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속 시대 읽기

그들과 함께, 소수자들을 위한 문화제를 경험하다.

어스름새벽 숲길은 나뭇잎 위로 떨어지며 흩어지는 비꽃의 소리로 한층 적요했다. 간밤에 내리던 비가 긋고 구름이 벗개면서 먼데 새벽하늘이 열리고 있었으며, 왜바람 속의 나뭇잎들은 사뭇 거칠게 빗방울을 떨쳐내고 있었다. 한물 피해가 채 아물기도 전인지라 또 다른 태풍의 북상소식은 한걱정이었다. 대관령을 넘어 속리산까지, 차창 밖으로 내다뵈는 한물 피해의 흔적이 아직도 고스란했던 까닭이었으며 또한 한나절 남짓, 즉 7~8시간 정도의 산행을 계획하고 있었던 때문이었다.


속리산 ‘오리숲’은 깊고 먼 숲속처럼 큰 키의 넓은잎나무들로 울울창창하였다. 사하촌 여관에서부터 법주사에 이르는 숲길의 대지와 수풀의 기운을 나 홀로 독점하며 걸을 수 있었다. 태풍 소식과 함께 간밤에 내린 웃비 때문이었을 것이었다. 멧비둘기 울음소리가 간간히 우물 속 같은 정적을 흩어놓았으며 비꽃의 두드림은 오래 손때 묻은 북소리처럼 드맑으면서도 깊었다. 봄날의 연등이 여태도 붉고 푸르게 등을 밝히고 있는 숲길은 소슬한 가을바람이 차마 안타까울 것도 같았다.


구름이 벗개고 맑게 드러난 하늘에 새벽 하현달이 나무들 우듬지 사이로 선명했다. 세심정에서 세조 임금이 사흘기도를 했다던 북천암 쪽으로 길을 잡았다. 지르되게 핀 산꿩의다리, 단풍취가 눈에 띄었으며 삿갓나물은 씨앗으로 여물고 있었고 어쩌다 붉은 이삭여뀌와 노오란 산괴불주머니가 눈길을 잡아챘다. 한국 특산의 자주꿩의다리를 만난 것은 유별했다. 남자 둘이 짝을 이뤄 앞서거니 뒤서거니 가는데, 이른 새벽 숲에서 듣는 목청 큰 경상도 사투리는 시끄럽기가 이를 데 없다. 소삽한 바람 속에 숨어드는 고요의 그늘을 탐하려는 내겐 다시없을 훼방꾼들이었다. 사진을 찍으면서 아무리 시간을 늦잡아도 그들의 걸음은 더뎠고, 문장대를 지나 신선대까지 그렇게 길을 갔다.

 

 


 

벼랑처럼 까마득히 높은 츠렁바위에 피어있는 하얀 구절초를 본 것은 참나무 그루터기에 핀 ‘콩나물애기주름버섯’을 들여다보다 들어 올린 시선 끝이었다. 가을꽃의 으뜸으로는 깊은 숲속 절벽 같은 바위에 핀 구절초만한 것이 없다는 평소의 버릇에 더하여 환하고 저릿한, 애상스런 어떤 전율이 가슴 한가운데를 뚫고 지나갔다. 공허한 듯 그득한 듯, 어떤 멀미 같은 후유증을 발끝으로 가만히 즈려밟으면서 호흡을 조절했다. 산마루로 향할수록 바람씨는 한껏 사나워졌으며, 그 바람결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꽃들의 위태로움은 마치 삶의 허방처럼 안타까웠다.


오색딱따구리가 죽은 나무의 줄기를 탁, 탁 일정하게 쪼아대고 있었으며 그 아래 수풀에서는 박새 무리가 들까불듯 날아다니고 있었다. 어느 해 한겨울 눈얼음 속의 속리산 산행 길에 안거 중 포행에 나선 스님들과 동행하게 되었다. 마을로 돌아오는 길에 휴게소에 들른 스님들이 라면을 사주셨고, 그 답례로 노래를 불러 드렸다. 어떤 노래를 채 마치기도 전에 노스님 한 분께서 눈가를 훔치는 것을 엿보게 되었다. 십 수 년 저쪽의 일이었다. 노스님 여태도 안녕하신가. 아직도 그때, 그 노스님을 떠올리면 가슴이 울컥, 먹먹했다. 어떻게 걸어가야 흔들림 없이 삶의 마지막을 정온하게 맞이할 수 있을 것인가.

 

 


 

  산에서 만나는 사람들

통신 중계탑과 안테나로 어지러운 ‘문장대’는 방향을 알 수 없는 왜바람 속에 놓여 있었다. 수다쟁이 남자 둘과 앞서 걸어간 남녀와 또 홀로 산행에 나선 남자가 기념사진을 찍고, 찍어주고 있었다.

 

산마루의 왜바람도 왜바람이었지만, 하얀 구절초와 보랏빛 쑥부쟁이 그리고 자줏빛 산오이풀로 환한 너럭바위 주변으로 눈길이 먼저 쏠렸다. 우려와는 달리 문장대에서 둘러본 경상도, 충청도의 산등성이들은 검은 구름타래 없이 대체로 평안했다.  

 


손이 곱을 지경으로 바람살은 매웠고, 먼데 풍경을 찍으며 서 있을 수도 없게 드세고 앙칼졌다. 철책의 난간을 잡고서 더듬더듬 오리걸음으로 문장대를 벗어났다. 오금이 후들대는 아슬아슬한 위태로움은 한편 어떤 즐거움이었다.


