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속 시대 읽기

남고괴담(男高怪談)

음모, 반역, 작당, 배신, 밀고, 투옥, 욕설과 괴담 뒤의 충격적인 결말……. 그리고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마지막 반전, 30여 년 전 서울 시내 한 사립 남자고등학교에서 일어난 괴이한 사건이다.
유신체제가 정점을 향해 치닫던 1974년, 이 학교에 두 가지 이변이 일어난다. 그 하나는 만년 이류에서 벗어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 즉 ‘뺑뺑이 1세대’를 맞이한 것이다. 고교입시제도 하에서는 감히 유치하지 못할 우수 인재를 대거 확보한 학교 당국은 꿈에 부풀었다. 재단 이사장은 의욕에 넘쳤고 학교장은 투지에 불탔다.
사건의 단초는 여기서 싹텄다. 교사들의 ‘의욕치’가 높아질수록 죽어나는 것은 학생들이었다. 교정은 서서히 입시지옥으로 변했고, 학생들은 ‘점수 따는 기계’로 전락해갔다. 이때 세상 물정 모르는 사춘기 소년들의 선택은 두 가지. 순순히 시험의 노예가 되거나 ‘이유 없는’ 반항을 하거나…….


두 번째 이변은 이 거대한 청춘의 지옥에 혜성처럼 나타난 ‘영웅’과 관련된 것이었다. 새로 부임한 국어 교사. 학생들은 그가 교실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결코 평범한 선생님이 아니라는 것을…….
검정 두루마기 차림으로 나타난 그는 수려한 용모와 당당한 체구, 야성적인 장발, 강인한 구레나룻의 겉모습만으로도 범상치 않은 인물로 보였다. 장비를 닮은 듯하면서 관우를 떠올리게 했고, 둘을 합쳐놓은 것 같기도 했다. 학생들은 수군거렸다. 아니다, 청산리 대첩에 빛나는 김좌진 장군이라면 저리 생겼을 것이다!


과연 영웅의 풍모에 걸맞게 그는 첫 수업부터 학생들을 감복시켰다. 칠판에 커다랗게 이진(李眞)이라고 이름을 한자로 쓰고는 밑에다 민중(民衆)·역사(歷史)·진리(眞理)라고 휘갈겼다.
학생들은 숨을 죽였다. 세상에, 민중이라니……. 결코 입에 올려서는 안 될 것 같은 말을 거침없이 쓰다니! 게다가 폼 나는 몸짓으로 프랑스 혁명을 말하고, 교과서에 기술된 동학란을 ‘동학혁명’으로 부르는 저 용기와 신념은……. 그는 소심한 공부벌레들의 마음을 단박에 사로잡았다.


다른 선생님들처럼 치사하게 대학 따위에 목숨을 걸라고 말하는 법은 당연히 없었다. 그보다는 눈을 뜨라고 했다. 사회에 대해, 역사에 대해, 그리고 민주주의에 대해……. 학생들은 그를 통해 교과서에서는 배울 수 없는 중요한 가치를 하나씩 깨닫기 시작했다. 생각의 지평이 활짝 열렸고, 그것은 나날이 새로웠다.
단지 그가 학생들에게 지적 충격과 쾌감을 안겨주는 데 그쳤다면 그에 대한 ‘영웅’ 칭호는 과분한 것이었을지 모른다. 그는 여기에 안주하지 않았다. 미래의 혁명 전사들을 키우기 위해 교단에 침투(?)한 그로서는 제자들의 눈을 뜨게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다음 단계는 행동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음모는 순조롭게 진행됐다. 행동은 생각을 더욱 공고히 하게 마련이다. 학생들을 모아 연극을 준비했다. 이런 일을 신념과 용기만으로 추진했다면 그는 영웅으로서 ‘2%가 부족’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영웅의 내면에는 예술적 소양까지 숨어 있었다. 그가 지도한 학생연극 ‘불꽃’은 그해 가을 전국 연극경연대회에서 상이란 상은 모조리 휩쓰는 기염을 토했다.
그 여세를 몰아 영웅은 자신의 뜻에 동조하는 동료 교사들과 제자들을 규합해 극단을 조직했다. 당연히 번역극이나 연애극 중심의 기성 연극계 흐름을 따를 그가 아니었다. 그가 올린 연극은 하나 같이 상황극이나 시대극이었다.


