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속 시대 읽기

고성 산불, 그 뒤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날씨는 흘미죽죽(일을 여무지게 끝내지 못하고 흐리멍덩하게 끝내는 모양) 비라도 한 줄금 쏟아낼 듯하였다. 눈도 아니고 그렇다고 비도 아닌 것이 마치 저녁 굶은 시어미 얼굴처럼 흐렸다. 강원도 고성 삼포를 찾아가는 길은 그리하여 더디기도 하고, 빠르기도 했다. 어느 해 이른 봄 나는 짝짓기를 하는 개구리들 곁에서 어린 잣나무들을 줄 맞춰 심었다. 미친바람이 불어댔고, 이르게 핀 연분홍 진달래꽃은 새파랗게 얼어붙었다. 어느 날은 인정사정없이 불어대는 미친바람 때문에 작업을 중도 포기하고 가까운 바위틈이나 개자리 같은 곳에 찾아들어 도망자처럼 웅크려 고개 숙이고 있어야 했다. 얼굴을 할퀴며 지나치는 바람을 더는 견딜 수 없었던 까닭이었다. 골짜기 응달에는 잔설이 깊어서 발이 허벅지까지 푹푹 빠지기도 했다.

 

나무를 심다
지난 1996년 강원도 고성 삼포 일대 3천 700헥타아르에 이르는 산이 잿더미가 되었다. 불탄 자리는 까맣게 짚불에 그을린 개처럼 참혹했다. 산불이 지나간 다음에 취하는 일은 먼저 불에 타고남은 나무의 그루터기를 잘라내고 정리하는 일이었다. 그런 다음 그 빈자리에 줄을 맞춰 어린 묘목들을 심는다. 나는 그런 곳에다 어린 잣나무와 어린 자작나무 그리고 어린 갈참나무와 때로는 북미 원산의 어린 튤립나무를 심기도 했다. 튤립나무는 속성수로 다 자라면 십 미터가 넘는다. 이런 나무를 산 중턱에다 심는 이유를 나는 알 수가 없었다.
한국에서는 주로 중부 이남에서 관상수로 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린 나무심기와 천연림조성사업 중 솎아베기, 예초기 작업, 솔씨 심기 등은 산림조합에서 주관하고 품삯을 준다.


나무를 심기 위해 구덩이를 파면 한국전쟁 때 사용한 포탄 파편들이 드러나기도 하고, 불에 타 죽은 노루나 토끼 사체들의 하얗게 육탈한 뼈들과 마주치기도 했다. 도로변에는 수년 씩 자란 키 큰 나무들을 받침목을 받쳐서 심기도 했으며 어느 때는 비무장지대에서 넘어온 산불로 화마가 덮친 민통선 안 명파리에서 금강산 연봉을 바라보며 작업을 하기도 했다. 그때 우리는 쉴 참에 사람 손을 타지 않은 그곳에서 더덕이며 도라지를 캐느라고 희희낙락했다. 연분홍 처녀치마와 솜털로 두툼하게 감싸인 솜다리를 처음 만나기도 했다. 바다 직박구리는 해안가 절벽을 떠나지 않고 우리들의 작업을 지켜보았다.


하루 일당 3만원(내가 처음 나무를 심던 2001년 당시에는 하루 일당 2만 8천원으로 점심 제공 없이 오전 오후 새참으로 300원짜리 빵 2개, 그리고 음료수 2개를 주었다. 2006년 현재는 2천원 오른 3만원으로, 역시 점심 제공 없이 새참의 내용은 같다.)의 날품 일꾼의 눈으로 봐도 단일 수종을 식재하는 일은 숲의 다양성을 왜곡하는 일이며, 또한 새로 움터 나오는 나무들의 자연스러운 성장을 방해하는 일임을 한눈에도 알 수 있다. 나무를 심은 다음 해에는 반드시 예초기로 줄을 맞춰 심은 묘목 외에 그 모든 잡목들을 베어 없애기 때문이다.


삼포 일대는 금강 소나무의 군락지였다. 그런 까닭에 소나무들이 타서 죽고 없는 자리에 그 자리를 노리고 있던 넓은잎나무, 다시 말하면 활엽수인 갈참, 졸참나무들이 승승장구 기세 좋게 자라나지만 일이 년을 넘지 못하고 목을 베이고 만다. 소나무는 살아도 되고, 참나무는 죽어야 하는 까닭이 내겐 요령부득일 뿐이었다. 군말이지만 맑고 투명한 가을 햇살이 사선으로 꽂히는 금강송 솔숲의 그 육감적이고 관능적인 빛깔을 나는 무진 애착한다.

로지폴 소나무나 자이언트 세쿼이어는 구과(잣송이나 솔방울 등의 열매)를 무려 50년 동안이나 닫고 있을 수 있다. 이들이 구과의 비닐껍질을 열고 씨앗을 내보내려면 온도가 섭씨 50~60도까지 올라가야 하는데 이만한 온도가 되려면 산불이 나야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참지 못하고, 기다리지 못하는 것은 인간뿐이다. 숲은 안중에도 없는 자본 중심의, 그것도 당장 눈앞의 이익에 급급한 청맹과니 같은 인간이 만들어낸 경제논리만이 숲을 지배하고 있는 까닭이다.


