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속 시대 읽기

소외된 자와 노동자에게 희망의 노래 거리 공연 펼치는 노동가수 박 준

소외받은 이들을 위한 희망의 노래
매주 월요일 오후가 되면, 명동 인근에는 경쾌한 희망의 노래가 울려 퍼진다. ‘너희들은 자랑스러운 노동자의 아들·딸이다’라고 적힌 플래카드 앞에서 산재·해고·이주 노동자 자녀들을 위한 장학기금 마련을 위해 노래를 부르는 들불장학재단 멤버들의 목소리다. 이들은 일주일에 한 번씩 명동성당 주차장 앞에 작은 무대를 연다. 이 중심에는 30년 가까이 소외받은 사람들과 함께 해온 노동가수 박준(48) 씨가 있다.
박준. 그는 80년 명동성당 청년활동연합회를 통해 민중과 민주화에 관심을 갖게 된 뒤부터 지금까지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운동을 펼쳤다. 그는 늘 장애인, 노동자, 도시빈민, 철거민과 함께 했고 이들은 그의 힘찬 노래를 들으며 애환과 설움을 달랬으며, 위안과 희망을 얻었다. 특히 그는 노동현장은 물론 에바다 농아원생들의 농성투쟁을 비롯 장애인 이동권 확보 투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장애 해방가>, <이동권 연대투쟁가> 등의 노래를 그의 음반에 싣기도 했다. 하지만 그 역시 가난한 노동자이자, 도시빈민이다.
“아무래도 팔자인 것 같아요.”
가난한 노동자로 살아가는 이유에 대해 그는 이렇게 웃으며 말했지만, 그 안에선 일종의 부채의식 같은 게 묻어났다. 사제가 되기를 포기한 뒤 갖게 된 일종의 빚인 셈이다.
그는 숭문고 시절 문학 선생님이었던 정희성 시인의 가르침 덕에 한국사회와 민중, 민주화에 대해 눈을 떴다. 80년부터는 명동성당 청년회에서 본격적으로 활동을 펼친다. <아침이슬>,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새>, <이 세상 사는 동안> 등의 노래를 이때부터 기타를 치며 즐겨 부르기 시작했다. 이후 가톨릭합창단을 거쳐 명동성당 청년단체연합회 활동에 참여하면서 자연스럽게 자신만의 삶이 아니라, 더불어 사는 삶을 살기로 마음먹었다.
“천주교 사제가 되려고 했어요. 지금은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대표신부(전종훈 신부) 종훈이 형이랑 81년 함께 사제가 되어 뭔가 해보자고 약속을 했어요. 신학대 진학 준비도 차곡차곡 했고요.”
 
