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속 시대 읽기

재야 가수 아닌 진짜 가수가 될 겁니다, 포크가수 손병휘

   

 
포크가수 손병휘(40). 많은 이들에겐 그의 이름이 생소할 법하다. 이른바 그는 무대보다는 거리에서 주로 노래해 온 ‘운동권 가수’다. 라디오나 텔레비전에서 그의 노래를 틀어주거나 섭외하는 일은 거의 없다. 방송에 출연하는 일도 거의 없다. 그는 지금까지 무대보다는 거리에서 다양한 계층의 시민들을 만나왔다. 하지만 요즘은 그것도 예전만큼 녹록치 않다. 제도적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그를 찾는 이들도, 거리에서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기회도 줄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기타와 노래로 세상과 소통하며 꾸준히 자신만의 음악세계를 만들어왔다.
‘조국과 청춘’과 ‘노래마을’ 활동에 이어 1999년 솔로로 전향해 지금까지 1집 <속눈썹>, 2집 <나란히 가지 않아도>, 3집 <촛불의 바다-전쟁과 평화>에 이어 올해 낸 4집 <삶86>까지 모두 넉 장의 앨범을 냈다. 그는 “<삶86>은 6월항쟁 20년을 맞아 자신을 비롯한 386세대에게 띄우는 격려의 메시지를 담은 의미 있는 앨범”이라고 했다.“저와 제 또래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싶었어요. 우리 세대가 자랑스럽기도 하고, 한심하기도 하죠. 정계에 진출한 이들 때문에 386세대가 욕을 먹기도 하지만, 사회 각 층에서 묵묵히 살아가는 이들이 더 많아요. 올해 6월항쟁 20년이라고 들썩였는데, 기념보다 중요한 것은 계승과 실천이라고 봐요. 음악으로 풀어낸 저의 작은 화답이라고 할까요?”


“베레모는 제 트레이드 마크입니다.”

그를 만난 건 서울 신사동에 위치한 5평 남짓한 소박한 작업실이었다. 작업실에는 신시사이저 1대와 기타 4대, 오디오 등 음악 작업을 위한 도구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벽면에는 엘피판과 시디, 책들이 가득하다. 그리고 손님 접대용 소파 1대. 정말로 발 디딜 틈이 없는 아담한 공간이다. “그래도 강남(?)에 작업실이 있으시네요?”라고 물었더니, “의외로 쌉니다. 전세 3천 5백만 원이에요.”(웃음)
작지만 이 곳은 주옥같은 그의 노래들이 만들어지는 곳이다. 그는 평소 하루 일과의 대부분을 이 곳에서 보낸다. 그가 좋아하는 비틀스의 음악을 듣기도 하고, 곡을 쓴다. 가끔은 이곳에서 지인들과 함께 모여 대화를 나누거나 술자리를 갖기도 한다. 김혜린의 만화책 『북해의 별』 시리즈도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차도 없고, 운전면허도 없어요. 가끔 술값은 쓰지만 음악 하는 사람이 음악을 위해 쓸 수 있는 부분이 최소한은 있어야 하겠더라고요. 『북해의 별』은 만화 자체는 순정인데, 그 안에 혁명이 녹아 있어요.”
다만, 이곳에서 할 수 없는 것은 큰 소리를 내는 일. 다세대 주택인 탓에 노래연습은 ‘절대 불가’다. 하지만 그는 인터뷰를 하러 찾아간 날, 라이브로 노래를 불러줬다. “가을엔 꼭 이 노래를 부르고 싶다.”며 박인환의 시에 이진섭씨가 작곡한 ‘세월이 가면’을. “사람에겐 가끔 청승이 필요할 때가 있어요.”(웃음)
이날도 그의 머리 위엔 무대에 설 때처럼 베레모가 씌워져 있었다. 트레이드 마크다. 평소에는 동네 아저씨 1, 2, 3처럼 다니지만, 무대를 비롯해 공식적으로 외출할 일이 있을 때는 대부분 모자를 쓴다. “나이는 어쩔 수 없어요. 머리카락이 자꾸 빠져서 가리려고요.” 어느덧 그의 나이 마흔, 젊지 않은 나이. 목소리는 20년 전과 달라진 게 없지만, 흘러가는 시간은 어쩔 수 없나 보다.

