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속 시대 읽기

섬마을 편지 - 유배의 역사


아침 들녘에 산책을 나갔습니다. 한가위가 지난 들녘이지만, 곡식이 아직 무르익진 않았습니다. 올 추석은 예년보다 빠르게 찾아와 그렇습니다. 설익은 곡식들이 이른 절기를 말해 줍니다. 곧 익겠지요. 넉넉하진 않으나 한가로운 풍경입니다.
여느 섬인들 이처럼 유유자적하지 않겠습니까?


그럼에도 들녘 끝 어디에서건 만나게 되는 신지도의 바닷가에 서면 서러운 상념들이 떠오를 때가 종종 있습니다. 이 곳 신지도에 깃들어 있는 유배지로서의 역사가 아련히 다가오는 까닭입니다. 섬의 이름마저 상흔을 간직한 곳이어서 더욱 그렇습니다.

 

역사의 상흔이 깃든 섬
신지도란 이름은 본래 지도(智島)였습니다. 같은 지명을 지닌 곳이 또 있는데, 나주의 지도라는 곳이지요. 오래전 나주는 전라도에서 두 번째로 큰 고을이었습니다. 나주목(羅州牧)이 주재했던 곳이지요. 행정 상 혼동된다 하여 신지도(新智島)로 바뀌었다가 다시 신지도(薪智島)로 개명되었습니다. 신지도(薪智島)로 바뀐 데에는 일설이 있습니다.


섬으로 유배 온 분들은 넉넉하고 풍요롭게 살 수 없었습니다. 땔감마저 구하기 쉽지 않아 여름 지나고 가을로 접어들었어도 굴뚝에선 흰 연기가 피어오르지 않았답니다. 굵은 장맛비가 내리고 거센 한뎃바람 부는 처마 끝에 나앉은 남루한 생활이었겠지요. 허나 신지도에는 땔감이나마 많아 그만큼 궁색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통한의 유배 생활 가운데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새로울 신(新)에다 풀 초(艸)를 얹어 섶 혹은 땔 수 있는 나뭇가지라는 뜻을 지닌 신(薪)으로 고쳤다는 것이지요.
다른 한편으로는 중앙 정부로부터 배척당한 당시의 죄인들을 맞아야 했던 지역민들의 내재적 아픔을 드러내고 있다는 해석이 있습니다. 애초부터 신목림(薪木林)이 울창한 까닭에 그처럼 이름을 바꾼 것이라는 주장 또한 있습니다.

 

남도에 있는 섬들은 곡절이 참 많습니다. 행정구역 상 여기저기로 옮겨 다니곤 하였지요. 신지도 역시 예외는 아닙니다.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영지인 새금 현에 속했었습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탐진 현에 소속되었고 고려 현종 때에는 완도의 각 섬을 3등분하여 완도, 고금, 약산, 청산, 군외 일부와 함께 신지도는 강진 현에 귀속되었습니다.

 

고종 33년(1896년)에 영암, 강진, 해남, 장흥에 속해 있던 유인도 75개, 무인도 135개를 통합하여 완도군이 창설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지요. 딴은 완도(莞島)라는 지명 또한 역사적 아픔을 지니고 있지만 여기선 생략하겠습니다.

 

 


더불어 유배지였습니다. 고금도, 청산도, 소안도, 보길도 등 완도의 섬만이 아닙니다. 여수 쪽 거문도나 목포 방면 흑산도 등 대부분의 섬들이 그랬습니다. 아니 남녘 땅 어디건 유배지 아니었던 곳이 없었습니다. 한양으로부터 천릿길이나 되는 멀고 먼 곳인지라, 극형 다음의 형벌인 유배를 떠나보내면서 뭍의 강진이며 해남 땅과 완도의 섬들로 당시의 죄인들을 초치하곤 하였지요. 신지도에는 유독 더 많은 분들이 유배를 왔습니다.

