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속 시대 읽기

조국과 청춘

 

1960년대 이후 학생운동은 한국 변혁운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왔다. 사회운동 역량이 미약하던 시기에 학생운동은 대학이라는 비교적 안정된 활동공간에서 자신의 역량을 축적함으로써 사회운동의 주동력으로 자리매김해왔다.


6,70년대의 학생운동이 정의감과 도덕성에 기초한 다소 인텔리적 운동이었다면, 80년대의 학생운동은 대중적이며 조직적인 운동이었다는데 차이가 있다. 전두환 정권 당시 엄혹한 탄압으로 인해 강도 높은 서클 중심의 활동을 펼쳐오던 학생운동은 87년 6월 민주항쟁을 기점으로 전대협이라는 연대체를 구성하고 대중적 학생운동의 신화를 창조해내기 시작했다.


1기 출범식을 약 5,000여 명의 학생들과 함께 치러낸 전대협이 5년 뒤 6기 출범식을 10만에 가까운 학생들과 함께 진행한 것은 당시 학생운동의 힘을 엿볼 수 있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1987년 이후 학생운동은 학생이라는 특수한 위치와 젊음이라는 힘, 전대협을 중심으로 한 조직성을 바탕으로 변혁운동의 최선두에서 활동해 왔다. 학생운동은 학생회를 중심으로 한 대중적 역량과 문학, 노래, 풍물 등 다양한 문화예술운동을 기반으로 성장했다. 특히 진보적 대학문예운동 역량은 중앙 동아리 뿐만 아니라 각 과별로 다양한 진보적 문예학회들을 건설하며 대학사회에서 큰 파급력을 구축했다. 대중문화의 전문적인 역량이 구축되지 못한 상황에서 대학은 실로 해방공간에 가까운 문화적 소통공간으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서울지역총학생회연합(이하 서총련) 노래단 ‘조국과 청춘’은 이러한 대학문예운동 역량의 결실로 탄생한 팀이다. 1991년 ‘전대협 노래단 건준위’를 거쳐 1992년 서총련 노래단으로 등장한 ‘조국과 청춘’은 그 후 말 그대로 조국을 사랑하는 청춘들의 뜨거운 사랑을 받았다. 당시 노찾사나 꽃다지를 중심으로 한 민중가요팀들도 다수 활동하고 있었지만 이들은 30대 이상의 감수성에 기반하거나 노동자적 감수성에 기반한 노래들을 주로 부름으로써 20대 학생운동권의 감수성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그러나 ‘조국과 청춘’은 80년대 중반 이후 성장한 대중문화의 세례를 받은 신세대들의 발랄한 감수성과 명실상부한 대중운동으로 자리매김한 학생운동의 보편적 감수성을 정확하게 반영하는 노래들을 내놓으며 운동권과 비운동권을 가로질러 당시 대학생들에게 사랑받았다.
‘조국과 청춘’의 노래는 무엇보다도 90년대 학생운동권의 순수하고 패기 넘치는 보편적 정서를 잘 포착해낸데 특징이 있었다. ‘조국과 청춘’ 역시 민중가요 노래패답게 운동권 특유의 정치적 엄숙함을 드러내는 노래들도 내놓으나 행진곡 풍의 투쟁가들에서도 20대 청년으로서의 자기 인식과 패기를 드러냄으로써 다른 노래패들과의 차별성을 드러냈다.
하지만 ‘조국과 청춘’ 음악의 가장 큰 특징은 <내가 그대를 처음 만난 날> 이나 <갈꺼야>와 같은 빠른 비트의 곡에서 선보인 날렵한 놀이적 감수성이었다.

