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속 시대 읽기

뺑끼통과 장기수

지금은 구치소나 교도소에 ‘뺑끼통’이 없다. 하지만 과거에는 방안에 배변을 하는 통이 있어서 거기에다 대소변을 봤다. 그 통을 일컬어 ‘뺑끼통’이라고 하고 이 말이 지금까지 이어져 교정시설의 화장실을 ‘뺑끼통’이라 한다. 수형 시설 내에서 언어 순화를 위해 노력을 하고 있다지만 이 말은 쉽게 없어지지 않고 끈질기게 생명력을 이어오고 있다.
한번은 교도소에서 있었던 일이다. 한달에 몇 번씩 소지해서는 안 되는 물건을 조사하기 위해 교도관들이 방 안을 뒤지는 날이 있다. 보안과장이 재소자들을 향해 일장 연설을 했다.
“에~ 이제 재소자 여러분들도 달라져야 합니다. 언어 순화는 기본이고 그리고 폭력 금지 특히 여름철 ‘뺑끼통’ 청소를 각별히 당부 합니다.”
‘???’
아니 언어 순화를 하자면서 ‘뺑끼통’이라니…….

 

1994년 서울구치소에서 첫 수형 생활을 할 때 일이다. 당시 공안 정국이 몰아치면서 각 사동의 독방은 양심수들이 독차지를 했는데, 나는 4동에 있었고 아래층에는 북한을 방문하고 돌아와 구속된 소설가 황석영 씨가 잠시 있었고 1970년대 ‘통혁당’사건으로 옥고를 치루고 1990년대는 ‘구국전위’사건으로 구속된 류낙진 선생이 있었다. 그리고 위층에는 역시 방북했다가 구속된 ‘조국평화통일불교협회중앙회장’인 법타 스님이 있었으며 이외에도 다수의 청년 학생들이 수감되어 있었다. 우리는 종종 뺑끼통에 모여 서서 창밖을 바라보며 정세 토론을 하거나 집회를 개최하곤 하였다.


한번은 조용한 오후 독서를 하고 있는데 누군가 ‘와~ 하늘이 불탄다.’하고 외쳤다. 나는 뺑끼통에 발을 내딛고 하늘을 봤는데 정말! 하늘은 붉은 물감을 풀어놓은 듯 곱고 아름답게 물들어 있었다. 그리고 조용히 침묵이 흘렀다. 잠시 후 누군가의 입에서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가 흘러나왔다. 우리는 ‘뺑끼통’에 발을 붙이고 서서 한목소리로 목이 터져라 합창을 하였다.

‘거센 바람이 불어와서 어머님의 눈물이 가슴속에 사무쳐 우는 갈라진 이 세상에 민중의 넋이 주인 되는 참 세상 자유 위하여…….’

노래가 다 끝나자 맨 아래층 류낙진 선생이
“어이 위층에 젊은 동지들은 좋겠네. 여기는 하늘이 안보여…….”
아참! 그렇지 아래층은 하늘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속으로 멋쩍은 쓴웃음을 지어야만 했다.
류낙진 선생과는 꽤 오랫동안 수감생활을 함께 했는데 선생님의 1심 재판이 있던 날이었다. 오전에 재판을 나가신 선생이 오후 점심시간이 지나도 돌아오시지 않았다. 식은 국에 밥을 먹으려 하는데 아래층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봐~ 다들 있나?”
우리는 창살에 조아리며 선생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아주 맑은 목소리로 “음~ 15년 받았다네.”
선생은 다행이라며 퍽이나 즐거워 하셨지만 아마도 우리 모두는 뺑끼통에서 눈물을 흘렸으리라. 세상에 평생을 감옥 생활을 하셨는데 15년을 받으시고 저리도 즐거워하시다니…….


한번은 선생이 접견을 다녀와서 손주가 다녀갔다고 자랑을 하셨다. 아주 예쁘고 착한 손주란다. 살아생전 꼭 손주의 손을 잡으실 수 있었으면 하셨다. 지금 생각을 해보니 요즘 한참 화제를 모으고 있는 ‘국민여동생’이라 불리는 여배우였던가 보다. 나는 그 배우의 예쁘고 초롱초롱한 눈을 볼 때 마다 류낙진 선생이 떠오른다.
선생은 집행유예나 기껏해야 몇 개월 정도의 감옥생활을 앞두고 초조해 하고 있는 우리를 달래 주시며 용기를 북돋아 주었고 누군가 출소를 하는 날에는 어김없이 뺑끼통에 모여서 축하를 하는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하지만 서로 접촉을 못하게 철저하게 격리 당하는 상황이었기에 출소 때까지 나는 아쉽게도 류낙진 선생을 한번도 만나질 못했다.
그후 선생은 8년형을 선고받고 복역을 하시다가 많은 이들이 석방운동을 한 결과로 1999년 광복절 특사로 비전향 가석방되셨다. 그리고 광주에 계시다는 소식은 지면을 통해서 알게됐다.


또다시 시간이 흘러 몇 년 전 우리 단체의 큰 집회가 있던 날이었다. 집회 사회를 보고 있는데 참여 인사를 소개하는 명단 중 원로혁신계 인사로 류낙진 선생이 적혀 있지 않은가. 무대 위에서 힘차게 그분을 소개하자 아! 선생께서 모자를 벗으시며 대중들에게 인사를 하고 나에게도 손을 흔드는 것이었다. 그날 나는 처음으로 선생을 멀리서 볼 수 있었다. 백발이 성성한 모습에 비록 허리는 구부셨지만 선생의 형형한 눈빛은 멀리서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연로한 모습으로 조용히 무대 뒤에 계시다 선생께서는 자리를 뜨셨다.
다시 시간이 지나 지난해 4월, 선생은 78세의 일기로 조용히 눈을 감으셨다.

 

‘뺑끼통’은 배설과 목욕, 설거지의 공간을 넘어 양심수들에게는 고독한 수감 생활에 있어서 서로에게 위안이 되었던 장소이며 소통과 토론의 장이었다. 하지만 최근에 뺑끼통 보다 더러운 일이 벌어졌다. 류낙진 선생의 묘를 비롯하여 비전향 장기수의 묘가 무참하게 깨졌고 빨간 스프레이까지 뿌려졌다. 이른바 ‘애국단체’임을 자칭하는 반북 수구단체 회원들에 의해 저질러진 일이었다. 생각이 다른 자의 묘를 깨 부시고 유골까지 드러나게 하는 얼음보다 차가운 저들의 광기가 무섭다.
하지만 그들이 무너뜨리는 건 비전향 장기수의 묘가 아니다. 그들이 무너뜨리는 건, 그동안 쌓아온 우리의 평화를 부수는 것이고 우리의 통일을 부수는 것이다. 아니, 사실은 자기 자신을 부수는 것이고 영원히 민족이라는 얼굴을 반쪽으로 만들자는 것이다. 참으로 잔혹한 전쟁이 아닐 수 없다.


글 최인기 전국빈민연합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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