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속 시대 읽기

자신만의 목소리로 영혼을 노래하는 재즈가수 나윤선

 

‘재즈’ 하면 떠오르는 것은? 넉넉한 웃음에 풍채 좋은 가수. 그리고 이 가수의 목소리를 타고 흐르는 허스키한 중저음의 탁한 선율일 테다. 그래서 재즈는 듣는 이에게 지나간 ‘옛사랑’의 추억을 끄집어내고, 눈가에 촉촉한 이슬이 맺히게 하는 힘을 가졌다고 한다.
재즈가수 나윤선(38). 그는 이런 상식에서 한 발짝 비켜서 있다. 체구가 왜소하며 목소리가 가늘고 톤이 높다. 도통 재즈와 어울리지 않는 목소리다. 그 역시 “재즈가 우연히 찾아왔고, 그래서 언젠가 우연히 떠나도 잡을 수 없을 것 같다.”고 했다. 이렇게 겸손할 수가!
그는 프랑스 언론으로부터 “환희가 사라진 음악세계에 나타난 너무나 매력적인 목소리”라는 극찬을 받은 재즈 뮤지션 아닌가.
그래서 그에겐 한국보다 유럽에서 더 유명한 재즈보컬이라는 꼬리표가 늘 따라붙었다. 하지만 그는 올해 그런 수식어를 떼려고
작정한 듯하다. 어느 해보다 더 왕성하게 국내 활동을 펼쳤다. 올 4월 팝 음반 <메모리 레인(Memory Lane)>을 냈다.

지난달부터는 대전, 부천 등지의 문예회관을 도는 ‘팝 프로젝트 콘서트’를 성황리에 이어가고 있다.
이달 20~21일에는 세종M시어터(구 세종문화회관 소극장)에서 ‘나윤선의 Another Christmas’ 콘서트도 예정돼 있다.


재즈는 소주나 막걸리와도 어울리는 음악

“재즈는 소수의 마니아들만 듣는 음악이 아니에요. 서양음악이지만 정서적으로는 한국에 더 가깝죠. ‘있는 사람들의 음악’ ‘와인과 함께 듣는 음악’이라고들 하는데, 그렇지 않거든요. 소주나 막걸리 마시면서도 들을 수 있는 보편적인 음악이 재즈죠.”
나윤선에게 재즈는 ‘모든 것’이다. 그래서 늘 같은 모습이 아니라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진 모습으로 새로움을 선사해야 한다는 일종의 의무감을 느끼고 있다. ‘나윤선표 재즈’는 꾸준히 변화하고 새로워야 한다. 올해 낸 <메모리 레인>은 바로 그 노력의 결정체다. 조동익, 하림, 김정렬 같은 국내 포크 계열 작곡가들의 서정적인 곡들을 처음으로 한국말로 녹음했다. 그의 목소리를 타고 흐르는 ‘세노야’ 선율을 듣자면, 어렵고 멀게만 느껴졌던 재즈가 귀에 착착 감겨온다.
“새로운 도전을 하고 싶었어요. 재즈가 늘 무언가에서 벗어나 있는 음악이기도 하구요. 재즈와 팝의 결합은 다양한 음악을 하려는 제가 거쳐야 할 통과의례일 수밖에 없었죠. 재즈냐 팝이냐. 대중성을 가미해 돈을 벌려고 한다거나 하는 비판도 있었어요. 하지만 전 우리나라의 주옥같은 곡들을 외국에 선보일 필요가 있다고 믿고 있어요.”
그의 변신에 많은 이들이 ‘변심’이라고 우려했음은 당연하다. 하지만 그의 실험은 일단 성공했다. 재즈의 대중화와 한국적 재즈의 새로운 표준을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았다. 서울 홍대 인근에 있는 녹음실에서 만난 그에게서 자신감을 읽을 수 있었다.
“사실 한국적이거나 대중적이라는 것, 장르를 구분 짓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어요. 제가 부른 ‘세노야’에 의외로 서양인들이 더 매료되고 유럽 뮤지션들이 ‘음악이 너무 좋다’고 하는 것처럼 말이에요. 음악이 달라졌다고 해서 재즈라는 제 음악적 토대가 모두 사라지는 것도 아니구요.”

