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속 시대 읽기

꽃이 되어 바람이 되어, 인혁당사건 추모전시회

꽃이 되어 바람이 되어, 인혁당사건 추모전시회
(2012년 4월 8일~5월 13일, 서울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 내 12옥사)

박수진_독립큐레이터



1975년 봄, 그해에도 봄꽃은 바람에 꽃 내음과 함께 날아갔을 것이다. 다만 그해 꽃바람엔 비릿한 피 냄새와 함께 8명의 귀한 목숨들도, 민주주의도 바람이 되어 날아갔다. 그렇다. 재판 선고 후 18시간 만에 사형이 집행된 ‘인민혁명당(약칭 인혁당)’ 사건 이후 벌써 37번째의 봄이 또 왔다.

인혁당 사건을 짧게나마 정리하면 이렇다. 인혁당 사건은 1964년과 1974년 두 차례 있었다. 1964년의 1차 인혁당 사건은 북한의 지령을 받아 지하당을 조직한 사건으로 조작된 사건이었다. 10년 후, 1974년 4월 유신헌법 반대시위가 일자 중앙정보부는 민주인사들을 불법연행하고 고문을 통해 각종 진술조서를 위조하고 사건을 조작하여 1974년 4월 25일 ‘인혁당 재건위원회’ 사건을 발표하였다. 이후 군법회의가 진행되었고 1975년 4월 8일 대법원은 도예종, 우홍선, 서도원, 이수병, 하재완, 여정남, 송상진, 김용원 등 8명에 대해 사형, 다른 17명에게는 무기징역에서 징역 5년형을 확정하였다. 그리고 사법사상 전례가 없는 사형판결 18시간만인 4월 9일 새벽, 사형이 집행되었다. 세계법학자협회는 이날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이라 했다.


인혁당 사건은 중앙정보부를 비롯한 경찰과 군검찰, 대법원, 언론까지 모두 공모하여 조작한 사건이며 사법부에 의해 자행된 사법살인이다. 숨죽이듯 긴 독재의 시절 동안 침묵했고, 독재자가 죽은 이후에도 여전히 말할 수 없었다. 그렇듯 인혁당 사건은 역사 저편으로 멀어져간 것처럼 사람들에게 잊혀져가다 1998년 ‘인혁당 사건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을 위한 대책위원회’가 구성되었다. 2002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인혁당 사건이 조작되었다고 발표했다. 2005년 12월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의 자체조사에서 인혁당 사건은 독재자 박정희의 자의적 요구에 의해 수사가 진행되고 조작된 사건이었음을 인정했고, 2007년 1월 23일 법원은 32년 만에 비로소 사건 관련자들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그리고 올봄에서야 비로소 우리는 ‘인혁당 추모전시회’를 독립문에 있는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서 가질 수 있게 됐다. 참으로 오랜 시간이 지났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우리가 인혁당 사건에 대해 말할 수 있어서 그래서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전시회를 가질 수 있어서 다행이다. 이제 사건이 있은 후 37년, 처음으로 전시되는 인혁당 사건은 질곡 많은 한국 현대사로부터 희생자들을 불러내어 그들의 삶과 개인의 역사를 한국현대사 안에 올려놓고 들려준다.

 이번 전시는 전시 장소 선정에서부터 전시의 성격과 전시공간연출을 역사적 맥락에 놓았다. 전시 장소인 서대문 형무소는 대한제국 말기인 1908년 일제에 의해 지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사법 수형 시설로써, 일제 강점기와 독재정권 시절 수많은 독립 운동가들과 민주화운동 관련인사들이 수감되고 때로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던 역사적 공간이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의 여덟 희생자들이 일 년 동안 수감되고 사형되었던 곳이라서 그들의 이야기는 수감공간과 전시공간이 긴밀하게 구성된 이번 전시에서 더욱 생생하게 살아나왔다.

인혁당사건 추모전시회 <꽃이 되어 바람이 되어>는 크게 세 개의 섹션으로 구성되어 있다. ‘인혁당 재건위’ 사법살인의 희생자 각각의 삶,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한국현대사와 박정희 개인의 삶, 그리고 ‘인혁당 재건위’ 사건의 사료가 그것이다.

전시는 천장이 뚫린 높은 지붕과 좁다랗고 긴 복도, 그리고 발자국 소리의 체험에서부터 시작한다. 전시 관람자는 복도에 울리는 자신의 발자국 소리와 긴 복도를 따라 늘어선 여덟 희생자들의 이야기를 바라보면서 그들이 그곳에서 느꼈을 불안과 공포와 대면하면서 전시장에 들어서게 된다. 먼저 첫 번째 주제는 ‘인혁당 재건위’ 사법살인의 희생자 한 명 한 명, 개인의 삶을 조명하고 있다.



이번 전시를 위해 제작된 여덟 희생자들의 초상화와 그들 각각의 살아생전 단란했던 시절의 사진과 추억들, 희생자들을 안타까워하고 그리워하는 가족과 지인들의 마음을 오롯이 담은 기록들은 여덟 희생자들 개인의 역사를 보여준다. 초상화 속의 그들은 모두 한결같이 넥타이에 양복차림의 무뚝뚝한 표정의 모습이고 지금도 흔하게 볼 수 있는 평범한 중년 가장의 모습이다. 빛바랜 결혼사진, 가족사진 속 젊은 아내, 나이 어린 자식들, 오래된 옷차림 등이 그들의 시간이 이미 40년 전에 멈춰져 있다는 것을 알려줄 뿐이다. 그리고 가장의 갑작스런 투옥과 사형은 가족의 시간마저 멈춰버리게 했다. 이 섹션에서 우리는 개인의 평범하지만 소박하고 행복한 삶이 독재시절 공권력에 의해 어떻게 조작되어 순식간에 파괴되었는지 목격할 수 있다.