 


  ‘민중가요’의 명맥 잇는 보기 드문 가수

그의 모든 음반은 자비를 털어 만든다. 한 번 만드는 데 1천만 원 이상의 비용이 들어간다. 그래서 음반은 만들 비용이 모아졌을 때 낸다. 또한 그는 가수인 동시에 작사·작곡·편곡가이자 매니저, 홍보담당자다. “1인 5역을 하고 있어요. 5종 경기를 하는 셈이죠. 노래 만들고 난 뒤엔 녹음을 하고, 음반이 나오면 직접 음반을 들고 방송사와 신문사를 돌아다니죠. 하지만 별로 반응이 없어요. 시간이 갈수록 무관심이 점점 더 심해져요.”(웃음)
이번에 <삶86>을 내고는 과로 때문에 디스크 수술을 받았다. 애착이 남다른 앨범이었지만, 음반 홍보뿐 아니라 활동도 맘껏 할 수 없었다. 음반 판매 성적은? 아쉽지만, 역시나 저조하다. 사실 번듯한 소속사나 매니저 없이 활동하는 그에게는 음반을 제대로 알릴 수 있는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히트곡을 내는 건 내 손 밖에 있는 것이잖아요. 어쩔 수 없죠. 처음부터 대중적 성공을 바란 게 아니라 1980년대 민주화운동의 연장선상에서 택한 거니까요.”


그는 고려대 산업공학과 86학번이다. 그 역시 4집 수록곡 ‘그때를 아시나요’ 가사처럼 1987년엔 “종로, 명동, 을지로, 퇴계로 혹은 학교 앞, 시청 앞에서 백골단과 맞장을 떴다.” 하지만, 그가 음악을 선택한 건 군대를 제대한 뒤인 1992년 대선을 앞두고 열린 학내 거리문화제에 참여하면서부터다. 이를 계기로 “음악을 갖고 열심히 살아보자”고 마음먹었다. 그래서 선택한 팀이 ‘조국과 청춘’에 이어 ‘노래마을’이었다. “사실 노래마을 진출이 1순위였어요. 싱어 송 라이터의 모임이었으니까요.”
그는 1999년 솔로로 독립한 뒤, 안치환, 연영석, 박창근, 서기상 등과 함께 민중음악적인 색깔을 간직하고 있는 몇 안 되는 가수로 활동해오고 있다. 2002년 월드컵과 대통령 선거, 2004년 이라크 파병 반대와 고 김선일 씨 추모 행사, 대통령 탄핵 반대,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를 위한 콘서트 등에 빠짐없이 참석해 왔다. 지금도 한일 프로젝트그룹인 ‘삶·뜻·소리’에서 음악감독을 맡고 있다. 또 김현성, 손현숙과 함께 만든 프로젝트 그룹 ‘혜화동 푸른섬’ 멤버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대중들은 ‘민중가수’ 하면, 히트곡이 여럿 있고 간간히 방송도 나오는 ‘안치환’이나 ‘노래를 찾는 사람들’을 먼저 떠올린다.
“우리는 언제나 넘버 원, 금메달만 기억하잖아요. 20대였다면 질투도 하고 부러워도 했을 텐데, 지금은 안치환 같은 음악 동료가 있고, 그 동료가 사랑과 존경을 받는 게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여기고 있죠. 진보진영뿐 아니라 대중들도 많이 좋아하니까요. 치환이 형한테 종종 술도 얻어먹을 수 있고요. 대신 넘버 원 만 있는 게 아니라 넘버 투, 넘버 쓰리도 있다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어요. 올림픽에서 은메달, 동메달 딴 것만 해도 얼마나 잘 한 건데요.”




