』를 읽으며 충격 아닌 충격을 받았던 때가 벌써 십오륙 년 전, 그 책을 읽으면서 소위 80년대식 사회변혁론이 틀릴 수도 있겠구나 처음 생각했었다. 돌아보면 그 책을 읽던 1990년대 중반 이후로 알게 모르게 그 책이 내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이 틀림없다. 거대 담론에서 삶의 소소한 부분까지 대안을 찾아 실천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런 생각은 ‘마을’을 중심으로 한 커뮤니티 활동에 적극 참여하게 하였으니 말이다. 여전히 그의 생각에 100%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생각은 지난 1980년대 몰입했던 거대 담론의 구멍들을 보완하는 데 큰 역할을 했던 것만은 분명하다. 적어도 내게는!

그런 슈마허가 말년에 미국을 돌면서 했던 강연을 정리한 책이 바로 『굿 워크』이다. 책을 펼치면 조지 맥로비의 추천 서문 앞에 나오는 알베르 카뮈의 인용문이 먼저 눈길을 끈다.

“노동을 하지 않으면 삶은 부패한다.
그러나 영혼 없는 노동을 하면 삶은 질식되어 죽어간다.”

면벽수도 하듯이 이 짧은 글을 두고 한참을 멍하니 있어야 했다. 결국 피로사회의 자기 착취적 노동은 ‘영혼 없는 노동’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닐까! 알베르 카뮈의 이 글은 이 책 전체의 논지를 정확히 압축하는 듯이 읽혔다. 그리고 프롤로그에서 내가 가지고 있던 거의 모든 문제를 명쾌하게 정리하고 있었다. 기실 문제라는 것을 정확히 이해한다면 답은 자연스레 나오게 마련이니, 프롤로그만 제대로 읽어도 ‘영혼 없는 노동’의 시대를 건너는 법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말한다.

“인간의 존재 목적이나 목표와 인간의 노동은 어떤 연관이 있는지 생각해봅시다. 누구나 이 세상에 태어나 단지 생존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자신을 완성하기 위해서도 노동을 해야 한다고 인류의 모든 가르침은 말하고 있습니다.”

프롤로그에서 간단히 언급한 노동의 가치는 피로사회의 자기 착취적 노동의 본질을 아주 분명하게 보여준다. 바로 ‘자신을 완성하기 위한 노동’이라는 측면은 배제된 ‘단순한 생존을 위한 노동’, 다시 말해 반쪽짜리 노동, 균형을 잃은 노동이 종국에는 인간의 삶을 피폐하게 하는 원인이라는 지적인 셈이다. 저자는 이어 인간 삶의 중심을 이루는 노동의 진정한 목적을 세 가지로 정리한다. “첫째는 인간 삶에 꼭 필요하고 유용한 상품이나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서입니다. 둘째는 선한 청지기처럼 신이 주신 재능을 잘 발휘하여 타고난 각자의 재능을 완성하기 위해서입니다. 셋째는 태생적인 자기중심주의에서 해방될 수 있도록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하고 협력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세 가지 목적을 이루는 노동이라면 에릭시톤의 자기 파괴적 탐욕에서 해방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 책에서 슈마허는 우리에게 좋은 노동,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오히려 인간이란 무엇이며, 인간은 어디에서 왔는가,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이 목적이며, 좋은 노동은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자 목적에 이르는 길이라고 이야기한다. 더불어 현대의 유능한 노예와 기계, 시스템과 관료주의에 의해 이루어지는 노동이 아니라 노동하는 자 스스로 발전하고 스스로를 완성하는 노동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힘주어 이야기한다. 그것은 시스템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들의 이념적 지향을 재설정하는 데서 출발한다고 말이다. 1970년대 중반에 이미 30년 후의 미래를 거울 들여다보듯 예견한듯한 이 책을 읽으면서 슈마허의 예지에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결국 문제는 왜곡된 노동을 바로세우는 것이 답인 것이며, 그것을 위해 전 사회가 지혜를 모아야 한다는 것! 이 책을 읽어야 할 이유다.

하지만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어 보인다. 자칫 좋은 노동을 실현하기 위해서 노동자의 자각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말하며 문제의 초점을 노동자 개인에게 맞추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실제로 게으르고 비주체적인 ‘루저loser’와 부지런하고 주체적인 ‘위너winner’라는 대립항을 전면화하면서 소위 자기계발 열풍이 불었고, 그 열풍은 다시 과도한 희망 고문으로 이어졌으며, 그 과정에서 청년세대들은 부지런히 성공을 추구하기 위해 영혼을 잃어버린 스펙 쌓기에 몰두하여 종국에는 88만원 세대로 전락하고 말았다. 또한 우리 사회는 아직도 일방적으로 일터를 잃은 노동자들이 거리의 천막 농성장과 크레인 그리고 철탑 위에서 “함께 살자!”고 외치고 있다. 대선이 끝나고 설레는 마음으로 새해의 떠오르는 태양을 맞아도 모자랄 때에 절망에 목숨을 버린 다섯 명의 노동자들을 보면서 진짜 ‘좋은 노동’이 실현된 날을 빨리 앞당기기 위해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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