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속 시대 읽기

모든 불온한 것들 중에서도 가장 불온한 김지하의 『황토』


 

지금은 개발이 되어 흔적조차 찾기 어렵게 되었지만 당시만 해도 세종문화회관 뒤편에는 멋진 한옥들이 꽤 많이 남아 있었다. 당주동이라 했던가. 1979년 어느 날, 거기 사는 벗의 집에서 나는 눈이 번쩍 뜨이는 책 한 권을 발견했다. 『황토』(한얼문고, 1970). 그것도 김지하 시인이 엠네스티(국제사면위원회) 활동을 하던 벗의 부친에게 직접 서명까지 해준 시집이었다.


아아, 빨간 표지가 선명한 그 시집을 꺼내 들었을 때의 그 형용할 수 없는 감동이라니!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김지하의 시 한 편을 온전히 읽은 적이 없었다. 기껏해야 이런저런 평론에서 토막으로 인용된 시 몇 줄을 겨우 훔쳐 읽곤 했을 뿐이었다. 김지하는 말 그대로 지하의 인물, 밝은 대낮 햇볕 속에서 공공연히 거론해서는 안 되는 금기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나는 얼른 <황톳길>을 읽었다.


황톳길에 선연한
핏자욱 핏자욱 따라
나는 간다 애비야
네가 죽었고
지금은 검고 해만 타는 곳

 

누가 들을세라 입안으로만 나지막이 읽는데도 목구멍이 콱콱 막혔다. 뻘건 황토 뻘밭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 길 아닌 길을 한 사내가 걸어간다. 철사 줄에 꽁꽁 묶인 채. 그 길이 어디인가. 애비가 죽은 곳이다. 애비의 애비들이 죽은 곳이다. ‘부줏머리 갯가에 숭어가 뛸 때/ 가마니 속에서 네가 죽은 곳’이다. 아아, 태양은 왜 저리 죽자고 뜨겁게 이글거리는가. 사내는 피울음을 삼키며 그 길을 간다. ‘작은 꼬막마저 아사하는/ 길고 잔인한 여름’이다. ‘하늘도 없는 폭정의 뜨거운 여름’이다. 그 뜨겁디 뜨겁고 잔인하디 잔인한 여름, 사내는 간다. ‘철삿줄 파고드는 살결에 숨결 속에/ 너의 목소리를 느끼며 흐느끼며’ 사내는 간다. 나는 간다 …….


나는 한번도 그렇게 울어보지도 못 했지만, 피울음이 무엇인지 단박에 알아차렸다. 나는 한번도 그런 길을 걸어보지 못 했지만, 뜨거운 황토 뻘밭길이 무엇인지 단박에 알아차렸다. 그리고 그 피울음과 그 황톳길이 어째서 ‘하늘도 없는 폭정의 여름’ 인지도 단박에 알아차렸다. 온몸이 떨리는 흥분 속에서 다시 한 편의 시를 찾아 읽었다.

 

잘있거라 잘있거라
은빛 반짝이는 낮은 구릉을 따라
움직이는 숲그늘 춤추는 꽃들을 따라
멀어져 가는 도시여
피투성이 내 청춘을 묻고 온 도시
잘있거라
-- <결별> 중에서

 

눈물이 나지 않았다면 유신의 폭정 속에 사는 젊은이가 아니었다. 어느 결별인들 슬프지 않으랴. 하지만 울어서는 안 되는 결별도 있다. 지나간 세월, 고통과 폭압의 세월뿐이었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견디고 싸워왔지만, 어쨌든 졌다. 그래, 당신이 이겼다. 하지만 내일은 다르리라. 아니, 달라야 한다. 사내는 뜨거운 눈물을 속으로 삼킨다.

 

고개를 숙여
내 초라한 그림자에 이별을 고하고
눈을 들어 이제는 차라리 낯선 곳
마을과 숲과 시뻘건 대지를 눈물로 입맞춘다
온몸을 내던져 싸워야 할 대지의 내일의
저 벌거벗은 고통들을 끌어안는다
미친 반역의 가슴 가득 가득히 안겨오는 고향이여
짙은, 짙은 흙냄새여, 가슴 가득히
사랑하는 사람들, 아아 가장 척박한 땅에
가장 의연히 버티어 선 사람들
이제 그들 앞에 무릎을 꿇고
다시금 피투성이 쓰라린 긴 세월을
굳게굳게 껴안으리라 잘있거라
키 큰 미루나무 달리는 외줄기
눈부신 황톳길 따라 움직이는 숲그늘 따라
멀어져 가는 도시여
잘있거라 잘있거라.
-- <결별> 중에서

