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속 시대 읽기

전성기도 없었고, 한물가지도 않았다. 언제나 최선을 다할 뿐 뮤지컬 배우

  뮤지컬을 모르는 사람도 ‘남경주’는 안다.
설명이 필요 없는 국가대표급 뮤지컬 배우가 바로 남경주(44)다.
춥고 배고픈 시절부터 뮤지컬이 최고의 인기 장르가 된 지금껏 그는 뚝심 하나로 이 무대를 지켰다.
그는 1982년 연극 <보이체크>로 데뷔했다. 1990년 <아가씨와 건달들>을 통해 이름을 알렸고,
<사랑은 비를 타고> <싱잉 인 더 레인> <아이 러브 유> 등 50여 편의 뮤지컬에 출연했다.
한국뮤지컬대상에서 무려 여섯 번이나 인기스타상을 받았다.
그는 “꿈이었던 뮤지컬이 현실로 나타나면서 지루할 틈 없이 보냈다.”며
“지금까지 재밌게 뮤지컬을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됐다.”고 말했다.

 

<벽을 뚫는 남자>를 만난 건 행운…….
1년 전부터 배역 노래 연습


남경주는 지난해 11월부터 뮤지컬 <벽을 뚫는 남자>(벽뚫남)에 출연 중이다. 2006년 2월 국내에서 초연된 프랑스 뮤지컬 <벽뚫남>은 평범한 공무원 ‘듀티율’이 벽을 통과하는 신비한 능력을 얻게 되면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를 다루고 있다. 남경주를 만난 건 지난달 23일(수) 저녁 공연을 앞둔 오후 5시였다. 세 시간 뒤, 관객들 앞에 선다는 기대감과 설레임 때문이었을까. 그는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해보였다.
“이 작품을 만난 건 행운이었어요.” 그는 기자간담회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던 적이 있다. 초연 때 출연하려 했지만, <아이 러브 유>와 일정이 겹쳐 포기했던 아쉬움 때문이었을까. 그는 2006년 <에비타>를 끝낸 뒤
1년 동안 휴식 기간을 가졌고, 그 기간 동안에 <벽뚫남> 출연을 준비했다. 그만큼 공연 날짜를 손꼽아 기다려왔다.
“워낙 좋은 작품이에요. 배우야 어떤 작품을 하든 그 과정에서 다 배우는데. 특히 이 작품은 삶의 본질을 다루고 있어요. 우리가 살면서 필요한 것들, 추구해야 할 것들……. 소심한 듀티율이 벽을 뚫는 능력을 갖게 된 뒤 자신감을 회복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잖아요. 그동안 잊고 살았던 사랑과 용기에 대해 깨달음을 얻었다고 할까요?”
그는 지난 연말과 올 초 ‘듀티율’에 푹 빠져 살았다. 남경주가 듀티율이었고, 듀티율이 남경주였다. ‘듀티율’의 어떤 면에 매료됐을까. “성실함”.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남경주가 성실하다?’

 

그러고 보니, 기자(나)에겐 “남경주는 날라리”라는 선입견이 있었던 것 같다. 이런~. ‘남경주를 왜 성실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을까?’ 잘생기고, 노래 잘하고, 춤 잘 추는, 한마디로 ‘가무’와 ‘잡기’에 능한 사람들에 대한 일반적인 편견 때문이었다.
“요즘의 제 생활을 얘기해 드릴까요? 집에서는 아내와 얘기 나누고, 운동하고. 밖에서는 연습실과 공연장이 전부입니다. 간혹 후배들과 술을 먹기도 하지만 집과 연습실을 떠나지 않아요. 결혼해서 남경주가 바뀌었다기보다는 아마 나이를 먹어가면서 자연스럽게 나를 되돌아보게 되더라고요. 일에 대한 밀도를 높이려다 보니 자연스럽게 책도 보게 되고, 건강에 신경 쓸 나이가 되다 보니 담배도 끊고 체력관리도 하게 되더라고요.”
그는 ‘듀티율’ 역할만 1년을 준비했다. 듀티율이 워낙 소심한 사람이라 세심하게 감정 변화를 잡아내야 했을 뿐 아니라 모든 대사를 노래로 소화하는 ‘오페라타 뮤지컬’이기 때문에 배역에 임하는 부담이 더 컸다고 했다. ‘연습벌레’ ‘완벽주의’를 추구하는 그의 천성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연습실 불을 가장 먼저 켜는 사람도, 가장 늦게 끄는 사람도 남경주였다.

