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속 시대 읽기

자연 속 일상의 감동적인 울림 이철수 판화전

 
  얼마 전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20주년 기념행사의 진행을 도운 일이 있다. 아직 30대 초반인 필자에게 민통련은 사실 특별한 감흥을 주기보다는 80년대의 전설 같은 막연한 느낌만을 주는 조직이었다. 기념행사 당일에 준비한 문화프로그램을 직접 보면서 느낀 점도 많았지만 그보다는 그날 자리를 가득 메웠던 분들의 면면이 오히려 더 많은 울림을 주었다.
그날 행사장에 오신 분들의 평균 연령은 대략 40대 중반쯤 되어 보였다. 아마 그 연배도 젊은 축에 속했을 것이고 더 나이 드신 분들도 많았는데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민통련 부문 조직을 소개할 때였다.
민주화운동청년연합의 순서가 되어 당시 회원들이 우루루 등장했는데 세상에! 청년은 아무도 없고, 중년의 아저씨들만이 가득 했다.

세월이 그만큼 흐른 것이다. 87년 6월항쟁으로부터 벌써 20여 년이 흘렀으니 당시 삼십대 초반이었던 활동가는 이제 쉰 살을 훌쩍 넘기지 않았겠는가? 당시 각 조직에서 실무자로 일하시던 분들 중에는 정치인이 된 분들도 있었고 사업을 하는 분들도 있었으며, 개인적인 삶을 조용히 꾸려가는 분들도 있는 듯 했다.
그러나 그 누구도 20년 전에 현재와 같은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군부독재가 타도되고 참여정부가 집권하게 되거나 혹은 자신이 운동이 아닌 다른 일을 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이는 별로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20년이라는 긴 시간은 결국 세상을 바꿔놓았고 세상을 바꾸었던 사람들 역시 바꿔놓았다.
5년 만에 열린 이철수의 판화전을 소개하는 글머리가 길어졌지만 장황하게 민통련 행사 이야기를 하는 것은 『희망세상』을 통해 이철수의 판화전 소식을 접하는 분들 중 상당수가 그렇게 나이 들어가는 분들이시리라 짐작되기 때문이다. 또한 이철수의 판화처럼 큰 변화를 겪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닐 수도 있지만 어쩌면 이철수의 판화를 알고 있는 이들이 기억하는 이철수의 판화는 서로 다른 것일지도 모른다. 80년대의 운동 경험이 조금이라도 있는 이라면 아마 오윤을 닮아 선득한 칼 맛이 돋보였던 작품을 기억할 것이고, 그런 경험이 없는 이라면 최근의 선적이며 편안한 작품으로 이철수를 기억할 것이다.

선득한 칼 맛이 돋보였던 지난 작품
80년대 중후반 민중미술의 폭발적인 성장 속에서 초기 이철수는 오윤을 필두로 김준권, 남궁산, 류연복, 홍선웅 등과 함께 민중판화의 일가를 이루었다. 이철수의 판화도 대부분의 민중판화가 그러했듯 선명한 칼맛이 돋보이는 정치적인 내용의 작품들이 많았지만 그의 판화에는 다른 작가들과는 다른 밝음과 경쾌함이 돋보였다. 민중미술진영의 대표적 작가로 활동하던 그의 작품은 그러나 90년대부터 크게 달라졌다.
선동성이 강했던 작품경향은 일상과 자연의 작은 아름다움과 깨달음에 주목하는 쪽으로 변화한 것이다. 이것은 그가 서울에서 제천으로 거처를 옮기고 농사를 짓기 시작한 것과 당시 사회운동이 생명과 환경의 문제에 눈을 돌리기 시작한 것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철수는 1993년 학고재 전시에서부터 달라진 작품들을 본격적으로 선보이기 시작했는데 그의 새로운 작품들은 책과 판화상품, 인터넷을 통해 퍼져나가며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다. 간결하고 소박한 그림 속에 깨달음의 메시지를 담은 작품들이 도시의 물질문명 속에 지친 이들에게 평화와 안식의 울림으로 퍼져나간 것이다.
지난 4월 6일부터 18일까지 서울 인사동의 인사아트센터에서 열렸던 전시회 ‘작은 것들’ 역시 그동안 그가 주로 다루었던 자연적이며 명상적인 내용의 작품 70여 점으로 꾸려졌다. 미국의 데이비슨 갤러리에서 함께 열린 이 전시회에서 이철수는 예의 단순한 그림과 짧은 글의 결합을 통해 자연 속에 숨어있는 진리를 찾아내고 어리석은 인간을 넌지시 일깨우며 좋은 날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었다. 동강의 흰 나비는 조바심 없이 태연하였으며 작은 새 한 마리는 허공을 날아 큰 산을 넘었다. 물길 역시 작은 물길만 내주면 절로 흐르고 오래 흘러 제 길을 간다 했다.
그러나 인간만은 한평생을 기대 살며 하늘에 폭탄으로 만든 새를 띄우고, 봄날 밭을 일구는 마음으로 흙그릇에 무늬를 새기던 옛 사람들의 자취를 한순간에 공습으로 짓밟아버렸다. 그럼에도 인간은 잡념 없는 노동과 명상을 통해 깨달을 수 있으니 이철수는 작은 것들을 사랑하고 자연의 흐름을 몸에 담는 삶을 통해 좋은 날에 이를 수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가 사랑하는 작은 것들은 다름 아닌 나뭇잎과 비, 달과 별, 고무신과 숟가락, 촛불과 송이눈처럼 일상의 사소한 것들이었다.
하지만 이 작은 것들은 색과 공간을 조화롭게 사용하는 감각적인 표현으로 감동있게 다가왔다.
예전 그의 판화 속 글과 그림이 다소 평면적으로 결합되었던데 반해 이번 전시에서는 자유로운 구도와 색의 사용으로 인해 더욱 풍성한 느낌을 맛볼 수가 있다. 다색과 단색을 적절하게 사용하고 그림과 글의 경계를 허물며 채움과 비움을 능수능란하게 구사한 이번 전시는 그동안 이철수의 작품이 미술적으로 재미가 없다는 평가를 뒤집기에 충분했으며 그가 추구해온 명상적 경향의 작품이 도달할 수 있는 어떤 정점에 올랐다고 말해도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자유로운 구도와 색의 사용으로 풍성한 느낌
다만 민통련의 활동가들이 자유롭게 제 길을 가더라도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무언가가 있다고 믿듯이 이철수뿐만 아니라 20년 전 자본과 권력, 외세와 대결하며 자주, 민주, 평등, 통일의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던 민중판화가들 대부분이 이제는 생태적 감수성에 편중된 작품경향을 보이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다소 비판적으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생태철학의 중요성을 무시하는 것도, 다시 미술이 혁명을 위한 도구가 되라는 이야기도 아니다. 진보적 미술운동이 현실의 모순에 대한 대결과 극복을 꿈꾸었다면 더욱 강해지는 자본의 질서와 미국의 전쟁책동 그리고 빈부격차의 심화와 수구세력의 문제 등에 대한 미술적 발언은 여전히 유효한 것 아닌가. 작은 것들의 아름다움은 아름다움에 대한 찬양과 아름다움을 짓밟는 이들에 대한 비판이 함께할 때 비로소 지켜지고 널리 퍼질 것이다.

 
* 서정민갑

진보적 음악운동단체인 한국민족음악인협회에서 오랫동안 일하고 있다. 공연기획, 음반제작, 음악강좌 등 다양한 사업을 통해 아름다운 문화의 시대를 만들고 싶은 것이 그의 꿈이다.
문화와 관련한 자유로운 글쓰기도 즐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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