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속 시대 읽기

지독한 우정

긴급조치 9호 세대에게는 너무나 유명한 26동 사건은 그러나 가장 엉터리 같은 사건 중 하나다. 이 사건을 수사한 경찰, 단죄한 재판부, 그리고 사건 당사자인 학생들도 그 전모를 정확히 알지 못한다. 심포지엄 중에 우발적으로 일어난 사건인 데다 강의동이 폐쇄돼 기관원이나 교직원이 현장을 목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농성 현장에 있다가 연행된 학생들도 곧이곧대로 증언할 리 없다. 조서가 어떻게 꾸며지느냐에 따라 훈방이냐 구속이냐가 결정되는 판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학생들도 뒤죽박죽 진행된 농성사태의 전말을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는 바로 이 사건 현장인 26동에 있다가 연행된 400여명 가운데 한 명이었다. 학내 강력한 지하서클의 핵심 인물로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는 그에게 강도 높은 조사가 따르는 것은 당연했다. 그 또한 경찰 조사에 응하는 요령을 잘 알고 있었다. ‘끝까지 오리발을 내밀어라.’ 운동권이라면 숙지해야 할 행동수칙 1호가 바로 이것이었다.


“네가 결의문을 작성한 게 맞잖아!”
“글쎄, 아니라니까요.”
“그럼 앞에 나가 떠든 놈이 도대체 누구야?”
“가방을 잔뜩 맡고 있었는데 내가 어떻게 알아요!”
수사관과 그의 팽팽한 기싸움은 일주일 동안 계속됐다. C급, B급으로 분류된 학생들이 모두 나간 뒤에도 경찰은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이 위기를 무조건 넘겨야 했다. 여기서 걸려들어서는 안 되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그는 가난한 집안의 4남2녀 중 장남이었다. 부모님의 짐을 덜고 동생들을 돌보기 위해서는 마음을 굳게 먹어야 할 처지였다. 그런데 그동안 얼마나 방황을 했던가. 시골에서 광주의 명문 중학교에 들어갔을 때만 해도 그는 공부 잘 하는 모범생이었다. 하지만 어린 나이에 객지생활을 한 것이 끝없는 탈선의 시작이었다. 고교입시를 앞두고 학교를 무단결석하고 석 달 동안 남도를 떠돌아다녔다. 대학입시를 코앞에 두고도 두 달을 무단가출하였다.


친구들은 그를 ‘천재’라고 불렀다. 그는 중학교 때 퇴학당하자 검정고시를 봐서 동기들과 나란히 광주의 명문고에 진학했다. 고교 때도 두 달 가출했다가 돌아와 곧바로 치른 중간고사에서 전교 7등을 차지했다. 지방의 수재들이 모인 학교에서 그는 평범한 수재가 아니었다. 공부에 매달리지 않고 탈선을 일삼는데도 성적이 좋았다.
대학에 들어와서 그는 긴 방황을 끝냈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일과 부모님의 기대를 모두 충족할 수 있는 진로를 모색하고 있었다. 겉으로는 공부를 계속하거나 취직을 하는 것처럼 하면서 내심 ‘노동운동’을 고려하고 있었다. 그래서 뜻하지 않은 사건으로 구속되는 일은 기필코 피해야 했다.


결국 그는 수사관과의 두뇌싸움에서 승리했다. 심포지엄에 참석하러 온 학생들은 서로를 잘 몰랐다. 학과와 학년이 다른 학생들이 뒤섞여 있어 얼굴은 알아도 이름을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상황을 절묘하게 역이용해서 수사관의 끈질긴 추궁에서 벗어난 것이다.
이 대목에서 26동 사건은 엉뚱하게 비틀린다. 그는 농성장에서 앞에 나가 발언도 하고 마지막
결의문 작성에도 깊이 관여했다. 그가 빠져나감으로써 경찰이 파악한 사건의 큰 그림에 빈 공간이 생긴 것이다. 뜻밖에 그 공백을 메운 인물은 그의 고교 동창이자 과 동기인 영재였다.


