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속 시대 읽기

루브르에서 추방당했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쿠르베 <화가의 아틀리에> 캔버스에 유채, 369.7*596.9cm, 1855년

 
19세기 리얼리즘의 아버지로 불리는 화가 쿠르베(1819~1877)는 자신의 예술세계에 대해 ‘본질적으로 가장 민주적’이라고 발언하며, 당대의 미술가 중에서 민중의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는 미술가는 자신뿐이라고까지 주장했다. 당시 주류였던 신고전주의 미술이 지닌 고대 로마풍의 교훈과 낭만주의 미술이 가진 서정성에 만족하지 못했던 쿠르베는 ‘보이는 것만이 사실’이라며 신화 속의 영웅들 대신 주변의 평범하고 비천한 삶의 모습을 그려냈다. 당연히 쿠르베의 그림들은 부르주아 계급과 앵그르를 중심으로 한 관학파(아카데미)의 추종자들로부터 거센 공격을 받았다. 그들에게 쿠르베의 그림은 엄숙함과 상상력의 부정이며 낭만의 정신을 거부하는 일상 생활의 세속적인 재현에 불과할 뿐이었다.

운명의 파리 코뮌
 

1871년 3월 18일, 파리는 혁명주의자들 파리 코뮌에 의해 접수된다. 무정부주의자 프루동과 함께 ‘사회주의 화가’를 선언하기도 했던 쿠르베는 파리 코뮌에서 예술위원회 위원장직을 맡았다. 하지만 두 달여에 불과했던 파리 코뮌 통치기간은 폭발하는 민중의 요구를 감당할 수 없었다. 위원장직을 불과 얼마 후에 사임하고 말았지만 쿠르베는 파리 코뮌을 대표하는 예술가였다. 그는 파리 코뮌 기간에 일어난 일들에 책임을 져야했다. 그 기간 중에 파리 코뮌은 예술위원회를 통해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들라크르와의 낭만주의 작품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인>을 철거하는 스캔들을 일으켰다. 이때 쿠르베는 루브르 박물관에 관한 책임자였다.

 



들라크르와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캔버스에 유채, 260*325cm, 1830년


작품이 제작되었던 1830년 무렵에는 아직 예술에서의 계급성이라는 미학적 문제는 등장하지 않았던 시절이다. 하지만 코뮌 당시 이제 막 뜨겁게 문학예술에서부터 제기되었던 리얼리즘과 계급성 문제는 들라크르와의 그림에서 부르주아 계급이 주도하는 프랑스 혁명을 발견하게 했다. 무엇보다 그림에서 자유의 여신은 실제 존재하지 않는 공상적인 현실이며, 프랑스의 삼색 국기는 프롤레타리아의 계급성이 아닌 국가적 애국심을 고취하는 것이었다. 사실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은 부제(1830년 7월 28일)에서 드러나듯 루이 필립이 국왕이 된 1830년에 일어난 7월 혁명을 주제로 한 것이다. 또한 쿠르베는 노동의 권리를 주창했던 1848년 2월혁명에 가담한 후, 수 년 동안 제 2제정의 반동적 미술 당국을 상대로 싸우기도 한 전력이 있었다. 들라크로와의 편지에서도 드러나지만 들라크르와는 7월혁명을 정치적인 입장에서 보기보다는 애국심의 발로에서 이 작품을 제작했다. 그가 형 샤를 앙리에게 보낸 1830년 10월 18일자 편지는 “나는 현대적인 주제, 즉 바리케이트 전(戰)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조국의 승리를 위해 직접 나서지는 못했었지만 그래도 조국을 위해 이 그림을 그리고 싶습니다.”라고 쓰여 있다. 오늘날에는 프랑스의 민주주의 혁명을 상징하는 그림이 되었지만 당시 파리 코뮌이라는 노동자 정부의 입장에서 보자면 달가울 수가 없었다.
쿠르베는 파리 코뮌의 여러 과격한 행위들에 놀라 결국 예술위원장직을 5월 2일 사임했지만, 파리 코뮌은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의 승전을 기념하는 방돔 궁전의 기둥을 없애기로 의결하고 5월 16일 파괴하였다. 그러나 파리 코뮌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5월 28일 나폴레옹 3세를 지지하는 베르사유 군에게 무너지게 된다. 6월 7일 쿠르베는 친구의 집에서 체포되었다. 그는 파리 코뮌 책임자의 일원으로 군사법정에 오르게 되었다. 실제 기둥을 파괴하고 지시했던 사람들은 모두 영국으로 피했지만 쿠르베는 코뮌에서의 책임을 피할 수 없었다. 쿠르베는 종종 그 기둥이 상징하던 군국주의의 전쟁과 제국주의에 혐오감을 나타내었기에 선동자로 고발되었던 것이다. 쿠르베는 6개월 형과 500프랑이라는 가벼운 벌금형을 받았다. 그러나 그를 도왔던 공화국 임시정부의 수반이었던 티에르가 1년 후(1872년) 사임하자 나폴레옹 황제를 지지하는 의회의 의원들은 다시 재판을 열어 쿠르베에게 그 기둥의 재건축에 드는 비용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쿠르베의 전재산과 그의 그림 모두가 압류되었다. 벌금형 또한 금화 323091.68 프랑이 내려졌다. 그는 정치적으로 뿐만 아니라 재정적으로도 완전한 파산의 상태에 빠져들었다. 결국 쿠르베는 프랑스를 떠나 1873년 7월 국경선을 넘어 스위스로 망명하여 1877년 쓸쓸하게 죽음을 맞게 된다.