 

날렵한 놀이적 감수성
이러한 감수성은 이전의 민중가요에서는 결코 찾아보기 힘든 것이었다. 이는 90년대 이후 변화한 학생운동의 흐름을 그대로 반영한 결과였다. 당시 우리 사회의 민주화 과정 속에서 대중적 공간은 대폭 증가했으며 민주화에 대한 낙관 역시 지배적이었다. 소수의 결의된 학생들만이 운동에 참여하던 80년대와는 달리 누구나 쉽게 참여하는 대중운동으로 학생운동은 변모하였으며 때문에 심각하고 전투적인 분위기로는 대중성을 확보하기 어려워졌던 것이다.
투쟁도 즐거운 축제나 놀이처럼 여기는 변화 속에서 ‘조국과 청춘’은 ‘조국’의 이야기를 ‘청춘’의 감수성으로 다루는 작품들을 계속 발표함으로써 학생들의 뜨거운 호응을 얻었고 대학사회의 진보적 문화를 널리 확산시키며 학생운동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조국과 청춘’은 학생운동가의 순수하고 여린 속내를 그대로 드러내는 작품들(나의 소망, 아버지와 통닭 한마리 등)과 함께 건강한 대학생의 삶을 다룬 노래들(맏사내 인생, 4학년 등)을 늘 함께 발표함으로써 대중적 대학노래모임으로서 활동하고자 했다. 발라드, 락, 민요, 왈츠, 포크, 폴카, 행진곡 등 다양한 음악 어법을 사용한 것도 민중가요 집단으로서의 전문성을 뒷받침하며 대학사회 내에서 어필할 수 있는 큰 힘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80년대 학생운동권에게 노찾사가 있었다면 90년대 초 학생운동권에는 ‘조국과 청춘’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조국과 청춘’의 노래는 대학사회 내에서 널리 불리워졌다.
그러나 90년대 중반 이후 한총련을 중심으로 한 학생운동이 침체와 분열의 늪에 빠지면서 ‘조국과 청춘’ 역시 그 영향을 받게 된다. 락음악 어법을 전면적으로 도입한 ‘조국과 청춘 5집’은 학생운동권 내에서 격렬한 찬반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민중가요에 락음악 어법을 도입하는 것은 이미 그룹 천지인 등이 90년대 초에 시도했었고 대학사회에서 서태지가 신세대 혁명의 아이콘으로까지 추앙받는 현실에서 결코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한총련 학생운동이 극심한 정권의 탄압을 받는 상황에서 일부에서는 ‘조국과 청춘’의 새로운 음악적 시도를 너그럽게 인정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에 반해 ‘조국과 청춘’을 경원시했던 좌파 학생운동진영과 일반 학우들에게 ‘조국과 청춘’의 시도는 좋은 반응을 얻었으며 대중음악평론가들의 반응도 대체로 호의적이었다.

 

끝나지 않은 노래의 힘
그 후 ‘조국과 청춘’은 또 한장의 앨범을 발표하며 활동을 계속했지만, 대학문예운동의 극심한 쇠퇴와 맞물려 활동을 중단했다. ‘조국과 청춘’과 함께 경기남부총련 노래단으로 활동하던 ‘천리마’ 역시 공식 활동이 중단된 상태이다. 진보적인 대학노래운동의 흐름을 선도하던 노래패들의 잇달은 활동중단은 현재 대학문예운동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반증한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8,90년대 대학노래운동 역시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라 80년대의 등장과 더불어 새롭게 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우리의 삶이 끝나지 않는 한 노래도 끝나지 않을 것이다. ‘조국과 청춘’의 노래들과 함께 젊음을 보낸 이들은 아직도 그 노래를 부르며 가슴에 새긴 다짐을 잊지 않고 있다. 그것이 노래의 힘이다. 불씨처럼 가슴에 남은 노래는 때론 촛불로 때론 횃불로 되살아난다. 노래와 함께 있는한 우리는 언제나 청춘인 것이다.


[안석희]
유인혁이라는 이름으로 <바위처럼>
<우산><노래만큼 좋은 세상>
<이 길의 전부>등의 노래를 만들었다.
희망의 노래 꽃다지 음악감독을 지냈고
2000년부터는 유정고밴드에서 활동했다.
음악작업을 하는 틈틈이
노래에 대한 글을 연재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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