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속 시대 읽기

작고 낮고 느린 김현성의 노래

 

쉽게 말해 이렇다. 김현성(44) 씨는 몰라도 김현성 씨의 노래를 모르는 사람은 드물다. 고 김광석 씨가 ‘다시 부르기’ 해서 이제는 국민가요 반열에 오른 <이등병의 편지>, 2002월드컵의 국민가수 윤도현 씨가 부른 <가을 우체국 앞에서>는 대중음악의 클래식이 되었다. 그리고 김광석, 윤도현이라는 가수의 이름 뒤에는 김현성이라는 작곡가가 있다. 거리에서 노래방에서 끊임없이 ‘다시 부르기’ 되는 두 노래는 모두 김현성 씨가 작사, 작곡한 노래다. 김광석, 윤도현 그들의 시작에 어쨌든 1980~90년대의 노래운동이 있었으니, 그 시절의 민중가요는 국민가요와 국민가수로 그렇게 남았다.

 

<이등병의 편지>와 <가을 우체국 앞에서>

 

김현성 씨는 작사, 작곡가일 뿐 아니라 가수다. 영어로 ‘싱어 송 라이터’라고 부르는 아티스트다. <이등병의 편지>, <가을 우체국 앞에서>는 김현성의 목소리로도 음반에 담겼다. 자, 이쯤 되면 궁금해진다.

 

  자신의 노래만큼 자신이 유명해지지 못한 아쉬움은 없을까? 김현성 씨는 “그 노래의 임자는 그 사람들”이라며 “노래가 가진 운명”이라고 담담하게 말했다. 이제는 노래를 만들며 노래의 운명에 대해서 생각도 해본다. 그는 “농부가 농사를 지어서 혼자 다 먹는 것 아니지 않느냐”며 “요즘엔 노래를 만들면서 ‘이 노래의 임자는 누굴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노래의 임자는 가수 뿐 아니라 대중이기도 하다.

그의 노래들은 만들자마자 세상에 알려졌다가 어느새 잊혀지는 유행가와 달리 만든 지 10년이 지나서야 세상에 알려졌다. <이등병의 편지>, <가을 우체국 앞에서>는 느리게 알려졌지만 오래 기억된다. 이렇게 노래의 운명을 생각하다 보니, 이제는 운명의 직감도 생겼다. 10년이 묵은 뒤에 알려지는 다음 히트 곡은 뭐냐고 그에게 물었다. 그는 “정호승 시인의 시에 노래를 붙인 <술한잔>이 아닐까 싶다.”며 “공연 때 반응을 보면 그렇다.”고 말했다. 과연 ‘술한잔’의 주인은 그일까, 누구일까.
그에게 <이등병의 편지>가 쉽게 씌어진 노래라면, <가을 우체국 앞에서>는 어렵게 씌어진 노래다. <이등병의 편지>는 군대 가기 전에 차안에서 뚝딱 만들었고, <가을 우체국 앞에서>는 가사를 짓는 데만 3년이 걸렸다. 그는 “내가 생각하기에 <가을 우체국 앞에서>는 희망가”라며 “사랑을 함부로 쓰는 시대에 사랑을 말하지 않고 사랑을 말하는 노래”라고 말했다. 그리고 덧붙인 한마디, “사랑 타령 안 해도 노래 할 것이 참 많다.”

 

그는 요즘 시에 노래를 붙이는 작업을 넘어서 음식을 소재로 노래를 만든다. 된장, 김치, 두부 같은 음식이 나오는 시에 노래를 붙이는 작업이다. 생활의 발견에서 나아가 생활노래의 발견이라고 할만한 경지다. 듣지 않아도 노래의 단촐함이 떠오른다. 그는 자신의 노래가 생명력을 지닌 이유를 근원적인 감정을 찾아왔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의 이런 철학은 히트곡에도 스며있다. 군대가는 젊은이의 마음처럼 근원으로 돌아가는 감정도 흔치 않을 터이고, 가을 우체국 앞에서 무언가를 담담하게 기다리는 마음처럼 순수의 근원에 가까운 감정도 드물 터이다. 그러니 들으면 들을수록 공감이 커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그가 근원을 향해온 과정을 되감기 해보자.

생활에 밀착된 노래

 

그의 노래는 운동에서 출발하지 않았다.


그는 “처음에는 노래의 사회적 책임감이 없었다.”며 “환경이 나에게 책임을 느끼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사랑타령만 넘치는 가요풍토가 그를 노래로 운동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남들이 자신의 노래를 일종의 민중가요라고 부르던 시절에도 자신의 노래는 그냥 ‘노래’라고 생각했다. 그는 “나의 노래에는 ‘투쟁’이라는 단어가 들어가지 않는다.”며 “투쟁 보다 근원적인 생활에 밀착된 노래”라고 말했다. 그리하여 그가 전국 최초의 군 단위 노래패라고 말하는 ‘종이연’이 만들어졌다. 당시 종이연에는 스무 살 무렵의 윤도현도 있었다. 시대를 풍미했던 유명 노래패들이 지금은 유명무실해졌거나 흔적 없이 사라졌지만, 그래도 종이연은 윤도현이라는 좋은 씨앗을 뿌렸다고 그는 생각한다.