12월 단독 콘서트에
도움주신 분 많이 모시고 싶다

그가 지금껏 노래를 할 수 있었던 데는 부인의 공이 컸다. “음악을 하려면 라면을 먹으며 혼자 하거나, 돈버는 아내를 두던가 해야 해요.”(웃음) 그래서 그는 “음악을 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깨닫고 있다.”고 했다. 부인은 항상 그에게 “자기 자신을 버리지 않으면 괜찮다.”며 음악활동을 하는 데 있어 든든한 후원을 해준다. 음악을 하게 해줘서가 아니라, 21살 때 만나 결혼에 골인한 부인한테는 항상 고마움과 사명감을 느끼고 있단다. “전 가수 생활 10여 년 동안 히트곡도 없지만, 스캔들도 없었어요.”(웃음)
용돈까지 받아쓰는 것은 아닐까. 다행히 본인의 용돈 정도는 스스로 해결할 정도의 여유는 있다고 했다. 다만, 생계를 꾸리는 데는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
중학교 1학년인 그의 아들은 ‘가수 손병휘’를 얼마나 자랑스러워할까. “평소엔 별 반응이 없어요. 가수 아빠에 대한 얘기를 나눠준 적도 없고요. 그런데 우연찮게 콘서트장에서 제 노래를 다 따라 부르고 있는 것을 봤어요. 그 뒤 ‘기타 배우고 싶은 맘 있냐?’고 물어봤더니, ‘없다’고 하데요. 아빠 노래는 불러도 음악에는 관심이 없는 것 같아요. 하긴 저도 그때는 음악에 뜻을 품지 않았어요. 고등학교 때부터 관심을 가졌으니까요.”

 


`진짜 실력있는 가수`로 남고 싶다는 가수 손병휘. 그의 소망은 앞으로도 게속 노래를 부르며 대중을 만나는 일이다.

 

 

친구나 선·후배의 부와 명성, 사회에서 각자 제 역할을 찾아가는 것을 보고, 가수가 된 것을 후회한 적은 없었을까. 그의 대답은 단호했다. “음악을 하기 때문에 단조롭다고 느꼈다거나, 선택을 후회한 적은 없어요. 오히려 음악 외적인 동료들을 많이 만나는데, ‘음악 할 자격도 안 되는 놈이 음악 하는 게 아닐까’하고 반문할 때가 더 많아요. 역량이 모자란다고 느낄 때도 있고요. 음악을 하면 경제적인 어려움은 있지만, 오히려 할 수 있을 때까지 음악을 해야 하는데, 음악시장이 워낙 안 좋아서 어쩔 수 없이 음악을 포기해야 할 때가 오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도 있어요.”

그의 소망은 앞으로도 계속 노래를 부르고, 동시에 음악적으로 인정받는 것이다.
“음악에 방점을 찍고 무차별적으로 대중을 만나고 싶은 욕심이 있어요. ‘재야인데, 잘 하네’보다는 ‘진짜 실력이 있는 가수’라는 말을 듣고 싶죠. 가사에 대한 반감은 어쩔 수 없지만, 음악적인 언어만큼은 ‘가수’로 인정받고 싶어요.”
그는 다음달 7일(금), 8일(토) 이틀 동안 한국불교역사문화관에서 모처럼 만에 단독 콘서트를 연다. 고려대 86학번 운동권 계모임인 만세회 친구들이 “힘을 모아보자”며 그를 위해 몰래 ‘콘서트 공연 추진위원회’를 만들어 이 자리를 만든 것이다. “신세를 진 분들이 많아요. 음반이 나올 때마다 사주시는 분들도 있고요. 콘서트 때 이렇게 제게 여러모로 도움을 주신 분들을 많이 모시고 싶어요. 많이 오세요~.”


 

김미영 한겨레 기자 kimmy@hani.co.kr

사진 황석선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홍보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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