 


“새로운 도전을 하고 싶었어요. 재즈가 늘 무언가에서 벗어나 있는 음악이기도 하구요. 재즈와 팝의 결합은 다양한 음악을 하려는 제가 거쳐야 할 통과의례일 수밖에 없었죠. 재즈냐 팝이냐. 대중성을 가미해 돈을 벌려고 한다거나 하는 비판도 있었어요. 하지만 전 우리나라의 주옥같은 곡들을 외국에 선보일 필요가 있다고 믿고 있어요.”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을 통해 음악과 만나

그의 어릴 적 꿈은 교사였다. 다만 대학(불문과)을 졸업한 뒤 교사가 아닌 평범한 직장인의 길을 선택했을 뿐이었다. “선생님이 맞지 않을 것 같아서…….” 하지만 직장 생활도 오래가진 않았다. 회사 홍보실에서 카피 쓰는 일이 어려워 그만두기까지 고작 8개월이 전부다.
“1년 가까이 백수생활을 했는데, 이때 제 친구가 ‘노래하라’고 조언했어요. 클래식이 아닌 대중가요를 부르라는 것이었죠.” 평소 라디오도 많이 들었고, 어린 시절 반에서 늘 꼽히는 노래 잘하는 아이였으니, 어쩌면 그에게 ‘음악’은 가장 잘 어울리는 옷이었을 터. 망설이는 그를 위해 이 친구가 대형사고(?)를 쳤다. 대학교 재학 시절 친구들과 장난삼아 만든 데모 테잎을 <지하철 1호선> 제작자 김민기 씨한테 보냈고, 김민기 씨의 추천으로 1994년 <지하철 1호선>에 합류하게 된 것이다. 평범한 직장인 나윤선이 뮤지컬 배우 나윤선이 되는 순간이었다.
뮤지컬 배우로 스포트라이트를 받던 시절, 그는 과연 뮤지컬 배우에 만족했을까. 절대 아니다. 13년 전 그가 선 첫무대는 소극장이었고, 첫 작품인 <지하철 1호선>에서 맡은 연변처녀 역이 주인공이었지만, 연기보다 노래 비중이 높았다. 일인다역으로 무대를 누비는 배우 설경구나 방은진을 볼 때 주눅이 들 수밖에 없었다. 이후 정명훈 씨가 지휘하는 환경음악극 <오선월드> <번데기> 등 두 편의 뮤지컬에 더 출연했지만 결과는 같았다.
“모두 연기력보다는 노래를 주로 부르는 역할이었어요. ‘뮤지컬 배우는 내가 갈 길이 아니구나’ 라는 생각만 더욱 확고해졌죠.”
그가 본격적으로 음악을 한 건 스물 일 곱 살 때인 1995년이다. 늦어도 한참 늦었다. “그나마 내가 잘 할 수 있는 게 노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누구에게도 떠밀리지 않고 그는 그만의 음악을 찾아 스스로 프랑스 재즈학교(CIM)로 유학을 떠난다. 학교에서 재즈를 배우면서 샹송도 함께 배울 요량이었다.

 

 

