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속 시대 읽기

섬마을 편지 - 추정(秋情)!


송 형(兄)!
며칠 전, 안부 끝에 ‘다리 언제 개통하느냐’고 물으셨지요?
그 전화 받고, 언제쯤이라고 누군가 알려준 시기를 전해주면서도 딴에는 공사가 지연되고 또 몇 차례나 임시 개통이 이뤄지지 않은 탓에 정작 언제일까? 저도 곰곰히 생각하고 있는데, 동료 중 한 분이 저녁 어스름에 개통되기 전의 신지대교(완도와 신지도 간의 연륙교)를 한 번 건너볼 동지들 모집한다며 엄지손가락을 내보이더군요. 거기 잡으면 한 패가 되는 거잖아요. 좋을 듯싶어 엄지손가락 잡는 시늉을 해보였습니다.


동료 몇이서 다리를 건넜습니다. 바람이 세차게 불더군요. 아주 강하게 불면, 물살 빠른 해협 가운데로 날아가 버릴 지도 모르겠다고 입을 모았습니다. 조심스럽게 한 발 한 발 띄었습니다. 아래로 내려다보려는데 무서움증이 확 다가왔으나, 가만가만 난간에 다가가서 쳐다봤습니다. 아찔하더군요. 까마득했습니다. 때마침 배가 한 척 통! 통! 통! 지나가는데, 천 원에 두 개 주던 옛날의 바나나 빵 크기로밖에 보이지 않더군요.


다리 중간을 조금 지나자, 건너편 끝 부분이 보였습니다. 하던 공사를 그만 두고 돌아간 저녁 시간이어서 우리들은 조심스럽게 다리의 끝 지점에 이르렀습니다. 누군가는 완도읍의 고층아파트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을 보고, ‘아파트’란 노래를 나지막이 흥얼거리기도 하였습니다. 건너온 다리의 저쪽, 다시 되돌아 갈 길을 돌아보았습니다.
이제야 고립에서 벗어난다는 느낌이 들더군요. 바람 불고 안개가 낀 날이면 오지도 가지도 못하고 꼼짝없이 갇히게 된다는 걸 섬에서 살아본 사람들은 압니다. 배를 타고 건너야만 하는 번거로움에서 벗어나게 된다는 사실에 앞서 ‘고립’되어 있다가 풀려나게 되었다는 느낌이 먼저 들더란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고도(孤島)가 아님에도 섬사람들은 외딴 섬에 산다는 고립감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일상에서 내보여지는 소외감이 그렇고 사람끼리 이렇게 저렇게 얽힌 관계에서도 여전히 손해보고 있다고 여기곤 합니다.

다리가 개통되면 이제 그런 생각에서 벗어나게 되겠군, 하는 마음을 가지다 퍼뜩 떠오른 상념입니다. 섬에서 벗어났는가 싶었는데, 여전히 고립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는 누군가의 글을 본 듯하여 피어오른 연상이기도 합니다.
그 길을 되돌아왔습니다.


집에 돌아와 책꽂이를 뒤적였습니다.
한참을 찾았습니다. 꺼내 든 책이 보길도가 고향이어서 그곳에 돌아와 살고 있는 강제윤 시인의 『숨어사는 즐거움』이었고, 그 책에 실린 시인의 시 한 편을 찾아냈습니다.

 

 



뭍에 나왔다 돌아가는 길, 땅 끝에서 배를 기다립니다.
폭풍주의보로 발이 묶였습니다.
섬을 떠나왔다 생각했으나 나는 여전히 고립되어 있습니다.
-‘섬이란 무엇인가’, 첫째 연-

 

강 시인께서 염려하듯 바람 불고 안개가 끼면 어떻게 돌아갈 수 있을는지 안타까워하는 곳이 아니라 이제는, 격랑이 일고 안개가 자욱이 내려앉아도 또 다른 어떤 해변(海變)이 몰아쳐도 언제든 다시 돌아갈 수 있는 길이 참으로 이제는, 생긴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고립되어 있지 않다는 안도감이 들지 않았습니다. 연륙의 다리가 고립감으로부터 헤어나게 하는 해방의 끈으로 닿질 않는 것이었습니다.
돌아가야 하는 길, 다시 돌아가 일상의 삶을 움켜쥐고 숨 쉬며 사는 바로 그 자리에서 평상심의 마음으로 생명과 평화를 일궈내지 않으면 가교(架橋)가 있다한들 고립감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탓이겠지요.

