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속 시대 읽기

배신자의 길

“야, 너 배정식하고 동기지?” “그런데......요.”
털보 선배가 정식이 얘기를 꺼내는 순간 그는 술맛이 싹 달아나는 기분이었다. 새삼스럽게 물어보지 않아도 뻔히 아는 얘기를 마치 추궁하듯이 묻는 선배의 태도가 못마땅했다.
“나아~쁜 노~옴!”


선배는 그의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기다렸다는 듯이 혀 꼬부라진 소리로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찔했다. 정식에게 하는 욕이었지만 그에게는 단순하게 들리지 않았다. 자리에 없는 사람에 대한 화풀이를 자신에게 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단지 고등학교 동기라는 이유만으로 같은 부류로 취급하는 것이었다.
술기운 못지않게 부아가 치밀었지만 그는 입을 닫았다. 험악해지는 선배의 말에 더 대꾸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술 취해 흥분한 사람과 입씨름하는 게 부질없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배정식에 대한 복잡한 기억이 그를 무겁게 짓눌렀기 때문이었다.
‘정식을 욕할 자격이 과연 내게 있는 걸까.’


취기로 희미해진 의식 사이로 온갖 감상(感傷)이 꼬리를 물었다. 내가 돈을 빌려주었다면, 아내를 닦달하지 않았다면....... 아니야,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뒤죽박죽된 기억의 파편들만 어지럽게 맴돌 뿐 도무지 정리되는 게 없었다.
배정식은 그의 가장 친한 고교 동기 중 한 명이었다. 자라온 환경은 달랐지만 뜻이 통했고 행동이 일치했다. 찢어지게 가난한 시골 출신인 정식은 머리가 그리 명석하지 않았다. 하지만 재수 끝에 기어이 일류대 명문학과에 합격한 ‘의지의 한국인’이었다. 그런 정식이가 그는 좋았다. 열악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강철처럼 의지가 강했고, 생각에 빈틈이 없었으며, 행동에 맺고 끊음이 분명했다.
대학 시절에도 정식과 그는 학교는 달랐지만 생각과 행동은 같았다. 그가 시위를 조직해 가투를 벌이면 정식은 한술 더 떴다. 학내에서 가장 강경한 이론가이자 활동가로 성장한 정식은 그의 부족한 역량을 채워주고 좁은 시야를 넓혀주는 든든한 동지이자 후견자 역할을 해주었다.


졸업 후 두 사람은 나란히 언론계로 진출했다. 공장에 들어가기에는 너무 나이가 들어버린 이들의 진로는 제한돼 있었다. 학생운동가를 받아줄 최고의 직장이 언론사이던 시절, 두 사람의 사회 진출은 그런대로 성공적인 듯했다.
그러나 10·26사태, 12·12쿠데타, 5·18광주민주화운동을 거쳐 제 5공화국이 출범했을 때 그것은 엄청난 착각이었음이 드러난다. 두 사람은 각자 자기가 몸담고 있던 직장을 잃었다. 그는 A급 위험인물로 찍혀, 정식은 언론통폐합으로 회사가 없어져 똑같이 거리로 나앉은 것이다.
5공 출범 과정에서 많은 지식인이 생계의 터전을 잃은 것은 익히 알려진 일이다. 신군부 세력이 재취업을 교묘히 방해했든, 회사나 조직이 알아서 입사를 기피했든 이들이 사회에 복귀하는 여정은 매우 까다롭고 험난했다.
그는 운이 좋았다. 친가와 처가로부터 약간의 도움이 있어 작은 집이나마 마련해두고 있었다. 잡지사와 출판사를 전전하면서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견딜 만한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런데 정식은 그렇지 않았다.


1980년대 초반 재취업이 불가능한 해직교수나 해직기자, 학생운동가 출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출판이었다. 이들은 출판을 통해 신군부의 체제에 맞섰다. 이 시기에 ‘종속이론’을 필두로 한 이른바 ‘제 3세계 서적’의 국내 출판 르네상스는 이들의 호구지책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정식도 출판사를 전전했다. 하지만 워낙 물질적 바탕 없이 시작한 탓에 생활고는 그와는 비교할 수 없이 컸다. 시골 부모와 동생들에 대한 부담도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사회과학서적 출판사보다는 수입이 많고 안정적인 사회단체의 사외보 편집장으로 자리를 옮기기도 했다.


그가 정식과 서먹서먹해진 사건은 바로 이 무렵에 일어났다. 사외보 편집장이 정식의 성격에 맞을 리 없었다. 그곳을 박차고 나온 정식의 생활은 그때부터 형편없이 망가지기 시작했다. 궁여지책으로 택한 것이 부인에게 미용실을 차려주는 것이었다. 정식의 부인이 그의 아내를 찾아왔다. 돈이 없는 걸 뻔히 아는 터라 집을 잡혀달라고 부탁했다. 그의 아내가 집문서를 내줬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그는 눈이 뒤집혔다. ‘당장 가서 집문서를 찾아오라’고 호통쳤다. 300만원에 집을 저당잡히느니 차라리 다른 데서 100만원을 빌려서 갖다주라고 했다. 그의 아내가 다시 집문서를 가져오는 과정에서 두 사람은 직접 부딪친 것은 아니지만 소원한 관계가 돼 버렸다.


정식의 부인이 근근이 차려 운영한 미용실이 어떤 운명에 처할지 점치는 것은 쉬웠다. 1년도 안돼 털보 선배 등 수많은 주변 ‘동지’들에게 피해를 준 채 미용실은 문을 닫았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중간에 정식의 동생이 살인 사건으로 투옥되기도 했다.
털보 선배가 불같이 화를 낸 것은 정식이 어렵게 사는 동지의 돈을 떼먹어서가 아니었다. 당시 5공 정권은 운동권을 포섭해서 운동권을 제압하는 일종의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을 구사하고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정식이 취직한 데가 별정직 2급 공무원인 모처 출판심의위원이었다. 다시 말하면 판금서적을 심사하는 자리였다. 적보다 더 무섭고 가증스러운 게 내부의 배신자다. 어떤 위협과 유혹에도 굴하지 않던 강골 중의 강골이었던 그가 바로 그런 ‘배신자의 길’을 갈 줄이야 ....... 그를 아는 동지들은 아무도 그의 배신을 용서할 수 없었다.
어느 날 갑자기 운동권에서 사라진 정식을 20여년이 지난 지금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희미하게나마 정식을 기억하고 이해하려는 그는 필자에게 다음과 같은 후일담을 전해주었다.


“정식은 엄청나게 괴로워했다. ‘그렇게 고민되면 그만두면 될 거 아니냐.’고 했더니 ‘야, 이 새끼야!’하면서 나를 쳤다. 당시 그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먹고살기 위해 본의 아니게 독재정권의 하수인이 됐지만 스스로는 그런 현실을 받아들이지도, 자신을 용서하지도 못했다. 1년을 못 버티고 거기서 나온 뒤 소식이 끊어졌다.”
몇 년 뒤 그는 정식이 속세를 떠나 출가했다는 소문을 들었다. 지금은 미륵사상에 심취해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그는 정식이 틀림없이 미륵을 보았거나 언젠가는 보게 될 것이라고 믿고 있다.

 

신동호 경향신문 뉴스메이커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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