이렇게 되자 연극대회를 석권할 때만 해도 호의적이던 학교당국이 그를 견제하기 시작했다. 그에 대한 험담과 루머가 나돌았다. 급기야 내부의 밀고가 있었다. 형사가 찾아왔다. 다행히 이진이라는 이름이 블랙리스트에 없어 더 이상 사태 악화는 없었지만 그는 학교에 시말서를 썼다. 제자들은 비분강개하며 배신자를 색출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역시 영웅답게 처신했다. 배신자를 찾는 노력을 더 이상 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 학생들은 영웅의 대범한 지도력에 또 한번 감복했다.
그의 극단은 연극사 뿐 아니라 우리 현대사에도 길이 남을 ‘혁명적’인 작품들을 무대에 올렸다. 창단 공연작의 주제가는 그 뒤 대학가와 민주화 투쟁의 현장에서 저항가요로 애창됐다. 하지만 그가 역사의 한 장을 장식하고 제자들에게 메가톤급 충격을 준 것은 다른 데 있었다. 그가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되면서였다.


제자들은 그가 구속된 이유를 몰랐다. 다만 이진이라는 이름은 그의 실명이 아니고, 교원 자격증이 없는 가짜 교사라는 소문만 나돌았다. 대학을 졸업한 것도 아니며, 명문대 대학원을 나온 것도 그의 친구이지 그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저 평범한 대학 경제학과 1학년 중퇴자가 친구의 학력과 자격증을 빌어 학생을 가르친 사기꾼이라는 등의 괴담이 학생들의 입에서 입으로 순식간에 퍼졌다.
제자들의 충격은 영웅을 빼앗긴 것이 아니라 사기당한 데 있었다. 제자들은 어떤 비극과 시련, 심지어 죽음까지도 이길 수 있는 용기를 영웅으로부터 배웠다. 그런 것은 충분히 극복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건 그런 문제가 아니었다. 그 자체가 사기가 돼버렸기 때문이다. 무슨 까닭인지 수사기관도 학교당국도 영웅, 아니 사기꾼의 사기행위에 대해서는 쉬쉬했다.


학교와 학생들은 곧 일상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후유증이 만만치 않았다. 상처받은 제자들은 힘들어하고 방황했다. 자퇴하거나 퇴학당한 이들도 있었다. 이들이 영웅을 원망하거나 저주했다면 차라리 나았을 것이다. 그럴 수는 없었다. 이들은 말한다. ‘기억에서 지우는 것, 오로지 그것만이 답이다…….’ 남고괴담은 마지막 반전을 남겨두고 이렇게 허망하게 결말을 맺었다.
30년 후 필자는 이진 선생과 그의 제자 두 명을 만났다. 이 선생은 제자들에게 충격을 준 1977년 구속사건 뒤에도 세 번 더 옥고를 치르는 등 민주화 투쟁 전선에서 맹활약하다 국회의원이 됐다. 한 제자는 스승이 다니던 대학에 진학해 먼저 졸업장을 받았다. 현재 그는 스승과 같은 상임위 소속의 국회의원이다.


나머지 한 제자는 고교 시절의 충격으로 자퇴하고 출가하는 등 방황을 거듭하다가 뒤늦게 학업에 복귀했다. 현재 소설가이자 저술가로 필명을 떨치고 있다. 그는 당시의 괴담을 지금껏 사실로 믿고 있었다. 그것이 시대상황이 만들어낸 요설이었음은 아는데 30년이 걸린 셈이다. 이 선생은 학교재단의 양해를 얻어 가명으로 임시교사 자리를 받았다. 그것 이외에 대학원 졸업, 교원 자격증 등의 다른 이력은 거짓이 아니었다. 어쨌든 그를 비롯한 제자들의 마음 속에 이진 선생은 여전히 영웅으로 남아 있다. 요설 때문에 한동안 잊으려고 했을 뿐. 

 

글 신동호 (경향신문 뉴스메이커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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