 

송 형!
다리를 건너 다시 돌아온 이 밤, 섬에서 맞는 가을밤은 또 다른 쓸쓸함이 사뭇 깃들어 있습니다. 송 형이 사는 그 넉넉하고 안온한 농가 마을에서도 그렇다고 전할진대, 바람으로 하루를 열고 바람으로 하루를 닫는 섬에서의 가을은 참 막막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송창식의 ‘철 지난 바닷가’를 듣는, 오늘 같이 고즈넉한 밤이면 세월 저 편에 서글펐던 곡절이 다가와 가슴을 적십니다. 철 지난 바닷가에 나가면 더욱 그럴 것입니다. 마음속을 외롭고 쓸쓸하게 들쑤셔 놓을 것입니다. 노랫말마저 속살을 헤집으며 파고듭니다.

철 지난 바닷가를 혼자 걷는다
달빛은 모래 위에 가득하고
불어오는 바람은 싱그러운데
어깨 위에 쌓이는 당신의 손길
그것은 소리 없는 사랑의 노래
옛일을 생각하며 혼자 듣는다
아 기나긴 길 혼자 걸으면
무척이도 당신을 그리곤 했지
아 소리 죽여 우는 파도와 같이
당신은 흐느끼며 뒤돌아 봤지
철 지난 바닷가를 혼자 걷는다
옛일을 생각하며 혼자 웃는다
- 송창식 작사·곡·노래 -

‘혼자 웃으며 떠올리는 저 먼 옛날의 추억…….’
이제는 다시금, 돌이켜 보고 싶지 않은 허허로움이겠지요. 함에도, 웃음으로 떠나 보내고야마는 옛 임의 모습이 정작 밉지마는 아니 하여, 웃음 뒤에 따르는 데인 듯 아픈 마음의 상처를 혼자서 쓸쓸히 애 섧게 내려놓는 것이겠지요. 아아, 그래서 말입니다. 달빛 밝은 오늘 같은 밤이면 누군가로부터 그윽하고 안온한 연서를 받고 싶어집니다. 아름다운 사람의 꽃 편지를 건네받고 싶은 마음이 솟고라집니다. 풋풋한 사랑 내음 묻어나는 글줄이 기다려집니다. 정작, 아무 곳에서도 오지 않을 걸 알면서도 마냥 기다려집니다. 기다리다 지쳐, 받아 보고픈 편지 끝내 제 손길로 찾아 나섭니다.

세상 꽃들은 저마다 말 한 마디씩 입에 물고 핍디다.
가슴에 오래 묻어둔 말 많으나
꽃 피우는 풀 한 포기만큼도 절실하게 못 살아서
꽃 피운 말 한 마디 없으니
눈앞에 다가온 가을 쓸쓸해서
저물 무렵 선암사에 갔습니다.
저 치열하게 붉은 꽃무릇, 저마다 입에 물고 있는
말, 말, 말…….
보고 싶다, 보고 싶다, 보고 싶다…….
- 『김해화의 꽃편지』 중 ‘보고 싶다 보고 싶다 보고 싶다 - 꽃무릇’ 전문 -

이제야, 아궁이에 불을 지핀 듯 속내가 따뜻해집니다. 제 마음으로 고른 풋풋한 노래여서 가슴이 평온해집니다. 제가 그리워하는 게 마냥 더 즐겁습니다. 제가 먼저 달려가 보고 싶을 뿐입니다.

 

송 형!
이제 그만 접어야겠습니다. 뒤늦은 답장을 띄우면서 속절없이 헤픈 마음 내보여 그저, 부끄럽기도 하고요. 그렇다고 무람없다 너무 나무라진 마십시오. 가을이지 않습니까!
건강과 평화를 빕니다.
시월 중순, 신지도에서 합장

 

사진 황석선 

글 한상준
전북 고창 출생
1994년 「삶, 사회 그리고 문학」 지에
「해리댁의」를 발표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작품집으로 <오래된 잉태>가 있음.
현재 교육문예창작회와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원이며
전남 완도 신지중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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