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영화를 보며 생각하는 민주주의 - ‘변호인’의 송우석이 여전히 필요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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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인의 송우석이 여전히 필요한 이유

 

글 이명재/ promes65@gmail.com



돈밖에 몰랐던 한 세무 변호사가 군부정부의 탄압과 억압의 소용돌이를 겪으면서 국민을 대변하는 인권 변호사가 되어가는 이야기인 영화 변호인’. 노무현 대통령을 모델로 한 영화라고 해서 큰 화제가 되고 많은 관객을 모은 이 작품에서 주인공 송우석의 변신은 노 대통령이 남겼던 말을 떠올리게 한다.

 

깨어 있는 시민의 힘이 민주주의의 보루다.”

 

대전에서 부산으로 내려온 고졸 출신 세무 변호사 송우석이 처음에는 연줄도 학벌도 없이 악착같이 돈을 모으며 살다가 주변 사람의 억울한 일에 대해 분노하면서 인권변호사로 거듭나는 모습은 평범한 사람인이 한 사람의 깨어 있는 시민이 되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사실 영화 속 송우석이 대단한 영웅인 것은 아니다. 다만 그는 이웃이 부당한 일을 당하는 것에 대해 외면하지 않고, 공분을 느끼면서 자신이 갖고 있는 지식(법률 지식)과 능력으로 할 수 있는 바를 하려고 용기를 냈을 뿐이다. 그렇게 본다면 이 영화는 노무현 대통령을 추억하게 하는 영화이면서 또한 우리 자신에게 대한민국 사회에서 시민 노릇을 한다는 것은 어떤 것인지에 대해 일깨워주는 영화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시민이 된다는 것, ‘시민 의식을 갖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시민이 무엇인지, 시민의식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많은 이론과 견해가 있을 수 있겠지만 이를 좀 쉽게 풀어보자면 중산층의 기준으로도 얘기할 수 있을 듯하다.

 

예컨대 몇 몇 나라들에서 통용되는 중산층의 기준을 보면 그것이 바로 시민의 덕목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프랑스의 중산층 기준은 `공분` 에 의연히 참여하고 약자를 도울 것을 요구하고 있다. 영국의 중산층 기준은 `페어플레이, 약자를 두둔하고 불의에 의연히 대처할 것`을 꼽고 있다. 미국의 공립학교에서는 중산층이 되려면 `사회적인 약자를 도우며, 부정과 불법에 저항하라`고 가르친다.

 

"건전한 중산층이 건강한 민주주의를 낳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 점에서 이들 나라의 중산층에 대한 기준은 우리 사회에 시사해주는 바가 많다. 그것은 한국 사회의 중산층 기준이 경제적인 측면으로만 이뤄져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한국의 직장인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 직장인들이 내린 중산층의 정의는 `부채 없는 아파트 30평 이상 소유, 월 급여 500만원 이상, 중형차 소유 등`이었다. 자신이 사는 사회에 대해 어떤 책임이나 공동체 의식을 가져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더라도 자산과 소득만 많으면 중산층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 사회의 많은 구성원들이 이런 중산층이 되는 것을 목표로 살아간다면 그 사회는 우리나라 헌법이 제1조에서 얘기한 민주공화국과는 거리가 멀어지게 된다. 공화국은 더불어 산다는 것, 함께() 화합하는()’ 나라여야 하기 때문이다. 공화라는 말의 반대편에 아마 사생활을 뜻하는 프라이버시라는 말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프라이버시는 라틴어로 결핍을 뜻한다고 한다. 인간은 사회적으로 존재할 때 진짜 인간이 된다는 의미일 텐데 그리스·로마의 공화주의 가치관이 투영된 말이다.

 

그렇게 본다면 원자화되고 파편화된 삶을 살고 있는 현대인들은 그리스 로마의 민주주의 정신에 비춰본다면 불완전한 인간이기 쉽다. 우리 사회의 중산층에 대한 인식이나 기준도 그런 점에서 생각해 볼 문제인 것이다.

