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책 저런책] 당신에게 스승은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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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게 스승은 있습니까?

우치다 타츠루 씀, 박동섭 옮김 <스승은 있다> (민들레, 2012)


글 황선국/ sunguk.hwang@gmail.com



“스승은 있다”

 

단정적인 느낌을 주는 이 책의 제목으로 인해 나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내가 스승이라고 생각할만한 분이 과거 또는 현재, 아니면 미래에 있을까?”

 

이 책의 원제는 <선생님은 훌륭하다> 이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저자 우치다 타츠루는 서문에서 이상적인 스승이란 “나에게만 훌륭한 선생” 이라고 얘기한다.

 

훌륭한 선생 즉, 스승이란 이상적으로는 `이 세상에서 나에게만 훌륭한 선생`입니다. 그것은 격한 배움으로의 기동력을 가져옵니다. "이 선생님의 훌륭함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나뿐이야"하고 믿을 때만(착각이라도 좋습니다) 사람은 폭발적인 배움으로 나아가기 때문입니다.(11쪽)

 

우리가 만나왔던 스승이라고 부르는 분들은 대부분 정규 교육 과정을 거치며 강제로 맺어진, 다시 말해 내가 선택하지 않은 사제 관계로 맺어진 분들이다.
따지고 보면 그 분들은 절대 ‘나의’ 스승님이 아니었고 우리 반의, 우리 학년의, 우리 학교의 선생님들이었다. 여러 유형의 그 선생님 모두를 훌륭하다고 말하지 않았지만 몇 분 정도는(개인에 따라 아예 없을 수도 있을 테지만) “아 저분은 정말 훌륭하신 분이구나!” 라고 느낀 경험이 있었을 것이다.
그 분이 학식이 높았다거나 재미있는 얘기를 많이 해주었다거나 학생과 격 없이 소통했다든지 등등의 여러 가지 훌륭함의 기준이 있겠지만, 그 당시의 나 스스로가 느꼈었던 훌륭함의 기준이 있었던 것이다.

 

물론 나 스스로가 선택할 수 있는 선생님이라고 해서 ‘훌륭한 스승님’ 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지식과 기술만을 전달받기 위해 찾아가서 만난 학원 강사를 우리는 스승님이라고 부르지는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 책에서 얘기하는 중요한 지점은 바로 ‘오해’ 이다.

 

남녀가 연애할 때와 같은 감정, 소위 눈에 콩깍지가 씌었다는 표현에서 암시하는 그런 오해의 감정이야말로 훌륭한 스승을 만나게 한다는 어쩌면 조금은 황당한 원칙을 저자는 주장한다. 아니, 콩깍지가 씌어야 진정한 자신만의 스승을 만난다니!

 

이 서평을 읽는 분들은 오만하게 느끼실 수도 있겠지만, 나에게는 현재 “스승이 있다.”

 

어렸을 적부터 무술을 좋아하던 나는 이곳저곳 인터넷을 통해 무술을 배울 사람을 찾다가 5년 전 쯤 한 포털사이트에 개설된 카페를 통해 현재의 ‘스승님’을 만나게 되었는데, 몇 번 뵙고는 그 분이 풍기는 기운(?)에 매료되어 버렸다.


스승님이 물론 무술의 한길을 50년 이상 꾸준히 걸어오셨고, 관련 협회에 영향력이 있으신 분이지만 대중적인 인지도를 가지신 분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존재 자체, 언행 하나하나에 나도 모르게 압도되었다고나 할까?

 

이 책에서도 ‘수수께끼의 선생님’,  즉 경지 자체를 헤아릴 수 없는, 스승님의 한계조차 알 수 없는 미지의 존재로 스승을 표현하고 있다. 저자는 “신발 떨어뜨리는 사람” 이라는 제목으로 한나라 시대에 ‘태공망비전병법’을 전수해주겠다고 장량을 제자로 받아들인 황석공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황석공은 제자가 된 장량에게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았고 점점 초조해지는 장량에게 어느날 황석공이 말을 타고 오다가 신발을 떨어트린다.
“주워서 신겨!” 라는 명령에 장량은 화를 내며 신발을 신겼고 시간이 흐른 뒤 황석공은 말을 타고 오며 이번엔 양쪽 신발을 떨어트리고는 다시 주워서 신기라고 명령한다.
스승의 양쪽 신발을 신기는 그 순간, 장량은 모든 것을 깨닫고 스승의 “태공망비전 비법”을 깨우쳐 전수받게 되었다는 아주 어이없는 이야기인데, 저자는 이 황석공이 장량에게 ‘수수께끼’를 제공하는 스승이고 장량은 그 의미 없는 행동(?)을 스승이 주는 어떤 메시지로 ‘오해’하여 자신만의 스타일로 깨우쳐 버린다.

 

책의 후반부에 나온 이 일화에서 역설적으로 “배움의 주체성”을 저자는 강조하고 있다.

 

배우려고 하는 사람이 끊임없이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야만 배움을 터득할 수 있지 스승이 무언가를 해주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 실제로 황석공도 장량에게 가르친 게 없다.)
배우려는 자세도 갖추지 않고 객관적으로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는 사람만을 스승으로 삼으려고 한다면 진정한 사제 관계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부분을 지적하는 대목이다.

 

요즘 ‘학교가 붕괴하고 있다’, ‘학교 보내기 겁난다’는 표현을 신문지상에서 어렵지 않게 본다. 선생님은 선생님으로서의 권위가, 학생들은 학생으로서의 배우려는 의욕이 사라진 지 오래다. 그 속에서 선생도, 학생들도 모두 아프다. 왕따 등의 사회적 폭력이 판을 치고 있고, 견디다 못해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끊는 일도 눈에 띄게 증가하고 있다. “우리가 도대체 무엇을 길러 사회에 내보내는 건지 모르겠군”, “선생님은 진도만 빼시면 되요. 그 이상 뭘 하려고 하지 마세요.” 최근의 학교 관련 한 드라마에 나오는 대사들에 숨막혀하는 사람은 분명 나 혼자만은 아닐 것이다. 

 

오해도 소통에서 비롯된다. 아이들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그래서 진정한 스승을 만날 수 있게 되는, 그런 출발점인 소통의 기회마저 아이들에게 박탈한 것은 아닌 지 심각하게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무조건 한 줄로 줄 세우기를 강요하는 사회풍조 속에서 다양한 소통의 기회, 다양한 오해의 기회는 점점 희박해져 가고 있다. 저자는 다시 한 번 강조한다.

 

뭔가를 배운다는 것은 정액의 대가를 지불하면 그에 상응하는 상품이 나오는 자동판매기를 이용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진정한 사제 관계를 통해 배우는 것은 자신이 그 선생으로부터 무엇을 배우는가를, 사사(師事)받기 전에는 미처 말할 수 없는 무엇입니다.(145쪽)

 

당신에게 스승은 있는가? 늦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이 사회가 강요하는 획일화된 기준에서 벗어나 나에게만 훌륭한 수수께끼의 스승을 찾아나서는 게 어떨까? 분명 “스승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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