영재의 구속은 주변 사람들에게 큰 충격이었다. 영재는 고교 시절 그와 함께 ‘3대 천재’로 불렸지만 그와는 질적으로 달랐다. 그처럼 껄렁거리지도 방황하지도 않았다. 동기들 중에서 맨 먼저 ‘고시’에 패스할 것을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 기대주였다. 물론 영재도 유신이라는 폭압체제에서는 ‘출세’를 거부한 의식분자였다. 그래서 법대를 포기하고 그와 함께 경제학과를 선택했다. 하지만 영재는 투사가 될 수 없었다. 그러기에는 아까운 머리와 품성을 갖고 있었다.
영재는 심포지엄을 듣기 위해 26동에 갔다. 학교 측이 일방적으로 심포지엄을 취소하고 안에 갇힌 학생들이 수습책을 논의할 때 영재도 그와 함께 앞에 나가 있었다. 하지만 그 상황을 주도한 것은 아니었다. 형사들에게 찍힌 것도 아니고, 학교 측에서도 영재라면 보증해줄 수 있었다. 그런데 왜 구속된 것일까. ‘오리발’ 작전으로 위기를 모면하고 유유히 관악경찰서 정문을 나온 그는 뒤늦게 친구 영재가 구속된 것을 알고 기절초풍할 뻔했다. 경찰의 올가미에서 빠져나오는 데 급급한 나머지 한 가지 소홀히 한 점을 깨달은 것이다.
‘나 때문이야…….’


영재는 오리발을 내밀거나 수완 좋게 둘러댈 위인이 아니었다. 두 사람은 ‘머리’는 막상막하의 라이벌이었지만 품성은 정반대였다. 그가 ‘날라리’라면 영재는 ‘선비’였다. 결의문 작성 상황을 알고 있었던 영재는 자신이 혐의를 부정하면 할수록 화살이 친구에게 돌아갈 것이라 생각하고 의연하게 대치했을 것이다.
‘결국 나 대신 감옥에 간 것이구나!’
그는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다. 그리고 영재의 뜻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영재는 자신이 감옥에 가면서라도 그를 보호해야 다음해 거사 일정에 차질이 없을 것이라고 그 나름의 배려를 한 게 틀림없었다.
현대사의 암흑기인 유신시대에서도 가장 어두운 시기였던 긴급조치 9호 시절. 이 시기에 학원을 지배한 정서 중의 하나는 ‘부채의식’이었다. 감옥에 간 사람은 자기로 인해 많은 동료가 투옥·징계된 데 대해 괴로워했고, 감옥에 가지 않은 사람은 희생된 동료들한테 빚을 졌다고 자책했다.


아무 사전 준비 없이 감옥에 간 영재의 옥바라지는 당연히 그의 몫이었다. 막연히 생각했던 진로도 고민 없이 수정했다. 노동현장으로 가기 위해 그냥 졸업하는 것은 결코 영재에 대한 도리가 아니었다. 이듬해 그는 첫 시위팀의 주동자가 됐다. 26동에서 노래를 따라 불렀다고 해서 구속되는 시절에 시위 주동은 중형이 예상되는 선택이었다. 그는 시위 현장에서 곧바로 체포되면서 친구 영재에 대한 무거운 부채의식에서 비로소 해방될 수 있었다.
1980년 복교해 졸업한 영재는 대학원 진학이 거부됐다. 유신체제는 무너졌지만 신군부 정권의 견제가 계속됐기 때문이다. 학교가 기대하고 교수가 총애하는 천재였던 영재는 다른 대학의 대학원에 진학해 학위를 받았다. 시대는 두 천재를 시기해 감옥에 밀어 넣었지만 그들은 30년 변함없는 ‘지독한 우정’의 꽃을 피웠다.

글 신동호 경향신문 뉴스메이커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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