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속 시대 읽기

불발로 끝난 현실동인, 어둠 속에서 현실과 발언으로

 

20대 청춘의 미술대학생들로 이루어진 1969년 현실동인 전시는 불발에 그쳤다. 이후 11년이 지나 동숭동에서 오윤을 제외한 작가들은 모두 바뀌어 현실과 발언이라는 동인의 이름으로 전시를 하게 된다. 하지만 1980년 10월 17일 오후, 전시장(현 문예진흥원 미술회관)은 전시작품들의 불온성을 이유로 들어 뒤늦게 ‘전시불가’ 판정을 내리고 전시 개막일에 전시장의 전기 스위치를 모두 내려버렸다. 결국 참여 작가와 초대 손님들은 손에 촛불을 들고 작품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작품들은 이내 철거되고 만다. 1969년의 <현실동인> 전이 전시 직전에 서울미술대학 교수들의 고발로 막을 올리지 조차 못했고, 1980년의 <현실과 발언> 전은 막은 올렸지만 어둠 속에 간신히 그 존재만을 알리게 된 것이다. 11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밤은 깊었다.

 

교수들의 고발로 무산된 <현실동인> 전

 

<현실동인 제 1선언>으로 유명한 현실동인은 오윤, 임세택, 오경환, 강명희 네 사람의 청년작가와 이론가로는 서울대 미학과 출신의 시인 김지하와 미술평론가 김윤수가 참여한 그룹이었다. 그들은 당시 보기 드물게 서구적 미학 개념을 벗어나 우리 미술에서 민족미학의 근원을 찾고자 했다. 스스로 밝혔듯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기인하기보다 단원과 겸재, 혜원 등의 속화와 실사정신 그리고 다양한 민화에 대한 창조적 반응이었다(김지하,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형편이 그중 나았던 임세택의 지원으로 작가들과 이론가들은 경기도 안양 숲속의 임세택 별장에 모여 밤새 토론하고 그림도 그리며 한국현대미술사에서 초유의 일을 결행해 나갔다.
이름 하자면 ‘민족리얼리즘’을 구현하고자 했던 이들은 한국의 미술사는 물론 서구를 비롯해 멕시코 거장들의 작품들을 검토하고 또 검토해 나갔다. 그들이 열망했던 것은 민족미학이었다. 대학 강의실에서보다 선배들에게서의 배움이 더 컸다는 동숭동 시절, 그들은 서로를 격려하면서 함께 나가고 있었다. 김지하의 회고에 따르면 꼬박 닷새 동안 써내려간 그의 <현실동인 제 1선언>은 김윤수의 교열을 거쳐 네 명 작가들의 독회를 거쳐 완성되었다. 아마 한국미술사를 통틀어 작가와 이론가의 의식적인 공동 작업으로 이루어진 최초의 글이며, 작품들이었을 것이다. 이미 일제강점기 시대부터 사회 참여적인 경향의 미술가들과 작품들은 있었지만, 무엇보다 이것은 민족미학 이론의 틀을 가지고 현실세계에 반응하는 최초의 움직임이었다.

 


오윤 <지옥도>, 유채, 1981, `현실과 발언` 창립전 출품


당시 스물 한 두 살에 불과했던 오윤과 임세택은 그들이 가졌던 의욕에 비해 기량의 부족을 뼈저리게 느꼈다고 한다. 하지만 아직 습작 시기를 벗어나기 힘든 나이에 그들이 제기한 미학적 문제들을 작품에서 구현하기란 사실 어려운 일이었다. 오히려 주목할 것은 그들의 동인(그룹) 의식이 당대의 상황에서 가능했다는 점이다. 미술계의 주류는 여전히 국전의 아카데미즘에 매몰되어 있고 새로운 조류인 앙포르멜이라 불리는 추상표현주의 운동 정도가 대세였던 시절이다. 문학이나 연극에 비해 현실의 상황을 쉽게 반영하기가 힘든 것이 미술이다. 유장한 서사적 서술로 구성된 소설이나 언어의 날카로운 상상력으로 구성된 시와 달리 미술은 달랑 시각이미지 하나만으로 모든 것을 구현해 내야 하는 차이의 간극이 컸던 것이다.
미술계의 고답적인 풍토는 결국 이들 현실동인의 역사적인 전시회를 무산시키고 만다. 포스터를 붙이고 선언문을 돌리던 오경환이 서울미대 학생과와 교수실로 불려가 경위를 추궁 당했다. “교수들은 선언문 내용보다 도록(圖錄)에 있는 여러 점의 그림들이 북한 그림이나 동구(東歐) 그림과 똑같다고, 반체제(反體制)요, 반미술적(反美術的)이라고 야단 야단, 흥분한 나머지 네 사람의 부모에게 전화로 큰 불상사(不祥事)나 난 듯이 떠들어대고 중앙정보부에 그대로 찔러 버린 것이다. 강명희를 제외한 세 사람이 붙들려가 중앙정보부에서 하룻밤을 자고 나서 훈방되었고 그림은 모두 압수되었다.” (김지하, 위와 동일)
주모자 격이었던 오윤은 소설가였던 부친 오영수에게 크게 꾸지람을 듣게 되는데 그 일화는 오윤의 사람됨을 알 수 있게 한다. “김지하 같은 좌익 성향의 사람은 배후 조종만 일삼고 정작 일선에서는 뒤로 빠지고 만다.”는 부친의 말에 오윤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아버지도 예술가고 나도 예술가요. 각각의 예술가에게는 자기 예술과 자기 생활이 있습니다. 그 사람을 모욕하지 마십시오. 나는 그 사람을 존경합니다. 만약 그것을 간섭하겠다면 나는 내 예술을 포기합니다. 예술이 없는 내 인생은 죽음입니다. 그 죽음을 선택하지요. 만족하십니까?” 그리고는 말을 끝내자마자 날카로운 작업도로 그림들을 그 자리에서 몽땅 찢어버렸다고 한다. 1969년의 <현실동인> 전은 그렇게 끝나고 말았다. 남은 것은 말(현실동인 선언)뿐이었다. 그러나 그 말은 씨가 되어 1980년대를 풍미한 민중미술운동을 꽃피게 한다.
 