1986년 비무장지대에서 넘어온 산불이 고성군 거진읍 일대를 휩쓸고 간 뒤에 잣나무 일색으로 조성한 숲을 보면 단박에 알 수 있다. 숲 아래에는 아무 것도 자라지 않는다. 다람쥐나 청설모가 까먹고 버린 구과들만 간혹 발길에 채일 뿐이다. 또한 고개를 제대로 들고 다닐 수 없이 빽빽하게 조림을 하여 햇살이 들어올 틈조차 없다. 잘 자란 숲에 들어서면 먼저 인간이 편안하다. 그러나 잣나무 일색으로 인공 조림한 숲에 들어가면 잘 들어갈 수도 없지만, 날카롭고 답답한 공기로 하여 절로 숨이 막힌다. 조림 후 관리 부실이 한 원인이기도 하다.

산불이 지나간 자리에 골프장이 들어서다
2004년 봄, 함께 나무를 심었던 이웃 아주머니를 솔씨 모종을 하는 자리에서 다시 만났다. 겨우내 무얼 하시며 지냈느냐고 여쭸더니 멋쩍게 웃으시며 “나 떼(뿌리 째 떠낸 잔디) 입히는 일 했어.” 하신다. “떼요?” “삼포에 골프장 들어온다고 하잖아. 거기서 일했어. 한겨울에 하루 2만 4천원 받고. 점심은 그만두고 새참도 안 줬어. 글쎄. 돈을 너무 적게 줘서 그러는지 사람을 너무 없수이 여기드라고. 그런 일은 하지 말아야 해.” 그러면서 고개를 돌리신다. 그 소리를 듣는 내 목울대가 너무 아팠다.


수년 째 거진항에 빈 배로 들어오는 고깃배가 늘어나면서 이곳 거진읍 일대 농어촌에는 겨울이면 일거리가 더욱 없다. 그런 까닭에 하루 150여 명 내외의 떼 입히는 일꾼들을 쓰는 일에 시공사 측에서는 읍사무소를 통해 상황 파악을 한 다음 노파들을 마구잡이로 모집을 하였고, 그런 다음 늙고 힘없는 노인들은 가지를 쳐 내듯 쳐냈다. 현금을 만져볼 수 없는 촌로들이 너나없이 몰려들었다. 인원은 정해졌고, 사람은 너무 많았다. 안면이나 지연이 먼저였다. 적이 외부에 있음을 모르는 체 내부에서 적을 만들었다. 안목이 좁고 목구멍이 포도청인 까닭이었다.


산불이 지나가자 기다렸다는 듯이 자본들이 몰려들었다. 일명 위락시설 조성계획이었다. 그리하여 불타고 난 자리 삼포 일대 148만 5,712제곱센티미터에 달하는 땅에 골프장을 건설했다. 27홀 규모의 골프장으로 대중제가 아닌 회원제로 지난해 6월 개장했다.

 

 

콘도는 2월 현재 3차 분양 중에 있다. 1차 분양 때보다 2천만 원이 넘게 올랐다. 문제는 강원도는 도 면적의 80%이상이 임야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또한 강원도에는 현재 운영 중인 골프장이 20개, 건설중인 골프장이 12개, 건설예정에 있는 골프장이 2개로 모두 34개의 골프장이 있다. 면적은 대략 760만여 평으로 여의도 면적의 3배에 달하는 숲이 골프장으로 인해 사라지고 없는 것이다.

 

산림 훼손을 통한 골프장 건설
한국에서 골프장 건설은 이미 대규모 산림 훼손을 전제로 할 수밖에 없다. 골프의 역사를 보면 초원 지대인 스코트랜드에서 자연 발생하였다. 그러나 국토의 70%가 산야인 한국에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생태계 파괴가 기본일 수밖에 없다. 더욱 심각한 것은 골프장의 잔디 관리를 위해 사용하는 살충제, 제초제 등의 농약 과다 사용으로 인한 수질 오염 그리고 여기에 대규모 지하수 사용으로 인한 지하수의 고갈은 불을 보듯 훤하다. 이로 인한 궁극의 문제는 지역 공동체 파괴로 이어진다는 것에 있다.


기원은 은폐되고 풍경만 남듯이, 스코트랜드 목동들의 놀이가 오늘날 현대 자본가들의 스포츠가 된 것은 참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우리들이 나무를 심었던 곳은 골프장과의 경계가 불분명한 곳이었다. 쉴 참이면 어른들은 낮은 산봉우리 바위틈에 삼삼오오 몰려 앉아 건설 중인 골프장을 둘러보면서 못내 깊은 한숨을 내쉬곤 했다. 우리들이 심는 나무가 산을, 숲을 마침내 우리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결국은 어느 특정한 부자들만을 위한 눈요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숨길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들이 나무를 심으면서 쉬었던 너럭바위들은 이제 콘도와 골프장 사이를 잇는 등산로의 쉼터가 되어 있었다. 무슨 일이든 어느 특정 집단의 이익만을 취하고자할 때 그것은 어긋나거나 비틀릴 수밖에 없게 마련이다. 과연 그 어긋나고 비틀린 일을 바르게 펴야 하는 일은 누구의 몫일까. 스스로 등신불이 되어 가고 있는, 목숨을 내놓으며 온몸으로 절규하는 어느 비구니의 사태를 막지 못하는 이 시대의 우리들은 시나브로 그런 이를 두었다는 자랑과 더불어서 마침내 뼈아픈 자책과 함께 통곡만을 준비해야 하는 극점에 다다르고 말았다.




글 김 담
강원도 고성 출생
1991년 임수경통일문학상 소설부문 우수상 수상 작품집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현재 강원도 고성에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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