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속 시대 읽기

6월항쟁의 거리로 나온 그림들

 

 
최병수 <한열이를 살려내라> 1987
 

이한열은 1987년 당시, 연세대 경영학과 2학년이었다. 6월 9일, 다음날 열릴 예정인 <박종철 고문살인 은폐 규탄 및 호헌 철폐 국민대회>를 앞두고 6·10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 후의 시위 도중 전투경찰이 쏜 최루탄에 뒷머리를 맞아 한 달 동안 사경을 헤매다가 7월 5일 스물 두 살의 나이에 사망했다. 6월의 그 뜨거웠던 거리는 그렇게 아름다웠던 두 청년의 죽음으로 달구어졌다.


만화사랑에서 만났던 이한열과 최민화


최민화는 1987년 3월 연세대 동아리 ‘만화사랑’의 연락을 받고 지도강사로 나가기 시작했다. 이미 <불법체류자>와 같은 극화만화로 민중만화운동가로 잘 알려졌던 그는 <만화운동이란 무엇인가>라는 특강부터 시작하여 만화와 판화 실기에 이르기까지 그 해 봄 연세대를 드나들며 학생들을 지도하고 있었다. ‘만화사랑’은 대학가에서 처음 만들어졌던 만화동아리로 1986년 이후 경직되어가던 학내 분위기를 보다 대중적으로 이끌어가기 위해 생겨났다.


당시 최민화는 학생들에게 카툰(한 칸 만화)이 아닌 장편만화를 만들어 대중 출판을 통해 반독재 운동에 예술적 기여를 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실제로 ‘만화사랑’은 당시 20~30쪽 짜리 극 만화를 몇 편 만들어 대학가에 보급하기도 했다. 최민화는 이미 그때 그 곳에서 이한열을 만나고 있었다.
저녁 어슷해서야 끝나던 ‘만화사랑’ 강습 멤버들은 매번 신촌 시장 통의 소주 집에서 뒤풀이를 하곤 했다. 이십여 명의 앳된 청년 남녀 대학생들은 밤이 깊어질 때 까지 만화를 통해 사회과학을 이야기했고, 그것이 민주화 운동의 도구로 쓰이길 원했다. 최민화는 그때의 이한열을 기억하고 있었다. “저학년이라 인사 정도만 나누었지만, 참 잘 생겼다라고 생각했고 대학생다운 풋풋한 느낌을 주었다.” ‘만화사랑’에서의 그런 만남이 있었기에 최민화는 그의 소식 앞에 가만 앉아 있을 수 없었다. 그는 곧장 학생회관에 본부를 둔 장례위원회로 찾아갔다. 불과 며칠 전에 있었던 6·29 선언으로 이한열 열사의 발인을 위한 거리 노제가 허용되어졌고 비합법적이었던 많은 것들이 가능하게 된 상황이었다. 장례위원회에서 그는 한달음에 이한열 ‘부활도’의 의미와 대중적 파급력의 필요성을 이야기했다. 마침내 발인 전날 오후 7시 무렵이 되어서야 장례위원회의 허락을 받고 최민화는 곧장 집으로 돌아왔다. 부리나케 몇 가지 연장과 화구를 챙겨들고 다시 학생회관으로 돌아왔지만 학생회관의 로비와 주변은 사람들로 북적거려 그림 그릴 공간조차 찾기 힘들었다. 두리번거리다가 한 건물 로비가 비어있어 들어갔는데, 마침 이한열이 다녔던 경상대 건물이었다. 이한열 열사를 위한 <그 대 뜬 눈으로>는 결국 이 열사가 공부하던 그 장소에서 그려지게 되었다.
 


 
최민화 <그대 뜬 눈으로> 1987

최민화는 바로 그 얼마 전 <한열이를 살려내라>를 그렸던 후배 최병수에게 가능한 그림 틀을 크게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목공 일에 익숙했던 최병수가 나무 틀을 짜고 텐트 천을 덧 씌었다. 저녁 10시경이 되어서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화면의 크기가 만만치 않아 (가로 7미터 세로 2.3미터) ‘만화사랑’ 학생들이 옆에서 도와주기 시작했다. 새벽이 깊어가면서 하나 둘 학생들은 지쳐 떨어져나가고 최민화 화백 혼자 남게 되었다. 그때 마침 그 옆을 지나가던 제자 최금수를 불러 세워 마무리를 하게 했다. 그림은 이렇게 주필과 보조 가릴 것 없이 여러 사람들의 긴박한 상황 인식에 의한 자발적 동참으로 완성되었다.
다음날 아침, 이한열 열사 부활도 <그대 뜬 눈으로>는 연세대를 출발하는 노제 추모객들의 중심에 우뚝 서있었다. 청년 열사의 죽음이 불러온 수많은 군중들은 그림을 통해 지금 이 거리의 이슈가 무엇인지 한순간에 느낄 수 있었다. ‘만화사랑’에서 이한열 열사를 가르쳤던 최 화백은 이 열사를 보내면서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물을 한 셈이 되었다.
서울시청 앞 노제가 끝난 후 자연스레 시위로 전환되면서 추모객들이 시위대로 바뀌기 시작했다. ‘전두환, 노태우 처단’ ‘청와대로 가자’와 같은 구호들이 나오면서 이한열 부활도 <그대 뜬 눈으로>가 선두에서 시위대를 이끌어 갔다. 전경들은 동아일보 앞 광화문 사거리를 마지노선으로 삼고 시위대를 막았는데, 당시 한국일보의 사진기자가 <그대 뜬 눈으로>가 파손되는 현장을 카메라로 잡았다. 사진을 보면 그림을 앞세우고 광화문으로 진출하던 시위대와 전경이 그림을 뺏기 위해 몸싸움을 하던 도중 경찰의 최루탄 발포와 함께 장갑차가 바닥에 떨어진 그림을 밟고 지나간다. 그림이 파손되는 현장을 목격한 유일한 사진이었다.
최 화백은 그 이후 몇 번 더 작품이 파손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1987년 10월 건대항쟁 기념비 제작이 그것이다. 건국대 교정 안에 청동으로 된 투사 상을 초벌 드로잉 하여 후배들이 소조를 뜬 작품이며 함께 만들어진 기념부조는 요즘 세계적 작가로 유명해진 이불의 작품이었다. 이 작품들은 바로 기념식 날 새벽에 전경 2개 중대가 대형 크레인을 앞세우고 들어와 철거되고 말았다. 이미 경찰의 작품 철거 소문이 교내에 돌아 학생들이 심야 경비를 했지만 막무가내로 들어오는 중장비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이렇게 1987년 6·29 선언 이후 민주화 운동이 대중적으로 급성장하게 되면서 탄압 또한 증가하고 있었다.


