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속 시대 읽기

B급 좌파 김규항의 글 모음집 나는 왜 불온한가

B급 좌파 김규항의 글 모음집 나는 왜 불온한가




 
고향 친구들을 만날때 마다 낯설다. 아저씨가 다 되어 가는 유부남 사내들의 화제란 건강관리와 재테크, 그리고 아이 얘기가 대부분. 늘 입을 닫고 조용히 들을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어쩌다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하지만 언제나 결론은 매한가지다. 세상이 원래 그렇고 그런 것이라는,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는 자조섞인 결론은 결국 노래방의 고성방가로 이어진다. 서른을 갓 넘긴 사내들의 조루같은 조로를 뒤로 하고 돌아오는 새벽길은 그래서 언제나 쓸쓸하다.

아파트의 크기와 은행계좌의 잔고와 자동차의 종류로 행복을 가늠하는 짐승같은 자본의 가치관에 잡아먹혀버린 친구들의 어깨를 두드리고 돌아설 때 김규항의 글이 생각나는 것은 당연하다.

개혁의 담론에 매서운 칼을 들다
투쟁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보적으로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 한순간도 잠들지 않고 깨어있기 위해서 그의 글을 읽는다. 짧지만 강건하고 쉽지만 묵직한 그의 글은 피곤할 때나 힘겨울 때나 즐거울때나 우울할 때 언제나 강력하다.

허세를 부리지 않고 수사를 남발하지 않으며 단숨에 질러오는 그의 글은 찬물처럼 매섭고 죽비처럼 칼칼하다. 쉬운 우리말로 가까이 있는 벗에게 조곤조곤 속삭이듯 털어놓는 글들은 늘 쉽게 읽히지만 결코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그것은 그가 글을 잘 써서만이 아니라 그의 정신이 백척간두에 있기 때문이다. 역시 중요한 것은 세계관이며 태도이다. 
그는 87년 6월항쟁 이후 절차적 민주주의가 진전되고 개혁적인 성향의 대통령이 두 번이나 당선되어 민주주의가 얼추 이루어졌다는 말에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 

그가 두 번째로 내놓은 글 모음집 『나는 왜 불온한가』에서 가장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것이 바로 개혁의 담론을 대신하려 하는 ‘의사’진보이다. 진보라는 신념을 버렸음에도 80년대의 운동경력을 팔아 새로운 기득권 층으로 등장한 이들은 이제 시민이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지만 김규항이 보기에 그것은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이다. 시민의 힘에 의한 개혁은 단지 ‘변혁운동의 정신을 계승’하는 것이 아니라 ‘변혁운동의 정신을 청산’하는 것일 뿐이다. 주식이 제 값을 받기를 바라고, 핸드폰 사용료가 좀 더 적절하기를 바라는 것으로 세상이 달라질 수 있는가? 낙천·낙선운동에 슬그머니 혁명을 갖다 부쳤지만 과연 그 혁명은 무엇을 바꾸었는가? 그는 개혁이 주류 담론이 되는 시대에도 여전히 억압과 경멸에 처한 사람들을 상기시키며 묻는다. 개혁은 결코 혁명을 대신할 수 없으며 단지 노동자 ·민중의 삶을 능욕할 뿐이다. 

지역감정과 조선일보에 적대적이었던 대통령은 아직까지 국가보안법 하나 철폐하지 못했으며 미국의 침략전쟁을 앞장서서 지지하고 말았다. 과거의 민주화운동 경력이나 의제로는 오늘의 궁핍한 현실을 결코 해결하지 못하며 오히려 역사를 후퇴시키고 마는 것이다. 기존 체제의 질서 속에서 평화적이고 합법적인 방법으로 개혁운동을 펼치는 것으로 우리의 삶이 결코 달라질 수 없음을 증명하며 그는 이제 좀 더 급진적이며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현실에서 불온한 B급 좌파
때문에 그는 과거의 운동경력을 팔아 현재의 안락한 삶에 안주하는 이들을 날카롭게 비판하며, 역사적 격변앞에서 ‘깨우침’으로써 비루하고 덧없는 현실을 ‘초월’하는 얼치기 도사들 역시 믿지 않는다. 세상은 ‘실현 가능한 선으로 조정된 꿈’을 꾸는 사람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불가능한 꿈’을 꾸는 사람들에 의해 바뀌어 왔다는 것이다.

당대에서는 ‘어리석고 비현실적이며 관념적인 사람들’이라는 소리를 들었겠지만 바로 그 ‘어리석고 비현실적이며 관념적인 사람들’이 깨지고 또 깨지면서 역사는 진보해왔고 우리의 암흑도 무너질 것이라 단언한다. 『B급 좌파』 이후 2001년부터 써온 글을 모아둔 이 책에서 그는 현실의 어느 곳에도 안주하지 않고 한결같이
끈질기게 급진적이며 근본적이다.

그래서 세상을 바꾸려하는 사람들과 세상이 조금이라도 바뀌기를 바라는 사람들에게 김규항의 글은 진정한 진보주의자로 살기 위해서 무엇을 고민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데 부족함이 없다. 물론, 김규항의 생각에 누구나 다 동의하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그가 이 책을 통해 말하고 있는 문제 의식들이 가장 치열하며 급진적임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책을 읽으면서 자신이 과거의 추억으로 연명하는 사람인지, 아니면 현재의 고뇌로 살아가는 청년인지를 평가해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이다.

그리고 이 책에는 김규항 혼자만이 출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늘 청년으로 살아가게 하는 많은 동지들이 함께 출연한다. 당대 지배체제와 날카롭게 대결했던 예수와 언제나 계급적이며 급진적인 삶을 옹골차게 꾸려가고 있는 윤구병, 서준식, 고 이오덕 선생의 삶을 통해 얻는 감동의 무게 역시 묵직하다.

이렇게만 말하면 혹자는 김규항을 강팍한 원칙주의자로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책 뒤쪽에 실려있는 일기들은 좀 더 유연하게 살고 싶어서 썼다는 말처럼 그의 일상을 좀 더 가까이서 살펴볼 수 있게 한다. 일기 속에서는 늘 근본주의적 태도를 취하며 오히려 우리를 가르치는 아이들과의 일상이 특히 재미있다. 그래픽 디자이너 안상수가 디자인해서 표지부터 불온한 기운이 흐르는 이 책을 읽고 좀 더 많은 글을 읽고 싶은 이라면 그의 블로그(http://www. gyuhang.net)를 찾으면 되고, 아이들과 함께 좀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은 이라면 ‘고래가 그랬어’ 홈페이지(http://www. goraeya.com/new/)를 찾기 바란다.


* 서정민갑

진보적 음악운동단체인 한국민족음악인협회에서 오랫동안 일하고 있다. 공연기획, 음반제작, 음악강좌 등 다양한 사업을 통해 아름다운 문화의 시대를 만들고 싶은 것이 그의 꿈이다.
문화와 관련한 자유로운 글쓰기도 즐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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