문장대 아래 휴게소에서 국수를 한 그릇 먹을까 하던 생각을 접었다. 소백산과 달리 속리산은 산길 옆에 휴게소가 흔하였으며 또한 산속에서 무언가를 끓여먹으면 쓰레기는 반드시 나오게 마련이었고, 그런 이유로 배낭 속에 든 마른 비상식량으로 허기를 달래기로 했다. 등성이길로 접어들자 오르락내리락의 연속이었다. 엄장한 바위들이 길을 가로막기도 하고, 한편 길을 열기도 했다. 백두대간의 등성이 길이었다.
신선대 휴게소에 다다라 ‘당귀차’를 한잔 마시는데 등 뒤에서 후루룩 쩝쩝, 비설거지라도 하는 듯한 소리가 들려와 뒤돌아보니 김치통 만한 도시락을 꺼내놓고 그 남자가 밥을 먹고 있었다. 휴게소에는 ‘진순이’라는 어미 진돗개가 있었고, 강아지들 서너 마리가 졸졸졸 몰려다니고 있었다. 앉아서 다리쉼을 하려던 계획을 접고 일어섰다. 잔을 돌려주고 미처 서너 걸음을 떼기도 전이었다. “야, 너 줄게 어딨니?”하는 남자의 삿된 목소리가 걸음을 잡아당겼다. 산에 들면 ‘고수레’도 하는데, 어미 개에게 밥 한술 나눠주었더라면.


신선대에서 비로산장에 이르는 길은 사뭇 가파른 계단과 계단의 연속이었다. 한 쌍의 여자와 남자가 묵묵히 계단을 걸어 올라오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서로 인사를 나누는 사이, 가파른 길로 오르는 까닭이 쉬운 길로 내려오기 위해서라고 여자는 말했다. 오래 귓가에 남았다. 매번 나는 쉽게 오르는 길을 찾았고, 그런 까닭에 번번이 어렵게 내려와야 했다. 오르막길보다 내리막길에 자신감이 있었어도 어려운 길은 마찬가지로 힘들었다.

 

 

 

 

정이품송 혹은 세조

속리산을 생각하면 ‘정이품송(正二品松)’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무슨 까닭인지 속리산에는 무예와 병서에 능했다던 조선 왕 세조와 얽힌 사연이 많다. 속리산 문장대의 이름이 ‘운장대’에서 ‘문장대’로 바뀐 것부터가 그러했고, 단연 으뜸은 아마도 공원 어귀에 있는 정이품송일 것이다. 임금이 타고 있던 연, 즉 가마가 나뭇가지에 걸릴까봐 스스로 나뭇가지를 들어 올려 임금의 연이 무사히 지나가게 하였고, 그런 까닭으로 정이품 이라는 품계를 받았다는 이야기.


그런데 국민대학교 전영우 교수에 따르면 세세히 기록하기로 유명한 『조선왕조실록』에는 이와 같은 기록이 전무하다는 것이다. 나무에 벼슬을 내리는 일이 흔한 일도 아니었을 것이고, 더구나 정이품이라면 오늘날 장관급에 해당하는 고위직 벼슬이었을 텐데, 무슨 까닭으로 역사책에는 한 줄의 기록도 남기지 않았던 것일까. 조선은 개국과 더불어 강력한 산림보호정책을 실시하며 봉산제도를 만들었고, 소나무를 벤 자는 곤장과 유배로 다스렸다. 그렇더라도 국가 독점물인 소나무에 벼슬을 내리면서까지 누가, 무엇 때문에 그런 상징물을 만들어냈던 것일까.


또한 강원 오대산에서 치병했다던 세조는 어떻게 다시 이곳 충북 속리산에서도 병을 치료하게 된 것일까. 병이 도진 것일까. 오대산이든 속리산이든 그 전후는 알 길 없으나, 숭유억불정책(崇儒抑佛政策)이 기조였던 조선의 임금이 그토록 자주 치병을 위해 사찰을 찾게 된 경위와 속내는 또 어떤 것이었을까.


조선의 7대 왕 세조는 이를테면 쿠데타로 왕위를 찬탈한 임금이었다. 세조는 칼로써 임금인 어린 조카와 형제와 수많은 적대 세력들의 인명을 살상하면서 왕좌에 올랐다. 재위기간의 치세를 인정한다고 해도 왕위 등극의 피비린내 나는 기원을 은폐할 수는 없었을 것이었다. 법주사 경내 한켠에 있는 마애여래는 그때 세조를 바라보면서 어떤 상념에 잠겼을까.


쿠데타 세력들이 정권을 찬탈하면 가장 먼저 자신들에게 없는 정통성을 미화하고 정권찬탈을 합리화하는 것과 마찬가지 아니었을까. 이를테면 깊은 숲속의 부처님도, 말 못하는 짐승도, 무심히 흘러가는 계곡물조차 임금의 안위를 걱정하는 게 세속의 도리라는. 즉, 비루한 삶일지라도 임금의 은혜에 힘입은 바 크니 백성된 어린 자들, 기원 따위야 어찌 되었든 임금을 믿고 따르라는 이야기를 만들어 짓고 유언비어인 듯 널리 퍼뜨렸던 것은 아니었을까. 자연이든 종교든 하물며 미물이든 정권 홍보에 가치 있는 것들이라면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동원하여 백성된 자들을 현혹시켰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렇게 왕권 강화의 초석을 다지는 한편 어린 백성을 다스리는 방편으로 이용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세심정에 다다랐을 때, 텅 비었던 숲길은 사람들로 인하여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세속이 산을 떠나보낸 것이 아니라 속리(俗離), 그곳이 다름 아닌 세속이었다.


 

사진 황석선

김 담
강원도 고성 출생
1991년 임수경통일문학상 소설부문 우수상 수상 작품집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현재 강원도 고성에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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