 
최민화 <기러기> 캔버스에 유채, 1990

이후에도 최 화백은 강경대 열사와 김귀정 열사의 추모 영정도 그리게 되는데 그림의 내용이 문제되기 보다는 대중공간으로 진출한 그림들이 지니는 파급력이 문제였었다. 최 화백은 1960년대 일본의 전공투도 이른바 찌라시(전단지) 수준에서 그림을 사용했고 프랑스 6·8 학생혁명 때에도 마오쩌뚱의 얼굴 정도가 등장했던 것이 시각 이미지의 전부였다고 한다. 이에 비해 한국의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등장한 시각 이미지들은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다양했고 그 폭발력이 대단했다. 비록 시위 현장에서 원작이 없어지면 시각 이미지의 힘도 소멸하고 말았지만 그것이 등장하고 안하고는 시위 현장의 분위기가 달라지는 일이었다. 아무튼 최 화백은 이한열 부활도의 파손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시위 현장에 시각 이미지가 나오는 것은 이미 그 목적이 있다. 작품들을 보전하는 것은 두 번째 문제이다. 한열이를 보내면서 내 그림도 함께 보낸 것에 나는 불만이 없다.”

또 하나의 그림

 

최병수의 <한열이를 살려내라>는 6월항쟁의 상징이었다. 1980년대 민중미술이 말 그대로 민중작가였던 그를 화가로 만들었고, 그는 이 땅의 민중들에게 6월항쟁의 상징 이미지를 만들어 주었다. 걸개그림 <한열이를 살려내라>는 지금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의 소장품이 되었다. 세월이 지나면 산천이 변한다더니 ‘6월 항쟁에 대한 기억’이 역사가 되었고, 집회현장의 무기로 쓰였던 것이 이젠 예술이 되었다.

 


 
최병수 <야만의 둥지>2003
이라크 전쟁 직전 현지에 들어간 최병수와 현지 주민들과의 퍼포먼스와 걸개그림

 

최병수는 걸개가 그려지던 때를 이렇게 기억한다. “6월 11일, 로이터 통신의 사진을 중앙일보에서 보았다. 머리에 피 흘리는 이한열 열사를 뒤에서 친구가 부축하고 있는 그 순간의 사진이었다. 갑자기 나는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곧장 그 사진을 오려 들고 연세대 학생회관으로 달려가 연세대 ‘만화사랑’ 동아리 학생들과 밤새워 그려 총학생회 건물 외벽에 걸었다.”
사실 최 화백은 1986년 유연복 화백의 집 담벼락에 그려졌던 그림, 이른바 ‘정릉 벽화 사건’에 연루되어 경찰에 붙들려간 후 본의 아니게 화가가 된 작가이다. 중학교 중퇴 학력의 목수가 불온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면 사건이 복잡해 질 것을 우려했던 경찰의 고육지책이었다. 그 덕택에 그는 화가가 되었고 민중미술 작가들과 어울리면서 6월 항쟁의 현장에 있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한열이를 살려내라>는 우리나라 걸개그림의 효시로 인정되어 현재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되게 되었다.
많은 민중미술 작가들이 현장을 떠나고 민중미술에서도 떠났지만 그는 이제 세계의 현장을 누비고 있다. 남미와 아프리카, 이라크 등 그는 ‘이한열 열사’를 통해 화가로 거듭 태어났었고 민중화가로서의 복무를 지구촌에서 행하고 있다.

글·자료사진 전승보 galleryjun@yahoo.co.kr 1963년 부산에서 태어나 런던대학교(골드스미스) 대학원 큐레이터학과를 졸업했다. <아시아의 지금-에피소드 전>, <열다섯마을 이야기 전>, <또 다른 풍경 전>, <2006 아시아미술포럼> 등을 기획했고 현재 독립 큐레이터로 활동하며 대학에서 박물관학과 전시기획론 등을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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