좁은 복도 건너편에는 평범한 개인과 가족의 삶을 철저하게 부숴버린 자의 삶과 죽음이 전시되어 있다. 수감자들이 수형생활을 했던 3X3.4m의 비좁은 감방에 이젠 그들을 가뒀던 그가 있다. 그는 검은 선글라스를 쓰고 뒷짐을 진 채로 위협적인 모습으로 감방 문에 서 있었다. 이 사진은 너무나 유명한 바로 그 사진,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를 감행한 군인들 사이에 서있는 정치군인 박정희 소장 사진이다. 사진 옆에는 사진의 설명과 그날의 시간이 기록되어 있다. 기록과 함께 있는 사진은 설득하는 힘이 강하다. 정치군인 박정희의 방과 독재자 박정희의 방, 이 두 개의 방의 사진과 기록들은 박정희 개인의 선택과 개인의 삶, 그로 인해 힘겨웠던 한국현대사가 겹쳐서 의미를 생성해내고 있다.



첫 번째 방은 ‘5.16 쿠데타’에서부터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대통령직 대행을 선언하는 박정희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어떻게 한 개인에게 나라가, 민주주의가 약탈되었는지 보여준다. 두 번째 방에서는 1963년 5대 대통령이 되어 1979년 김재규에 의해 살해될 때까지 16년간의 독재시절 공포정치를 보여주는 사건과 박정희 개인의 사진을 중첩하여 전시하고 있다. 이 방에서 인상적인 사진은 작은 방 가운데 설치된 3선 개헌 감행 후 7대 대통령이 된 후 태릉사격장에서 총을 겨눈 박정희 사진과 그 앞에 배치된 1963년 5대 대통령이 되어 거수경례하는 박정희 사진이다. 이 전시공간에서는 독재자와 조작되고 왜곡된 역사, 자기 자신에게 겨눈 총, 당겨진 방아쇠, 그의 죽음을 볼 수 있다.



마지막 주제는 맞은편 감방들과 그 감방 밖 복도에 전시된 ‘인혁당 재건위’ 사건의 사료들이다. 이 좁은 감방들엔 수형 중의 희생자들의 시간이 있다. 그리고 감옥 밖에서 그들을 구명하기 위한 사람들의 노력이 있다. 희생자들의 민주주의 활동과 탄압자료들, 교육공무원 자격증 같은 시민으로서 살아왔던 증거들, 1974년 사건 조작 후 여덟 희생자들이 쓴 상고이유서들과 고문조작의 증거로 제출된 보충상고 이유서들, 가족에게 보내는 미안함과 걱정의 편지들, 구속자 가족들의 구명운동에 참여한 김수환 추기경, 함석헌 선생 등 사회저명 인사들의 탄원서, 사형까지 지니고 있었던 주민증, 손뜨개 조끼, 덧버선, 볼펜과 열쇠, 닳은 칫솔 등 힘든 수감생활을 보여주는 유품들, 사형 후에 희생자들의 명예회복을 위해 썼던 김수환 추기경, 윤보선 대통령 등의 재심요청서들, 2006년까지도 계속되어 왔던 가족들의 재심요청의견서들, 늙은 아내가 또박또박 써내려간 여러 장의 재심요청서의 글자 하나하나는 피멍이고 한이었다. 이 섹션에는 무죄판결을 받기까지 길고 긴 시간의 기록이 고스란히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감방밖에는 구속자 가족들과 민주인사들의 희생자 구명활동과 명예회복을 위한 노력, 추모의 시간들을 기록한 사진이 배치되어 있다.



사법살인은 비단 우리나라만의 일은 아니다. 미국의 대표적 사법살인인 ‘사코와 반제티’ 사건은 1920년 미국에서 아나키스트 이민자라는 이유로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몰려 1927년 사형 당했던 사건이다. 사코와 반제티도 1959년에서야 그들이 범인이 아님을 판결 받을 수 있었다. 거기에는 많은 노력이 있었겠지만 화가 벤 샨의 작품 <사코와 반제티> 연작은 많은 영향을 미쳤고 지금도 벤 샨의 대표작으로 우리에게 잘못된 역사를 기억하게 한다. 그것은 예술이 침묵하지 않고 진실을 예술작품들로 보여주었기에 가능했다. 이후 많은 예술가들은 잊지 않기 위해 영화로 노래로 그들을 불렀다.

노순택, 배후설-메가바이트산성의 비밀 시리즈, 60x60cm, 디지털프린트, 2009(우)_##]

 



이 전시공간의 끝, 좁고 긴 형무소 복도 끝에서 노순택의 사진은 말한다. “살릴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 살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때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리고도 여전히 그 긴 시간동안 살리지 못했다. 그렇지만 지금이라도 그들을 살릴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그들을 잊지 않는 것이고 독재의 시간을 기억하는 것이다.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해서 우리는 예술로서 그들을 계속 불러야 한다. 예술이 진실을 말할 때 우리는 그들을, 우리 역사를 살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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