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책 저런책] 정치가 지향해야 할 목표는 과연 무엇인가?

카카오스토리

정치가 지향해야 할 목표는 과연 무엇인가?


글 김장환/ myth67@naver.com

 

최근 1천 만 관객을 훌쩍 넘긴 한 영화에서 변호사인 주인공이 법정에서 외쳤다는 말이 화제다. 그런데 그의 주장은 새롭거나 거창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너무나 당연해서 의외일 정도다. 바로 대한민국 헌법 제1조였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며,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한 국가가 국가로 서기 위해 국민이 합의한 제일의 원칙, 헌법 제1조. 그것을 되새겼을 뿐인데 영화를 관람한 모든 관객들의 심금을 울렸다는 사실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현실이 그만큼 부조리하다는 반증이 아닐까 싶다.


어쨌거나 헌법에 기반해서 보자면 국민 개개인에게 귀속된 주권과 행사할 수 있는 모든 권력의 근원이 바로 ‘국민’이기 때문에 그 권력을 위임받은 최고 정치 지도자는 우리 같은 장삼이사들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막중한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 그 상상도 할 수 없이 무겁고 막중한 책임, 그것이 그에게 쏠리는 대중의 지지 또는 비판의 근거이자 존경과 비하의 이유일 것이다.


그러면 최고 정치 지도자, 아니 정치인들은 어떤 때 지지를 받고 어떤 때 비판을 받는가? 어떤 정치인을 존경하고 반대로 어떤 정치인을 비하하는 것일까? 답은 생각 외로 간단하다. 선거의 승부처가 어디에 있는가를 살피면 그 답을 알 수 있다. 대체로 정치, 외교, 사회, 교육과 경제가 모두 중요하지만 결국에는 민생을 살릴 만한 이가 누구인가? 어떤 정치 세력이 민생을 책임질 수 있는가가 최종적인 선택을 결정하는 요소가 된다.


결국 정치 세력이 권력을 수임하기 위해서 민생만큼 중요한 요소는 찾을 수 없다. 하긴 공자도 “의식(衣食)이 족(足)해야 예의를 안다”라고 하였으니, 무릇 민생을 다스리지 않고서야 정치의 몫을 다했다고 할 수 없을 터. 그러니 국민이 먹고 살 수 있을 때에야 정치도, 외교도, 사회도, 교육과 경제도 미래를 기약할 수 있을 터이기 때문이다.

 

(역사비평사, 2013) _##]


 

이러한 인간사의 원리는 비단 오늘날에만 유의미한 것이 아닐 터, 역사는 그것을 확인하고 돌아보게 하는 유용한 거울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역사학자 이정철의 책 ≪언제나 민생을 염려하노니≫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주권이 ‘국민’이 아니라 ‘일 인 군주’에게 있고 ‘모든 권력’ 또한 ‘국민’이 아니라 ‘군주’로부터 나온다는 전제군주제 국가인 조선에서조차 정치의 지향점은 백성의 민생에 있었다는 것을 이 책은 명백히 보여준다.

 

“오늘날 우리가 최고의 사회적 공공선을 ‘민주주의’라고 부르듯이, 조선시대에는 그것을 ‘지치(至治)’라고 불렀다. 성리학의 이상이 지극하게 구현된 정치라는 말이다.”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건국 후 조선의 전반기에 추구했던 ‘지치’는 ‘사대부들이 정치적 주도권을 갖는 일’이었다. 조광조 이후 퇴계 이황에 이르기까지 조선의 사대부들이 계속되는 사화의 피바람을 무릅쓰면서까지 이루고자 한 것이 바로 사대부들에 의한 도학정치였다면, 사대부들의 신망을 받아 왕위에 오른 선조 이후에는 적어도 형식적인 면에서는 ‘지치’의 과제를 이루었다 할 수 있다. 하지만 한 시대의 과제가 해결되면 다음 과제가 떠오르기 마련이니, 그 과제를 저자는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그 과제란 사대부들이 획득한 권력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이 문제에 답을 한 사람이 이이였다. 이이는 민생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바로 그 지점에서 사회제도적 측면에서의 경세론이 조선시대에 탄생했다.”

 

이러한 문제제기는 율곡 당시의 정치 주도세력들에게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문제제기 후 조선이 겪게 된 혼란, 즉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인조반정,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등의 이어지는 내외의 환란으로 피폐해진 민생을 바로 돌보는 것이 무엇보다 절실한 정치적 과제였다. 이에 저자는 이 책에서 ‘경세(經世, Statecraft)’의 실천적 해법인 대동법의 구상과 정책화 과정에 참여한 네 명의 인물, 즉 이이, 이원익, 조익 그리고 김육의 이야기를 각각 실천적 지식인, 관료, 이론가, 정치가로서 다루고 있다.