 

일본 사회에서 최근 벌어지고 있는 군국주의나 극우 정치인들의 망언도 이 시민의식이라는 측면에서 살펴볼 만한 대목이다. 일본 시민들의 시민의식을 엿볼 수 있는 영화로 몇 년 전 개봉된 쉘 위 댄스’ ‘행복한 가족계획이란 작품들을 들 수 있다. 얼핏 이 영화들은 유쾌하고 흐뭇한 웃음을 자아내는 영화로 비친다. 그러나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답답하고 영화 속 일본인들이 안스러워 보였다. 이 영화들은 일과 가족에 치여 고단한 일상을 사는 40대 가장이 사교춤, 혹은 방송국 경품 프로그램에 도전을 통해 삶의 의욕을 되찾는다는 내용이다. 영화 속의 등장인물들은 일본 중산층, 평범한 일본인들의 삶과 의식을 보여준다. 그런데 내가 답답했던 것은 40대 중년인 주인공들을 비롯해 등장인물들의 말이나 행동이 마치 초등학생처럼 말이나 사고방식이 매우 미숙하다는 것이었다.

 

회사에선 회사 상사의 지시에 늘 허리를 굽히고 댄스교습소에선 젊은 춤선생의 지시에 허리를 90도로 꺾으며 순응한다. 나는 이런 순종적인 시민들의 모습이 최근 일본 총리 등 정치인들의 망언이나 극우 정치인들이 자꾸 의원에 당선되는 것의 배경이라고 본다. 즉 망언이 잇따라도 높은 인기를 얻는다는 것이며 극우파적 시각, 역사왜곡이 대중들에 의해 별로 견제를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일본 시민사회의 취약성인 것이다. 서구 사회가 걸어온 길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어떤 사회의 부조리와 불합리를 경계하고 비판하는 건 건전하고 탄탄한 시민사회다. 그러나 일본에는 이런 시민사회의 형성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이는 2차대전에서 같은 패전국이었지만 과거사에 대해 전혀 다른 태도를 보였던 독일과 일본을 비교해보면 그 차이점이 확연해진다. 두 나라는 같은 패전국이지만 과거 청산이나 역사 인식에서는 정반대의 길을 걸어 왔다. 독일은 스킨헤드족이 출현해 외국인에 대한 혐오감을 부추기는 등 신나치즘이 나타날 조짐을 보이고는 있지만 최소한 정부 당국자의 입에서 히틀러를 찬양하는 말이 나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신나치주의자를 바라보는 시민사회의 시선도 매우 냉담하다.

 

이렇게 두 나라가 대조적인 모습을 이루게 된 이유는 한두 가지가 아니겠지만 단순화해보면 건전한 시민사회의 존재 여부다. 독일은 견실하고 탄탄한 시민사회가 형성돼 있는 반면 일본은 그렇지 못한 탓이 크다는 것이다. 독일에선 건전한 시민사회가 있어 시대착오적 기류가 주류화 되는 것을 막고 있다.

 

그러나 일본은 그 같은 시민사회 발전의 기회를 갖지 못했다. 메이지 유신을 거치며 일시적으로 시민사회가 분출할 기회가 있었지만 이내 강력한 국가주의에 의해 제압당하면서 일본 시민사회는 꽃을 피우지 못하고 말았다. 그 결과가 바로 영화 쉘 위 댄스속의 초라한 소시민들인 것이다. 일본이야말로 경제적 중산층은 많을지 모르나 건강한 시민계급은 미형성됐던 것이다.

 

진정한 시민, 그 사회가 잘못된 길로 나갈 때 그에 대해 `(no)`라고 할 수 있는 시민. 그런 시민이 우리 헌법 제1조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할 때의 그 국민일 것이다. 우리의 지난 역사에서 50~80년대의 어두웠던 시절은 바로 국민이 시민이 되지 못했던 때, 그래서 국민이 주인이 되지 못했던 때였다. 그것은 무엇보다 독재정권에 의해서 국민으로부터 시민을 박탈당했기 때문이었다. 즉 외부로부터의 강압에 의해 시민이 되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국민 스스로가 시민이 되려는 노력과 의지와 각성이 부족했던 것이기도 했다.

 

이제 우리 사회가 정치적으로는 최소한의 민주화를 이룬 지금, 그렇다면 우리 국민들은 얼마나 시민이 된 것일까. 정치적 민주화에 대한 많은 우려와 지적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누리고 있는 정치적 자유를 생각하면 그렇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민주공화국목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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