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속 시대 읽기

"문화 전문인력이 필요한 시대"

제 ‘화려한 휴가’는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서울대 약대 출신의 문화기획자이자 민중문화운동가 그리고 영화사 제작자에서 펀드 매니저까지. 유인택(52) 아시아문화기술투자(주) 공동대표만큼 다양한 인생의 경험을 쌓아온 이가 또 있을까?
모험심이 강하거나, 무모한 도전을 즐기지 않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흔히 할 수 있는 경험이 아니다. 지난해 5·18민중항쟁을 소재로 한 영화 <화려한 휴가>로 관객 730만명을 끌어 모으더니, 지금은 400억 규모의 펀드를 문화콘텐츠에 투자하는 벤처캐피털 대표로 변신했다. 영화 <님은 먼곳에>, <미인도>, 조용필 40주년 기념콘서트(부산 공연) 에 투자자로 참여했다.
“지난 7년 동안 6천억 원이 펀드를 통해 영화계에 들어왔지만, 문화현장 경험이 없는 벤처캐피털이 운영하다보니 수익성과 투명성에서 문제가 많았어요. 영화를 잘 알고, 영화제작 경험이 있는 펀드매니저가 필요한 시대가 왔어요. 그 스타트를 제가 끊은 거죠.”
그가 세운 투자회사는 금융권이 주축이 된 문화벤처캐피털과 운영 방식이 조금 다르다. 기존의 투자사들이 완성된 영화를 보고 투자를 결정하는 시스템이었다면, 그의 회사는 기획단계에서‘될 만한 영화를 골라’투자한다. 기획과 시나리오 단계부터 안정 적인 투자처를 확보한 제작사로서는 그만큼 흥행성 뿐만 아니라 작품성을 갖춘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장점을 갖게 된다.
그렇다고 해도 영화 경력만 20년. 투자자로서의 역할이 그의 역사적 사명이라고 해도, 이제야말로 제대로 된 한국영화를 만들어야 할 나이다. 그의 선택이 의외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외국에는 이그젝티브 프로듀서(executive producer?제작총지휘, 기획 투자 전문관리사)가 따로 있어요. 그 역할을 제가 하는 겁니다. 제작 초기단계부터 기획에 참여해 작품이 잘 만들어질 수 있도록 가이드 또는 컨설팅을 하는 거죠.”
그의 말대로라면, 펀드매니저가 되었다고 해서‘영화’판을 완전히 떠난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그럼에도 그의 전업이 영화제작자로의 복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현재로선 <화려한 휴가>가 그의 마지막 제작 작품일 가능성이 높다. <화려한 휴가>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과 더불어 영화제작자 유인택을 설명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다. 그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을 통해 1970년대 노동운동의 불을 지핀 전태일을‘아름다운 청년’으로 부활시켰고, <화려한 휴가>를 만듦으로 해서 우리의 기억 속에서 멀어져 가는 28년 전 광주를 다시금 되살아나게 했다. 그가‘28년’만에 광주를 끄집어 낸 데에도 나름의 이유가 있다고 했다.
“광주는 저와 인연이 많은 곳이에요. 이 영화를 기획하면서, 끝내 5·18 영화를 나보고 제작하라는 게 하늘의 뜻이구나 싶었죠. 그래서 처음부터 수익 면에 있어서는 마음을 비우고, 완성하는 게 기적이라고 생각하고 시작했죠. 영화 인생에 있어서 이번이 마지막일 수 있겠다 싶어 불공정 계약을 해서라도 영화를 만들 작품이라고 생각했어요.”
도대체 어떤 인연이기에? 그가 무대에 올린 작품들의 면면을 보면 그 해답이 나온다.
1987년, 80년 광주를 다룬 연극 <금희의 오월>을, 1988년 광주에서 공연됐던 마당극 < 일어서는 사람들>을 서울 무대에 처음으로 소개한 장본인이 바로 그다.