유배의 흔적이 섬 곳곳에
이 분야에 대해 오랜 동안 사료를 살펴 오신 완도문화원 사료조사위원이신 정동채 선생에 의하면 영조 21년(1745년) 김성학, 영조 38년 이광사, 정조 17년(1793년) 구순, 순조 1년(1801년)에는 김종권, 정약전, 윤행임 등이 귀향 왔으며, 철종 11년(1860년)엔 이세보, 고종 1년(1864년)에는 채귀연을 비롯하여 고종 24년(1887년)에는 지석영, 고종 38년(1901년) 이범주에 이르기까지 조선 말기 고종 대에만 열네 분이 신지도로 유배를 왔습니다. 아직 고증하지 못하고 있는 분들을 포함하여 약 40여 분에 이르는 많은 현학들이 조선 중기 이후, 신지도로 귀향 왔습니다. 해배되어 한양의 조정으로 입궐하기도 하고, 더 먼 섬으로 이배되어 떠나기도 했습니다. 끝내 이곳에다 혼백을 묻은 분도 있습니다.


이들 가운데 유적이 남아 있는 몇 분의 자취를 더듬어 봅니다.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 1705~1777)는 나주 괴서 사건(1755년)에 연루되어 함경도 부령으로 유배되었다가 진도로 이배되었고 진도보다 더욱 ‘변방의 먼 작은 섬으로 보내어 외인과의 교통을 끊도록’ 해야 한다는 계(啓)에 따라 영조 38년 9월 5일 신지도 금곡리로 옮겨 왔습니다. 그는 귀양살이 23년 가운데 16년을 신지도에서 보내고 생을 마감한 조선시대 대표적인 서예가였습니다.
이광사 서예의 특징은 ‘조선 후기 추사 김정희를 정점으로 비학(碑學) 중심의 서풍이 꽃피기 직전인 18세기 한국 서예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필체’로 유명합니다. ‘청조의 금석학이나 고증학의 영향이 작품에 직접 녹아들기 이전 필체로서 특히 겸재 정선이 조선 특유의 미감을 그렸듯이 원교 역시 독자적인 조선의 미감을 농밀하게 필묵으로 구사’ 하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그런 그가 살던 터전이 금곡리에 있습니다. 제가 찾아갔을 때, 마을 어르신 가운데 어느 분께서 원교가 살던 집터에 대한 이의를 제기하기도 하였는데 정동채 선생께서도 이런저런 고증을 통해 그 고택이 이광사가 기거했던 곳이 맞다는 견해를 피력하셨습니다. 현재 그 곳에 살고 계시는 분들은 그 집이 문화재로 지정되길 바라고 있었습니다. 저 또한 마땅히 우리의 고유한 서체를 일궈낸 분에 걸맞은 연구가 이뤄지길 갈망합니다. 그의 업적을 기리는 사업을 후학들이 펼쳐주길 소망합니다. 쓰러져 가고 있는 옛집을 긴급히 보수하고, 박물관화 하여 신지도를 찾는 이들이 보고 느끼고 체험할 수 있도록 배려하길 간곡히 앙망합니다.

 

정약용 형제와 지석영
순조 1년(1801년)에 신지도에서 약 8개월 정도 머물렀다가 흑산도로 이배된 정약전 역시 신지도에서 만나야 할 현학 가운데 한 분입니다. 신유박해로 그의 아우 정약용과 함께 화를 입고 신안군 우이도로 유배의 명을 받아 가던 도중 신지도에 도착하여 현재의 송곡 마을로 추정되는 곳에서 잠시 기거하였습니다. 그가 신지면 어디에 배소 받았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의 아우 정약용이 쓴 시에서 송곡 마을이었을 것이라고 유추할 뿐입니다.