1984년 있었던 전두환 방일반대투위 활동은 그의 인생을 180도 바꿔놓았다. 유인호 전 중앙대 교수와 리영희 한양대 명예교수의 초빙 강의가 열린 어느 날, 그는 백골단으로부터 몰매를 맞아 크게 다쳤다. “큰 병을 얻었다기보다는 골병이 들었죠. 병원도 오래 들락날락 해야 했어요. 결국 사제가 되는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어요.”
대신 그는 이때부터 다른 방식으로 명동을 지켰다. 99년까지는 명동성당 주변에 카페를 운영하며, 민주주의를 염원하는 이들의 쉼터이자 아지트를 제공했다. 그 역시 노래로 민주주의와 민중을 노래했다. 85년부터는 주말마다 명동성당 주차장 인근에서 ‘심장병 어린이 돕기’ 모금 공연도 진행했다. 우연히 한 후배의 병문안을 갔다가 만난 고 이주연 양(당시 5세)을 만난 게 계기였다.
“밝게 웃고 있는 곰인형을 갖고 싶다는 주연이의 말에 충격을 받았어요. ‘내가 사줄게’라고 약속을 했지만, 결국 성탄절을 앞두고 하늘나라로 갔죠. 그게 시작이 됐어요.
어린 아이들이었지만, 인생을 다 산 어른만큼 사려 깊고 이해심이 많았어요. 이 아이들을 통해서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많이 달라졌죠. 이 아이들에게 연말연시 불우이웃을 위한 연례행사를 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뒤 99년 명동을 떠날 때까지 정기적으로 모금 공연을 했죠.”
지금은 오히려 사제가 되지 않은 게 감사할 따름이다. 전국 각지 노동자와 빈민이 있는 곳, 투쟁의 현장을 찾아다니며 노래를 부를 수 있는 더 큰 무대와 공간을 얻었기 때문이다.
산재·해고·이주 노동자 자녀 위한 공연
1999년 명동에 있던 가게를 정리하며 심장병 어린이를 위한 모금 공연까지 정리했다. 당시 민주노총 공식음반이 발매된 터라 투쟁현장을 다니느라 공연을 펼칠 수 없었던 이유가 가장 컸다. 그런 그를 다시 명동거리에 세운 건 2001년 1,784명의 대우자동차 노동자 집단해고 사태다. 2002년 10월부터 꼬박 6년 째 명동성당 주차장 앞 무대를 지켜오고 있다. 지금은 후배가수 연영석, 서기상(꽃다지 멤버), 김대원(전교조 중앙노래패 해웃음 대표) 등이 그의 짐을 덜어주고 있다.
“대우자동차 해고자들이 투쟁하는 과정에서 당장 분유값이 부족해 아이들이 물만 먹고 생계난에 가정이 해체되는 경우를 많이 봤어요. 해고자 자녀, 비정규직, 산재, 장애인, 이주 노동자 자녀들에게 뭔가 베풀어주자는 뜻에서 공연을 결심하게 됐어요.”
하지만 그가 노동자의 자녀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그의 노력에 비해, 그렇게 크지 않아 보인다. 아쉬운 대목이다. 5시간 노래공연을 통해 얻는 수익은 고작 10만~20만원 남짓. 경제가 어려워서인지, 지나가는 시민들의 지갑이 쉽게 열리지 않는 탓이다. 노래를 부르는 사람도 시민들의 호응이 있어야 힘이 나는 법이다. 지난 20일 공연에서 그는 <행복의 나라로 갑시다> 등 귀에 익은 곡들을 선곡하는 노력(?)을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애초 ‘들불장학재단’을 만들 요량으로 모금액을 차곡차곡 모아왔지만, 재작년 말부터는 아예 이를 포기하고 열사 자녀, 이주노동자 자녀 등 3명의 아이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 그 역시 “장학재단을 만든다는 것은 큰 욕심이었던 것 같다. 지난한 과정에 사실 좀 지쳤다.”고 토로했다.
월요일을 제외한 다른 날이면 그는 서울과 지방의 노동현장과 철거현장, 비정규직 집회나 기륭전자 등 쉼 없이 돌아다니며, 노래로 투쟁에 지친 이들을 격려하고 위로한다. 꼭 공연 요청이 아니더라도 짬이 날 때면 자발적으로 현장의 동지들을 찾곤 한다.
지난해부터는 방글라데시 이주 노동자 출신으로 강제출국당한 비두 등과 뜻을 모아 방글라데시 내 교육공동체를 만드는 일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매주 월요일 정기적으로 시간을 내는 일조차 쉽지 않아 보인다. 그는 “내가 가진 것으로 다른 사람에게 나눠줄 수 있어서 행복하다.”며 “내 뜻에 동참해주는 후배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작은 세상이어서 지치지 않는다. 월요일 공연을 계속 이어갈 생각”이라고 말했다.
든든한 조력자, 아내가 큰 힘
 