강요배<새뚝이>, 하드보드지에 아크릴릭, 38*50cm, 1990

촛불로 시작한 민중미술의 여명

 

‘현실을 미술로 발언하겠다’는 현실과 발언의 창립 취지문은 사실상 현실동인 선언의 세례를 받고 태어났다. 한동안 그림을 뜸하게 대했던 오윤이 다시 새로운 작가들과 합류했다. 프랑스 유학에서 귀국하여 새로운 바람을 넣었던 미술평론가 성완경과 김지하의 후배인 최민, 미술기자 출신의 윤범모 그리고 작가들은 김용태, 김정헌, 민정기, 임옥상, 주재환, 권순철, 강요배, 노원희 등이 만났다. <현실과 발언> 전시는 1980년 10월에 처음 열렸지만 이들은 이미 지난 해 10·26 직후 인사동에서 만나 그들의 향방을 가늠하고 있었다.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출발했던 현실동인과 달리 현실과 발언 동인들은 그들의 후배세대들과 서로 격려하면서 집단적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광주의 홍성담, 서울의 김봉준과 두렁, 이철수 등은 현실과 발언의 창립에 고무를 받았고, 또 서로 앞뒤서거니 하며 민족미술의 여명을 밝히고 있었다.

문학이 『창작과 비평』을 통해서 1970년대를 관통하며 성장해 온 것에 비해 미술은 장르의 성격상 대중적이지도, 반응의 폭발성도 없었다. 하지만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고 1980년대의 민족미술은 그렇게 경향각지의 청년작가들이 서로를 발견하며 하나 둘 모이고 있었다.

 

현실과 발언 창립전은 아무튼 촛불전시라는 개막일의 사건을 거치고 3주일 후, 인사동의 동산방 화랑에서 창립전을 다시 열었다. 현실과 발언은 당시로서는 생각하기 힘든 반체제적 성향의 집단적 활동을 선언하였다. 지금이야 세월이 좋아 온갖 잡설까지 떠들어도 아무렇지도 않게 되었지만 5·18을 채 몇 달 지나지 않은 당시로선 있기 힘든 일이었다. 현실동인에 참여했던 김윤수는 이후 이화여대 교수직에서 해직되었고, 김지하는 여전히 감옥에 있었고, 임세택과 강명희는 프랑스 파리에 들어가 살고 있었다.

현실과 발언은 엄밀히 말하자면 민족미학의 구현을 목표로 했던 현실동인과는 조금 달랐다. 훨씬 다양한 표현방법과 함께 소비사회에 대한 비판적 시각(오윤, 김정헌), 민족분단 문제에 대한 발언(임옥상, 민정기), 일상생활에의 발견(민정기, 강요배, 노원희, 김용태) 등 그 주제와 내용에서 당대의 문제에 정면으로 발언하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현실동인이 씨앗을 뿌렸다면 현실과 발언은 그 문제의식의 발언으로 꽃을 활짝 피웠던 것이다.
현실동인 선언 이후 38년, 현실과 발언 창립전도 27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변한 것도 있고 변하지 않은 것도 있다. 41년 전, 김수영 시인의 시평 「변한 것과 변하지 않은 것-1966년의 시」를 보면서 그런 생각이 새삼 들었다. 이른바 ‘예술파’와 ‘참여파’를 동시에 질타한 그의 글에서 아직 세상이 변하지 않은 것이 두드러져 보이는 것은 비단 필자만의 시선일까?

 

글·자료사진 전승보
1963년 부산에서 태어나 런던대학교(골드스미스) 대학원 큐레이터학과를 졸업했다. <아시아의 지금-에피소드> 전, <열다섯마을 이야기> 전, <또 다른 풍경> 전, <2006 아시아미술포럼> 등을 기획했고 현재 독립 큐레이터로 활동하며 대학에서 박물관학과 전시기획론 등을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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