 

 

배역에 대한 욕심보다는
배우들과 조화 이뤄 작품 빛낼 터


올해 그의 나이 마흔 넷이다. 20~30대의 푸릇푸릇한 배우들이 넘쳐나고 있는 이 바닥에서 이제 그는 ‘인기배우’라기 보다는 대선배이자 산증인으로 불린다. 한때 인기스타상을 여러 번 수상할 정도로 최고의 인기를 누렸지만, 자연스럽게 그의 인기는 조승우, 오만석, 엄기준 등 젊은 배우들의 차지가 됐다.
뮤지컬 제작 편수와 관객이 늘었다지만, 젊은이들의 사랑과 우정을 다룬 가벼운 로맨틱 코미디 장르가 대부분인 이 바닥에서 그가 설 자리가 점점 좁아 보인다. 그는 이런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격세지감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서운한 마음이 없을까. 미래에 대한 불안함은 없을까.
“전혀 아닙니다. 한때 서운하기도 했지만, 그럴 나이는 지났죠. 오히려 예전에는 뭐랄까 ‘빈 수레가 굉장히 요란했다’고 할까요? 물론, 시대가 변해서 배우로서의 가치가 없어지는 것은 아닐까 걱정도 했지만 기우였어요. 내가 최선을 다하고, 배역 안에서 진선미(진실과 선함과 아름다움)를 어떤 식으로든 관객들에게 보여주려고 하면 언젠가는 대가가 있지 않을까 싶어요. 그것에 대한 믿음이 있고, 그 믿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정신무장이 되어 있어요.
남경주는 조연은 안하겠지 하는 생각이 많은 것 같은데, 나이에 맞게 욕심 부리지 않고 제가 맡은 배역에 최선을 다하며 늙어갈 겁니다.”
<벽뚫남> 공연이 끝난 뒤에는 4월 호암아트홀에서 공연되는 <소리도둑> 출연이 예정돼 있다. 지난 20여 년 동안 <그리스>를 시작으로 <아이 러브 유>에 이르기까지 무려 17편의 뮤지컬에서 호흡을 맞춘 오랜 단짝 최정원과 함께 선다. <소리도둑>은 말 못하는 소녀 아침이의 소리를 찾아주기 위해 하나가 되는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다.
“얼마 전에도 정원이랑 통화했어요. 그 정도로 친한 사이죠. 지금도 저랑 정원이를 부부로 아는 사람이 있더군요. 사람들은 <소리도둑>을 정원이와 함께 해 기대를 많이 하지만 사실 전 정원이보다 조광화(연출가)와 김종헌(쇼틱커뮤니케이션스 대표)과의 만남, <김종욱 찾기> <당신이 잠든 사이에>의 작곡가 김혜성이 만드는 창작뮤지컬이라는 점 때문에 더 설레요.(정원이가 서운해할 수도 있겠지만) 올해 키워드 중 하나가 ‘모험’인데, 거기에 딱 맞는 작품이거든요. 벌써부터 연습이 기대돼요. 그래도 제게 정원이는 오누이 같은 존재고요. 정원이에게 전 음……. 오빠·아버지·스승 같은 존재가 아닐까요?”