“음악에 관해 아는 것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미래에 대한 두려움 없이 용감하게 유학을 감행할 수 있었어요. 처음엔 샹송에 관심이 더 많아 2년 정도 공부를 따로 했는데, 샹송은 배우면 배울수록 감수성과 정서에 대한 이질감만 커졌어요. 반면 재즈는 사랑 얘기를 다뤄서인지 감정적으로 교감이 느껴졌죠.” 그가 ‘재즈 가수’로 방향을 선회한 가장 큰 이유다.
물론, 재즈를 향해 가는 길 역시 쉽지만은 않았다. 가장 먼저 목소리가 고민이었다. “미성이고, 톤이 높아 흑인들의 스윙감이 안 생길 것 같았어요. 허스키한 목소리를 내기 위해 담배를 하루 5갑 피워야 하느냐, 소리를 질러야 하느냐고 선생님께 여쭤봤죠. 선생님은 네가 가진 목소리로 얼마든지 재즈를 할 수 있다고 격려해 주셨어요. 저처럼 가녀린 목소리로 노래하는 유럽 쪽 재즈 보컬도 들려주셔서 자신감을 얻게 됐죠.”
‘늦게 배운 도둑질에 밤새는 줄 모른다’는 말은 바로 그를 두고 한 말일까. 그는 프랑스 재즈학교 외에 컨서버터리, 폴리포니학교 등의 학교를 더 다니며 음악에 대한 깊이를 더했다. 친구들과 ‘나윤선퀸텟’이라는 밴드를 만들어 틈틈이 공연도 했다. 조금씩 입소문이 퍼졌고 <르몽드> 같은 유명한 언론에 소개되기도 했다. 여러 유수의 재즈 콩쿠르에서 수상도 했다.

 

  “노래를 좋아했지만 ‘가수 나윤선’은
상상도 못했던 일”

“사실 전 매우 교과서적인 사람이에요. 프랑스에서 정식 가수로 나섰지만 무대 앞에 서는 게 편하지는 않았어요. 제가 주목받을 수 있었던 건 아마 자그마한 체구의 동양여자가 부르는 재즈가 독특하게 보여서 그러지 않았을까요? 저도 왜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제 목소리는 이전에 들어보지 못한 소리였다는 분들이 많았어요.”
그는 ‘운이 좋았다’고 했지만, 실력 없이 ‘운’만으로는 그 어떤 것도 얻을 수 없다. 또한 지금의 나윤선이 되기까지 부모님의 든든한 후원도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나영수 한양대 음대 교수이고, 어머니는 뮤지컬 1세대인 성악가 김미정 씨다. 여느 부모라면, 서른을 앞둔 그가 직장생활을 접고, 뮤지컬(음악)을 하겠다고 했을 때 ‘말리는 일’부터 했을 터. 하지만 그의 부모님은 그가 잠재된 ‘끼’를 맘껏 펼칠 수 있도록 항상 격려했다.


“재즈는 ‘새로운 것을 찾는 자유로운 여행’이예요. 그래서 좋아요. 어릴 때부터 전 하지 말라고 하거나, 할 수 없을 것 같은 것이라면 지레 포기하곤 했는데, 재즈를 하면서 ‘해도 되는 것’ ‘할 수 있는 것’을 하지 않은 것이 너무 많다는 것이었어요. 만약 목소리 때문에 재즈를 포기했다면, 지금의 저도 없었겠죠.”
무대에 선 그의 모습은 그래서, 그 누구보다 정열적이고 힘이 넘친다. 수줍은 소녀 같은 평소 그의 모습을 무대에서만큼은 찾아볼 수 없다. 그는 “왜 그렇게 인상을 쓰고 노래하는지 모르겠다.”고 했지만, 그것이 바로 ‘나윤선표 재즈’의 매력이다. 그가 뿌리는 마법을 보고 있노라면, 누구나 빠져들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소원을 물었다. “할 수 있을 때까지 무대에 서는 것”이라고 했다. 예순이 훨씬 넘어서도 30대 최고 전성기 때의 목소리와 색깔을 간직한 영국 재즈가수 노마 윈스턴처럼. “이변이 없는 한 노래는 꾸준히 할 겁니다. 10년, 20년 뒤에도 할 수 있으면 노래를 계속하고 싶어요. 개인적으로 제 목소리에 만족하지 않지만, 다시 태어난다면, 그래도 다시 노래를 하고 싶습니다. 기회만 주어진다면 한국 무대에도 더 자주 서고 싶어요.”


김미영 한겨레 기자
목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