 

세상과 정면으로, 세상과 가장 정직하게 싸워본 사람이 아니면 어찌 이런 결별을 말할 수 있을까. 그런데도 나는, 그때 겨우 스무 살을 갓 넘긴 나는, 한번도 노동의 신성함조차 맛보지 못 한 나는, 한번도 군부독재와 정면으로 맞서 싸워보지 못 한 나는, 오만하게도 감히 그 순간 많은 것과 결별했다. 결별한다고 선언했다. 오오, 고통의 축제 정현종이여. 오오,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 잎같이 쬐끄만 여자’의 오규원이여. <평균율> 동인이여. 잘 알지도 못 하지만, 발레리여, 바슐라르여…….

 

내 최초의 반란
한동안의 침묵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시집을 빌려 달라고 부탁했다. 벗은 나를 생각해서 거절했지만, 나는 기어코 단 하루만이라는 말미를 얻어 그 책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날 밤, 어떻게 집에 돌아왔는지 몰랐다. 새 노트를 꺼내 밤새도록 그 시집을 필사했다. 첫 장부터 마지막 판권란까지……. 촉이 무딘 만년필에서는 시도 때도 없이 잉크가 줄줄 새어나오는데, 떨리는 가슴을 애써 누르며 나는 마침내 문학평론가 염무웅의 발문까지 다 베껴 쓸 수 있었다. 오오, 그의 말대로 ‘한 마리 검은 숫말처럼’ 우리 곁에 나타난 시인 김지하! 그는, 그리고 그의 시집 『황토』는 내 최초의 반란이었다.

 

이 작은 반도는 원귀들의 아우성으로 가득차 있다. 외침, 전쟁, 폭정, 반란, 악질(惡疾)과 굶주림으로 죽어간 숱한 인간들의 한에 찬 곡성으로 진동하고 있다. 그 소리의 매체. 그 한의 전달자. 그 역사적 비극의 예리한 의식. 나는 나의 시가 그러한 것으로 되길 원해 왔다. 강신(降神)의 시로.
-- <후기> 중에서

 

그때부터 김지하는 내 문학, 내 삶의 밑바닥에서 나를 움직이는 어떤 보이지 않는 자장(磁場)이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어려울 때마다 그가 나를 대신해서, 우리를 대신해서 싸워주기를 바랐다. 그건 말하자면 나를 대신해서, 우리를 대신해서 더 큰 고통을 감내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요구였다. 협박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때 이미 너무나 큰 고통을 받은, 우리 시대의 대속자(代贖者)였다.

 

나를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자장(磁場)
1980년 5월이 지나고 그가 세상에 다시 나왔을 때, 그는 이미 『황토』의 시인, <오적>의 싸움꾼이 아니었다. 생명이라는 말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폭력과 물질과 속도와 양의 선천(先天)을 넘어서서 새로운 후천개벽의 유토피아를 갈구한다는 소문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5월 학살의 한복판에서 살아남은 이들은 그를 순진한 낭만주의자로 폄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세월이 훌쩍 흘러 저 참혹한 분신정국의 시대, 그는 하루아침에 전혀 다른 사람인 듯 발언했다.
“벗들, 죽음의 굿판을 거둬치워라. 당장!”


이제 다시 그때의 정황을 놓고 이러저러한 말을 짓고 싶지 않다. 한 가지, 나는 태어나서 가장 치명적이다 싶을 정도의 배반감을 느꼈는데, 그건 그만큼 그가 내게 준 영향이 컸기 때문이었다.
얼마 전, 동료들 사이에서 김지하 이야기가 다시 나왔다. 내가 “김지하 선생”이라고 부르자, 한 동료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면서 제 경험을 이야기 해주었다. 인사동인가 어디서 지팡이를 짚고 걸어오는 그를 보았다. 동료는 얼른 고개를 돌린 채 그가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동료는 내게 말했다.
“나는 아직 용서가 안 돼.”

평가는 각자의 몫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 와 감히 말하건대, 그가 있어 나는 행복했다. 그는 저 무수한 불온한 것들 중에서도 가장 불온한 시 한 편을 읽을 수 있게 해주었다. 다시 말해, 그건 누구의 생이든 모든 생은 어차피 자신의 전 존재를 건 싸움이라는 사실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김지하, 그는 아직도 내게 하나의 사건이다. 불온해서, 행복한!

-그동안 미흡한 글을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글 / 김 남 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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