 

푸른 해초 묶어서 끼니를 때고
감시하는 대장과 이웃 삼았다 하네
초가을에 형님이 손수 쓴 편지 받고
이 중춘에야 답장을 띄우노라

 

건너가고 싶어도 배가 없으니
어느 때나 죄의 그물 풀리려는지
부럽구나 저 기러기 물오리들은
푸른 물결 위에서 유유히 날고 있네





‘감시하는 대장과 이웃 삼았다’는 글로 보아 ‘이웃 삼았다’는 대장은 신지도에 세워진 신지도 진의 우두머리일 것으로, 신지도 진이 주둔한 송곡리였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한 대목입니다. 그는 이곳에서 약 8개월 정도 지냈지만, 그가 남긴 불후의 명저인 『자산어보』의 기초 자료를 이곳에서부터 조사, 연구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짧은 기간 동안 살다 옮겨 가긴 하였으나 그의 흔적을 이곳에서 더듬어 보는 일은 그가 남긴 저서의 진면목을 아는 방편이 되기에 충분하리라 봅니다.


이세보(1832~1895)는 철종 11년(1860년)에 신지면 대평리로 유배와 4년여를 살다 해배되어 돌아갔습니다. 철종의 이종 동생으로 왕족이었던 그는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를 비판하다가 안동 김씨의 계략에 의해 유배당하게 됩니다. 그가 쓴 유배 일기인 『신도일록』에는 매일처럼 대평리 울몰(명사십리)에 나가 손톱이 다 닳도록 모래밭에다 유배 생활의 설움과 분노, 그리움과 외로움을 시로 적었다 합니다. 그가 신지도에서 지은 시 77수가 현재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의 시가 적힌 시조 문학비는 완도읍 장좌리 부근 수석원 한쪽에 세워져 있습니다. 한국문학비건립 동호회에서 34번째로 건립하였다고 합니다. 정동채 선생의 말씀이 아니라 하더라도, 이 비는 마땅히 신지도의 명사십리로 옮겨야 합니다. 아울러 그가 신지도에서 쓴 77수 가운데 유배문학으로 꽃 피운 작품들은 문학비에 새겨져 기념되어야 합니다. 신지도의 귀중한 문화유산입니다. 시비에 새겨진 시를 옮겨 봤습니다

 

남풍이 가는 구름/ 한양 천리 쉬우리라
고신 눈물 씻다가/ 님 계신대 뿌려주렴
언제나 운도를 입사와/ 환고향을.

 

송촌(松村) 지석영이 신지도에 유배된 것은 고종 24년(1887년)이었습니다. 당시 사헌부 장령이었던 그는 끝 모를 난세를 보고 당대의 권세가들을 탄핵하라는 상소를 올렸으나, 도리어 갑신정변을 일으켰던 김옥균의 잔당으로 몰려 신지도로 유배당하게 됩니다. 신 의술 도입을 주창하였고, 신 의술을 배워온 곳이 일본이었기에 잔당으로 몰린 것이지요.


지석영은 신지도에서 약 5년여 동안 유배 생활을 하게 되는데, 그는 유배지에서도 인술제민의 뜻을 거두지 않고 종두법을 실시하였다고 전해집니다. 송곡리를 에두르고 있는 산인 망산에 메어둔 소 엉덩이를 칼로 째 쇠고름을 빼는 통에 주인이 소를 끌고 달아나는 일이 잦았다고 합니다. 아울러 멀쩡한 아이들에게 쇠고름을 놓는다고 하여 동네 아이들이 그를 보면 슬슬 피해 다녔다고 하니, 의술인으로서의 면모를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해배되어 지방 직을 전전하다 관직에서 물러난 뒤, 한글 개량과 보급에 심혈을 다한 학자이기도 하였습니다. 송곡리 404번지에 당시 모습은 아니지만 송촌이 기거했던 집이 남아 있습니다. 그의 업적을 기리는 어떤 조형물이라도 세워 기릴 수 있게 되길 간청합니다.

 

신지도의 역사 정리 필요
이분들 외에도 찾아보면 유배에 관한 흔적들이 많으리라 봅니다. 그분들이 남긴 것들은 신지면이 널리 알려야 할 문화유산입니다. 방문자의 발길을 끌기에 부족함이 없도록 복원하고 자랑해야 할 신지도의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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