그가 이처럼 노래를 매개로 활동할 수 있었던 데는 든든한 조력자인 아내 박은영 씨의 공을 빼놓을 수 없다. 94년 도시빈민테잎 <시작의 노래> 작업을 하면서 만난 그의 아내 역시 결혼 전까지 현장에서 노래를 부르는 가수였다. “아내와 두 딸이 지금의 제 삶을 많이 이해해주고 있어요. 저 같은 사람과 함께 살아줘서 너무 고맙죠.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지만, 아껴가면서 알콩달콩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하지 않는 한 지방 공연을 끝내고 난 뒤 새벽에라도 귀가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가족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배려라고 보기 때문이다. 아침에 아이들 학교 갈 때 배웅해주고, 종종 아내에게 모닝커피를 타주곤 한다. 그는 “이런 게 행복이 아닌 가 싶다.”며 “감사한 시간들”이라고 말했다.
가끔은 아주 가끔은 이렇게 사는 게 힘들지 않을까. 그는 “95년 만난 5·18유족회와 부상자회 분들과의 기억을 잊지 않는 한 이런 삶을 계속 살 것”이라고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회와 사람들이 변하고, 이웃과 더불어 사는 일꾼이 되고자 했던 이들이 변해가는 모습을 보면서도 그는 이들 덕분에 오히려 “지금의 삶을 지켜야겠다.”는 생각을 더 확실히 굳혔다고 한다.
그렇다면, 언젠가는 그의 아내와 그가 함께 듀엣으로 노래를 부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는 “개인적으로 함께 부르면 좋겠다.”면서도 “그 문제는 전적으로 아내의 의지에 달려 있다.”고 여운을 남겼다.
 
민주노총 공식음반 내면서 ‘노동가수’로 알려져
노동가수 박준’. 그의 이름을 널리 알린 건 99년 작곡가 김호철 씨를 만나 내놓은 <민주노총 공식음반>이다. 그의 공식 1집 음반이기도 한데, 지금도 많이 불리는 <세상을 멈춰라>, <약속은 지킨다>, <깃발가> 등이 실려 있다.
“음반이 나온 뒤 현장을 엄청 많이 다녔어요. 일주일 만에 7킬로그램이 빠질 정도였으니까요. 당시에는 투쟁현장에서 부를 노래에 대한 요구가 많이 있었던 시기였고, 저 신이 나서 노래를 불렀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2003년 <이 개같은 세상은>이 수록된 2집이 나왔다. 내년이면 정식 가수 데뷔 10년. 3집 음반이나 기념 콘서트 계획은 요원하다. “싱어송 라이터도 아니고, 현장에서 콘서트를 매일 해서 그런지 기념행사를 할 필요성을 못 느끼겠어요. 지금도 다녀야 할 척박한 현장들이 너무 많아서요. 콘서트라도 하려면 최소한 목 관리를 해야 하는데, 그럴 시간도 없고요.”
가수라기보다는 현장을 지키는 ‘활동가’다운 면모가 느껴지는 대목이다. 다만 그는 “내 이름을 건 노래이야기 형식의, 모금과 이야기와 노래가 함께 공존하는 콘서트를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장애인 이동권이 확보되고, 이 땅에 비정규직이 없어지고……. 노동가수 박준 씨가 꿈꾸는 세상은 작고 소박한 것이지만, 그마저도 이뤄지기까지 긴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민주주의가 안착됐다고 하지만 사회적 약자들을 배려하는 정책은 쉽게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많은 이들은 그에게 묻곤 한다. “기타와 노래로 세상을 얼마나 바꿀 수 있느냐고.”
그는 말한다. “노래가 세상 전체를 바꿀 수는 없지만, 조그만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다고. 그 변화가 결국은 그가 원하는 세상을 만드는 데 작은 주춧돌이 될 수 있다.”라고.
그의 홈페이지(
http://nodong.com/joon/)에 적힌 대로, ‘노동(노래)은 사랑이자, 하나가 되는 아픔이자, 기나긴 투쟁이자, 눈물이자 혁명’이니까 말이다. 그는 오늘도 “투쟁으로 말하는” 그런 가수가 되기를 꿈꾸며, 거리에서 노래를 부른다.
 
글·김미영 <한겨레신문>기자, 사진 이기태 노동과세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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