 


 


투쟁가를 부르는 노래패가 각광 받던 시절에도 그는 자신의 노래가 생명력이 더 길 것이라고 확신했다. 생활에 밀착된 노래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노래패 후배들에게 운동이 끝나면 너희는 무슨 노래 할 거냐고 묻곤 했다. 운동을 위한 노래가 아니라고 생각했으므로 노래패의 생존에 집착할 이유도 없었다. 때때로 노래패 후배들에게 “비틀즈도 해체했는데 너희라고 해체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충고하곤 했다. 그래서 종이연이 해체한 후에는 따로 또 같이 활동하는 일종의 연합 형태의 노래모임 ‘혜화동 푸른 섬’을 만들어 후배들과 음악을 공감했다.

그는 노래에는 경계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등병의 편지>는 운동가요냐 그냥 가요냐”고 묻는다. 그의 이런 경계 없음은 경험에서 나왔다. 그는 집회에서도 노래를 부르고 밤무대도 뛰어봤다. 그래서 요즘도 노래패 후배들에게 음반이 나오면 홍보하러 방송국, 신문사에도 가라고 충고한다. 그들의 노래에 정치만 아니라 생활도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는 “치사한 일을 겪으면서 절실해져야 절실한 음악이 나온다.”고 말했다. 종이연 시절부터 치사한 꼴을 겪으면서 얻은 교훈이다. 이렇게 생활과 분리되지 않은 그의 노래는 강한 생명력을 지녔다. 희망이 하나 있다면, 그가 정태춘 씨를 보면서 느끼는 것처럼, 후배들이 그를 보면서 ‘저 선배처럼 살아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시노래 모임 ‘나팔꽃’

그는 요즘도 경계없는 ‘기천불’ 신자다. 가톨릭 수녀님들과 대중가요 음반을 만드는 한편 부처님 오신날 봉축음악도 작곡한다. 사람의 심성을 올곧게 가꾸는 음악이면 무엇이든 마다하지 않는다. 그런 그에게 시노래 모임 ‘나팔꽃’은 음악인생의 마지막 모임이다. 나팔꽃은 음악지기인 백창우 씨와 함께 <바위섬>을 부른 김원중 씨의 3집 음반을 프로듀싱하면서 시작됐다. 그 음반에 담긴 노래들이 대부분 시를 가사로 만든 것이었고, 이참에 시노래 모임을 만들자고 세 명이 의기투합했다. 나팔꽃 동인은 다단계(?)로 만들어졌다. 백창우 씨가 평소 잘 알던 도종환 선생을 끌어들였고, 김원중 씨는 친하게 지내던 안도현 시인에게 참여를 제안했다. 그러자 안도현 시인은 “용택이도 해야 되는데…….” 하며 김용택 시인을 끌어 들였다. 그렇게 1999년 3월 나팔꽃이 태동했다. 처음에 8명으로 시작했던 동인은 어느새 16명으로 늘었다. 정일근 시인이 만든 울산 시노래 모임 ‘푸른 고래’, 한보리 씨가 주도하는 광주 ‘시를 노래하는 달팽이’ 같은 지역 조직도 생겼다. 나팔꽃의 슬로건은 ‘작게, 낮게, 느리게’. 그는 “올림픽 정신과 반대”라며 “한쪽에 댄스가요가 있다면, 다른 쪽에는 시노래도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취지를 설명했다.



 

그의 음악도 나팔꽃과 발맞추어 변했다. 원래 시적인 노래가 이제는 시로 만든 음악이 됐다. 그는 2000년대 들어 시에 노래를 붙인 <몸에 좋은 시, 몸에 좋은 노래> 음반 석장을 발표했다. 김수영의 <풀>부터 곽재구의 <사평역에서>, 류시화의 <짧은 노래>까지 다양한 시들이 노래로 만들어졌다. 그에게는 시를 노래로 만들면서 지키는 원칙이 있다. 우선 노래를 위해서 시를 희생하지 않는다. 음악에 맞추어 시 구절을 바꾸거나 생략하지 않는 것이다. 또 하나, 풍경이 떠오르는 시를 음악으로 만들려고 노력한다. 곽재구 시인의 시에 노래를 붙인 <사평역에서>를 들어보면, 시에 담긴 풍경이 노래로 살아옴이 느껴진다. 그러고 보면 <이등병의 편지>, <가을 우체국 앞에서>가 사랑받는 이유도 노래 안에 누구나 겪었거나 이해할만한 가슴 아픈 추억이 담담한 풍경으로 그려져 있기 때문이 아닐까.

 

문학축제를 여는 게 꿈

 

그는 가수이면서 『가을 우체국 앞에서』 등을 펴낸 시인이다. 정확히 말하면 시골에 사는 가수이자 시인이다. 근본이 파주 촌놈인 그는 2000년 여름,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경기도 여주로 내려왔다. 그는 “<월든>을 보면서 자연생활을 꿈꾸었는데 꿈이 이루어졌다”며 “이렇게 지향한 대로 이루어져왔다.”고 말했다. 아직도 그에게는 지향한대로 이루어야 할 일들이 많다. 독후감과 그림감상을 노래로 만드는 작업에 애쓰고 있고, 언젠가는 윤동주 문학제, 김남주 문학제 같은 지역의 문학제를 모아서 미술 비엔날레 같은 문학축제를 여는 꿈도 꾼다. 당장은 이달 서울 안국동 조계사 불교역사관에서 여는 나팔꽃 공연에 힘을 기울여야 한다. 그는 “51%의 긍정을 믿으면 가능해질 일이 많다.”고 나직이 말했다. 오선지에 새긴 김현성의 편지는 계속된다.

 

김수경 씨네21 기자

 

사진 황석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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