 


쿠르베 <오르랑의 매장> 캔버스에 유채, 315*668cm, 1850년


사실주의의 아버지, 쿠르베

 

쿠르베를 평가하는 것에 그의 그림만큼 좋은 것은 없다. 하지만 당대의 화가들 가운데 보기 드물었던 그의 정치적 신념은 그를 종종 과대 혹은 폄하시키기도 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그의 사실주의 미술론이다. 이미 대가로 인정받았지만 쿠르베의 사실주의 미술이 당대의 열악했던 노동자 계급들에 대한 연민과 관용에서 비롯된 사실을 무시하고 사회주의자로서의 사상으로 그의 미술을 평가하는 것이다. 실제로 그의 작품은 후세대의 화가들에게 새로운 기법보다는 완전히 새로운 예술관을 제공했다. 즉 그림의 목적은 현실을 정확하게 모사함으로 현실 세계를 반영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쿠르베는 회화에서 인위적인 이상주의와 아카데미즘의 낡은 양식들을 없애 버렸다. 그가 말한 사실주의(리얼리즘)란 자연주의적인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린다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현실`을 그린다는 뜻이었다.
쿠르베의 작품이 지탄의 대상이 된 것은 1849년부터 시작된다. 그 해 쿠르베는 파리에서의 피곤한 생활을 벗어나 오르낭에 있는 그의 고향집에 내려가 있는 동안 두 점의 그림을 그렸다. <돌 깨는 사람들>, <오르낭의 매장>이 그것이다. 중노동을 하는 사람들과 서민의 일상을 사실 그대로 표현한 이 작품은 우리에게 당시 사회에 있어서의 갖은 폐단들을 보여준다. 후대에 있어서 사회 풍자적인 성격으로 인식되는 작품들은 그의 회화에 대한 신조인 “회화는 구체적인 미술로서 실제 사물이나 현실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성립된다.”로 대변할 수 있다. 보이지 않는 교회의 천사나 그리스 신화의 영웅보다는 이웃에 살던 농부의 죽음이 그에겐 더 큰 사건이었다. 그의 고향 마을 농부의 죽음을 그린 <오르낭의 매장>을 보고 사람들은 ‘물감이 아깝다’며 욕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쿠르베는 무엇이 진정한 역사적인 풍경화인가라며 반문한다. 쿠르베는 “역사는 영웅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소시민들의 사소한 일상으로 이루어진다.”고 일갈했다.
“풍경화를 간단하게 그릴 수 있다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풍경을 그리는 사람들이 과연 그 풍경에 대해서 얼마나 많이 알고 그리는가.” 쿠르베는 수많은 작품을 통해 고향의 거리와 풍경, 주변 사람들을 그림 소재로 등장시켰다. 톨스토이의 말처럼 “우주를 보려거든 먼저 네 마을을 보라”고 했던가. 쿠르베는 고향마을 오르낭이라는 작은 우주를 통해 사회를 그려냈다. 쿠르베는 일상에 산재한 모든 장소와 사물들의 이야기를 그려야 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쿠르베 <잠자는 두 여인> 캔버스에 유채, 135*200cm, 1867년

사실주의자의 눈으로 본 여성성

 

쿠르베의 작품은 다양했다. 수많은 초상화와 풍경화를 통해 현실을 바라보게 한 것도 있지만, 생생한 누드화를 통해 여성미를 찬양하기도 했다. 쿠르베의 작품 가운데 <세계의 기원>은 누워 있는 여성의 음부만 부각시켜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이전의 다른 화가들이 그린 여성의 누드에는 여성의 육체 그것보다는 남성의 눈으로 바라보는 관능적인 여성이었다. 오히려 여성의 음부는 가려져있고 보다 교태스러웠다. 그렇다면 쿠르베는 인간의 육체가 미술에서 제대로 그려진 1980년대 보다 적어도 1백년은 더 거슬러 올라가 인간의 육체성을 말하고 있는 셈이다. 실제로 남성의 감정이 배제된 눈에 보이는 대로 왜곡 없이 묘사된 그의 여성 육체는 시대를 앞선 인간의 육체에 대한 재발견인 것이다.
<잠자는 여인>이란 제목의 그림 또한 동성애를 바라보는 사실주의자의 눈길을 느끼게 한다. 19세기 당시 문학작품에 유행하던 동성애를 다룬 이 그림은 비단 커튼이 쳐진 침실 풍경과 사랑을 나눈 후에 잠이 든 두 여자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당대에도 동성애는 일상화 되어 있었지만 은폐되고 있었다. 쿠르베는 그것을 과감하게 표현했다.
쿠르베의 눈으로 그려진 19세기의 동성연애에서 개인의 성적 취향이란 인간의 권리를 보았다면 그것은 필자만의 지나친 안목일까?

 

글·자료사진 전승보 1963년 부산에서 태어나 런던대학교(골드스미스) 대학원 큐레이터학과를 졸업했다. <아시아의 지금-에피소드 전>, <열다섯마을 이야기 전>, <또 다른 풍경 전>, <2006 아시아미술포럼> 등을 기획했고 현재 독립 큐레이터로 활동하며 대학에서 박물관학과 전시기획론 등을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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