1989년에는 광주를 처음 다룬 독립영화 <오, 꿈의 나라>를 자신의 연극 공연장에서 상영하기도 했다. 당시 그는 이 작품으로 공연법 등 위반 혐의로 기소되기도 했다. 그는 이 판결에 불복해 헌법소원을 내기도 했는데, 궁극적으로 영화에 대한 사전검열이 폐지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어쨌든 지난해 7월 개봉한 <화려한 휴가>는 전국적으로 730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하지만 그는 정작 수익 면에서 짭짤한 재미를 보지 못했다. 영화 제작 자체에 목적을 둔 탓에 투자?배급사와의 불공정 계약을 맺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투자사가 40억원 가량의 수익을 얻은 반면 정작 그에게 남은 건 수억 원의 적자다. 그래도 그는 만족한다.‘ 5·18에 대해 갖고 있던 부채의식을 <화려한 휴가>로 인해 어느 정도 덜었기 때문’이다.
70년대 군사독재 시절 연극이 유일한 해방구
평범한 대학생이었던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바꿔놓은 건 군사독재다. 1975년 박정희 대통령은‘국가안전과 공공질서의 수호를 위한 긴급조치 9호’를 선포했고, 이후 5년 동안 민주주의를 짓밟았다. 헌법 비방이나 반대, 유언비어 유포, 허가 없는 학생시위·집회 금지 등을 금지했고, 대학 캠퍼스 내에도 경찰이 상주했다.
“이런 상황에서 학업이라는 것은 의미가 없었죠. 어딘가 미치지 않으면 정상적으로 살 수 없었던 시절이었는데, 뭔가 돌파구가 필요했어요. 그것이 연극이었어요.”
그의 연극 입문은 우연찮게 약대 연극반 정기공연을 한달 앞두고 한 배우가 펑크를 낸 것이 결정적 이유였다. 친구의 부탁으로 그 자리를 그가 대신했다. 연극을 조금씩 알아가기 시작할 즈음, 이어 서울대 총연극회의 마당극 <허생전>까지 참여하게 되면서 연극의 매력에 푹 빠졌다.
소설가 황석영, 시인 김지하, 가수 겸 연출가 김민기 등 이른바‘문화운동 1세대’라고 불리는 이들이 당시 그와 함께 무대에 올랐었다.
1983년, 대학 졸업 뒤 전공을 살려 제약회사에 취직을 한 적이 있다. 평범한 직장인의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해 내린 결정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오판이었다. 끝끝내 연극을 향한 그의 열망을 꺾지 못했다.
결국‘타이레놀’허가 업무를 마친 이듬해 회사를 그만뒀다. 그는“회사에 나가서도 계속 연극 생각을 했고, 퇴근 뒤에는 어김없이 연극하는 친구들을 찾았다.”며“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기로 마음먹기까지 1년 6개월이 걸렸다.”고 회고했다.
이후 그는 연극뿐 아니라 마당극과 노래극, 무용, 콘서트 영역까지 분야를 넓힌다.
이와 더불어 민족문화운동협의회 사무국장,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민청련, 민예총 등에 몸담으며 민중문화 운동과 민주화 운동을 주도하는 문화기획자로서도 이름을 알린다.
그의 친형이 유인태 전 의원. 그 배경에 집안의 내력이 있었기 때문일까. 그는“우리 집안이 평소 형제 사이에 교류가 자주 있지 않다.”는 말로 부정의 의미를 에둘러 표현했다. 그는“참여정부 시절엔 형 연락처도 몰랐을 정도”라며“지금은 한결 자유로워졌지만, 당시에는 유인태 동생이라는 것 때문에 영화 관련 비즈니스도 무산되는 등 혜택대신 역차별을 받았다.”고 웃으며 말했다.