네 편의 짧은 평전으로 구성된 이 책을 읽다보면, 경전 안의 문구에서 이상을 주워섬기는 것이 아니라 기득권을 버리고 ‘안민’이라는 대의의 실천을 위해 대동법을 구체화하는 이 네 경세가들의 노력이 사뭇 바른 정치의 자세를 가늠하게 한다.


먼저 “국가의 존재 이유가 일차적으로 민생을 보장하는 데 있다고 주장”한 이이는 임금은 물론 당대의 사림들에게조차 이해 받지 못하였지만, 후배 경세가들에게 정치적 좌표를 제시했다는 점에서 탁월했다.

이원익은 또한 선조에 의해 정승에 제수된 후 인조 대까지 약 40년 남짓한 세월 동안 정승의 막중한 임무를 맡았으나 “거처하는 집은 잡목으로 지은 두어 칸짜리 띠집”이고 “한 이랑의 농사지을 땅도 없고, 또 두어 사람의 노비도 없어서, 온 집안이 다만 매달 나라에서 주는 쌀로 겨우 목숨을 연장한다”고 할 만큼 청백리의 삶을 몸소 살면서 대동법이라는 제도가 정착되는 길목을 닦았다. 관료들의 치부가 흔한 시절에 이원익이 보여준 진정성은 당시는 물론 오늘날에도 관료의 삶의 푯대가 아닐까 싶다.


이어 저자는 조선시대를 통틀어 가장 혼란한 시기라 해도 과언이 아닌 17세기 전반의 혼란한 상황을 분석하여 문제의 원인을 찾고, 그것을 국가 운영의 원칙 위에서 풀어냈던 조익의 삶을 통해 이론과 현실을 조화하여 대동법의 설계도를 만든 학자 출신의 정치가의 면모를 조망하고 있다. 폴리페서들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잦아들지 않는 오늘날, 항상 공부하고 저술하면서 기회가 닿는 대로 관료로 활동하며 배운 바를 실천하는 일에 어긋남이 없었던 조익의 삶은 핵심적인 정책 디자이너 역할만큼이나 가치 있다고 하겠다.
마지막으로(또한) 대동법의 아버지라 할 만한 인물, 김육의 삶에서 정치인이라면 무릇 어떠해야 하는지를 살필 수 있다. 역사적 역할에 비해 가장 덜 조명된 이로 꼽히는 김육은 죽음을 한 달 앞둔 시점에 효종에게 올린 마지막 상소에서도, 그리고 죽기 하루 전 영의정에게 한 당부에서도 한결같이 호남에 대동법을 시행하는 데 힘써달라고 하였으니, 자신의 정치적 소신을 끝까지 관철하고자 하는 의지 앞에서는 숙연해지기까지 한다.

 

공허한 당위와 구호로서의 안민을 외치는 정치모리배들과 달리 구체적으로 민생을 살리는 방책을 취했던 경세가의 정치가 어떻게 다른지 이 책은 상세히 보여주고 있다. 수백 년 세월의 강이 흐른 뒤에도 바른 정치가 무엇인지에 대한 답은 다르지 않을 터이다. 결국 참다운 정치란 정치 세력이 자신들의 이해를 도모하는 것이 아니라 안민(安民)이라는 절체절명의 과제를 푸는 것이 목적인 정치가 아니겠는가! 전제군주의 나라인 조선에서도 그럴진대 하물며 민주공화국에서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오로지 나라의 근간인 국민들의 호구와 그들의 안위를 해결하는 것이 무엇보다 정치가 우선적으로 지향해야 할 바임에 틀림없다.

이들 네 명의 선인들에게서 오늘날의 정치가들이 배워야 할 지점은 분명하다. ‘공(公)’이라 말하지만 그 공이 과연 누구를 위한 공이며, 그것을 취하는 과정은 어떠해야 하는가! 새 정부 출범 일 년을 맞이하는 시점이다. 지난 일 년의 과정을 두고 현 정부의 공과를 평가하는 것은 성급한 일일 수도 있다. 다만 해결할 민생과제는 시간이 갈수록 심각해지는데, 아직 해결의 실마리를 현 정부는 물론 여야를 막론한 정치 세력들 모두에게서 찾기 어렵다는 점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그렇더라도 미리 가불해서 불안해 할 게 아니라 이 책에 나온 참다운 경세가들의 예를 통해서 바른 정치를 촉구하는 편이 옳을 듯하다. 일독을 권한다.

목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