 


뮤지컬 <벽뚫남>에서 열연하고 있는 남경주(왼쪽)

 

스타에 의존하기보다는
실력 있는 배우 키우는 게 더 절실


그는 뮤지컬을 정말 사랑한다. 아니, 그만큼 뮤지컬을 사랑하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인기’가 높아지면, 돈과 인기에 대한 욕심이 생기고 방송이나 영화 등 다른 분야까지 활동 영역을 넓혔을 테지만, 그는 오로지 한 우물만 판
‘뮤지컬 장인’이다.
그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전성기도 없었고, 한 물 가지도 않았다.”고 밝힌 적이 있는데, 그 이유 역시 “인기 있었을 때나 지금이나 뮤지컬을 사랑하는 것은 변함이 없다.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다.”는 점 때문이었다고 했다.

뮤지컬은 그에게 평생의 ‘꿈’이었다. 형이자 뮤지컬계 선배인 남경읍이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래서 그는 요즘 뮤지컬계 흐름을 우려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다.

 

 

배우들이 춤과 노래 등 기본기를 무시하는 것도 그렇고, 어떻게든 방송과 영화 쪽에 진출하려고 조바심을 내는 것도 그렇다. 인기를 업고 겁 없이 뛰어드는 인기 가수나 배우들을 보는 것도 걱정스럽다. 최근에는 한 개그우먼이 미국에 있을 때 “뮤지컬을 많이 봤다.”며 연출가로도 데뷔하지 않았던가.
“스타들이 뮤지컬 무대에 서면서 더 많은 관객을 끌어오는 것은 환영할 일이죠. 하지만 이것도 그들이 무대 위에서 자기 몫을 충분히 했을 때의 얘기예요. 연습이 충분하지 않으면 연기와 노래의 밀도가 떨어지는 경우가 있는데, 결과적으로 뮤지컬 관객들을 실망시키게 되잖아요. 정말 최근에는 1주일 연습하고 무대에 서는 스타도 봤어요. 2~3년 안에 거품은 빠질 겁니다. 실력 있는, 뮤지컬을 떠나지 않고 지탱할 배우들이 많이 나왔으면 합니다. 꾸준히 한 눈 팔지 않고 실력을 갈고 닦는 후배들이 빛을 볼 날이 있을 겁니다.”
그는 요즘 연기 관련 서적들을 다시 읽고 있다.

 

지방의 문화 소외 계층을 위한 공연
<남경주의 올 댓 뮤지컬> 정착시킬 것


최근에 그는 연출자로도 이름을 올렸다. <비밀의 정원>에 이어 지난해 <남경주의 올 댓 뮤지컬>을 선보였다. 널리 알려진 뮤지컬 속 넘버들을 뽑아내 뮤지컬 배우들이 노래를 하는 일종의 갈라 콘서트다. 문화 소외 지역 주민들이 뮤지컬과 친숙해지는 기회를 만들어보자는 게 취지였다.
“<비밀의 정원>은 정원이에게 아무 생각 없이 공연 아이디어를 줬는데, 연출까지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고 즐거운 마음으로 한 것이었고요. <올 댓 뮤지컬>은 ‘제가 받은 사랑을 많은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나눠주자’라는 꿈 때문에 시작하게 됐어요. 지역마다 공연장들이 많이 들어섰고, 뮤지컬에 대한 해설도 곁들여서인지 반응이 좋았어요.
앞으로 계속 <올 댓 뮤지컬>이라는 브랜드로 공연하려고 해요. 순수 뮤지컬 작품 중에서도 연출을 목적으로 시나리오를 검토하는 작품이 여럿 있어요.”
영화 출연에 대한 욕심은 없을까. “영화 시나리오를 받아보긴 하는데 작품에 대한 이해부터 감독과의 소통 등 제게 주어진 역할에 대한 확신이 서고, 시간적인 여유만 있다면 이제는 해보고 싶어요. 뮤지컬은 기록으로 남지 않지만, 영화는 내 모습이 그대로 남아 곧 태어날 2세한테 보여줄 수 있으니까요.”


글 김미영 한겨레 기자
사진제공 쇼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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