일반 대중이 선호할 만한 시장친화적인 영화 제작 늘려야
 
연극에서 영화로 전업 역시 우연찮게 이뤄졌다. 1987년 6월항쟁. 넥타이부대가 아스팔트에 등장한 것을 보고‘지금껏 노동자, 농민, 빈민, 민중을 위한 예술을 해왔다면 앞으로는 시민사회가 민주화운동의 주력군이 되겠구나’는 데까지 생각이 미친 그는 한정된 민중이 아니라 일반 대중을 알아가야겠다고 마음먹는다.
“그러려면 방송, 음악, 영화 같은 대중문화 장르에 입문해야 했어요. 방송국은 현실영화 <화려한 휴가> 적으로 어려웠고, 그나마 연극과 유사한 장르가 영화였어요.”
영화판에서 첫 인연을 맺은 작품은 1989년 <까미유 끌로델>과 <우묵배미의 사랑>이다. 보도자료를 쓰고, 이것을 언론사에 배포하는 밑바닥 일부터 시작했다. 이후 <결혼이야기>와 <미스트 맘마>로 흥행에 성공한 뒤 영화사 기획시대를 설립했다.
하지만 예술과 상업 영화, 지적인 영화와 상업 영화 사이에서 줄타기를 한 그의 회사는 대박을 내지 못했다. 이른바 먹물 영화를 만들어 날려먹고 시장친화적인 영화로 손해를 만회하는 형태로 20년 가까이 회사를 운영했다. <결혼이야기>, <미스터 맘마>로 돈을 벌어 <이재수의 난>으로 말아먹는 식이다.
그럼에도 그는 영화판을 지켰다. 그는“연극이 많아야 수백, 수천 명의 관객을 대상 으로 하는 반면 영화는 수십만, 수백만 명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매체 파급효과가 크다는 매력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그가 좋아하는 장르의 영화를 물었다.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화려한 휴가> 류의 의식 있는 영화가 아니라 <목포는 항구다>, <해적, 디스코왕 되다>, <돈텔파파> 같은 삼류 코미디 영화나 에로 영화란다.
“대중들이 쉽게 다가갈 수 있고, 저비용으로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장점이 있죠. 하지만 제가 이런 영화를 내놓았을 때, 정작 흥행 성적이나 관객의 반응은 나쁘지 않았지만 영화판 사람들은 저질영화라고 욕했어요. 젊은 제작자와 투자자들은 톱스타가 출연하는 웰메이드 영화, 즉 먹물 영화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후배들이 자신이 만들고 싶은 영화가 아니라 관객이 보고 싶어 하는 영화, 즉 대중친화적이고 시장친화적인 영화를 기획하고 만들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영화제작자 유인택의 부재를 우려한다. 그의 부재가 6월항쟁을 비롯 박종철, 최종길, 건대항쟁 등 1980년대 이후 굵직굵직한 역사적 사건들을 소재로 한 영화 제작의 맥을 단절시키는 원인이 될 수도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는 이에 대해‘기우’라고 잘라 말했다.
“<29년>(강풀의 <26년> 원작) 같은 역사적 사건을 다룬 영화의 투자의뢰가 저희 회사에 자주 와요. 아무래도 제가 있으니까 그렇겠죠. 하지만 제가 봐도 재미가 없는걸요.
의식이 너무 많이 들어가 있어요. 전 그렇게 말해요. 대중적으로 시나리오를 풀어봐라.
재밌게 써라. 먹물을 빼라. <화려한 휴가>의 흥행도 먹물을 철저하게 뺏기 때문에 가능 했어요. 역사적 사건이 소재라고 해서 의도적으로 의식을 집어넣을 필요는 없죠.”
대중적으로 시나리오를 푼다면 역사적 사건을 소재로 해도 관객들에게 사랑받을 수 있고, 그런 영화들이 꾸준히 만들어지는 토대로 작용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글·김미영 <한겨레신문>기자, 사진제공 기획시대
사진·황석선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홍보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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