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속 시대 읽기

10년 전 그대로 무대와 거리에서 배우 권해효

10년 전 그대로 무대와 거리에서 배우 권해효


 

시민단체가 가장 신뢰하는 배우


“나름대로 룰이 있습니다. 본업이 연기자이기 때문에, 예정된 촬영이나 공연 시간을 바꿔가며 집회나 관련 행사에 나가진 않습니다. 다만 그 이외 시간엔 아무리 바쁘고 피곤해도 부지런을 떱니다. 하다못해 얼굴이라도 비추고, 활동가나 시민 여러분께 ‘안녕하십니까, 고맙습니다, 힘내세요’라는 뜻을 전하려고 노력합니다.”

배우 권해효(41) 씨는 “활동가도 아니고, 대단한 참여를 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부지런을 좀 떨고 얼굴이나 비추는 정도”라며 ‘참여’나 ‘활동’이라는 말을 한사코 사양했다. 하지만 그는 안티 조선 운동, 대통령 탄핵반대 촛불집회, 호주제 폐지 운동 등 수많은 ‘활동’에 ‘참여’하며 시민단체들로부터 가장 신뢰받는 문화·예술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힌다.

권 씨가 그렇게 부지런을 떨기 시작한 지 올해로 꼭 10년이 됐다. 그는 1996년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에서 주최하는 ‘양심수 1일 감옥 체험’에 나섰던 것을 그 시작으로 삼는다.
“<낮은 목소리>의 변영주 감독이 한 번 해보라고 하길래 그냥 그러겠다고 했습니다. 수의를 입은 채 명동성당 앞 허허벌판에 섰는데 쑥스럽기도 하고 기분이 이상하더군요. 그런데 간수차림을 한 사람이 저를 괴롭히자 민가협 어머님들이 ‘내 새끼 건드리지 말라’며 달려드셨습니다. 쇼나 퍼레이드도 아니고……. 멍 했지요. 그 기억이 꽤나 오랫동안 머리에 남아있었습니다.”

그 무렵부터 권 씨에게는 부지런을 떨 기회들이 자주 찾아왔다. 대학생이 된 전교조 교사들의 후학들이 여름마다 서울대 캠퍼스에서 개최했던 ‘청소년 열린학교’ 연극교실에 하루 강사로 서기도 했고, 구로시민센터 등 지자체 안에서 활동하는 시민단체에서 노동자들을 상대로 연극 강연을 하기도 했다. “내가 아는 것을 가지고 사람들과 관심을 공유하는 게 너무 즐거웠다.”는 것이 그가 처음 무대 밖에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을 때의 느낌이다.

‘성평등 디딤돌’에 선정


그 때 이후 10년 동안 한결같이, 어떤 이슈든 상식에서 어긋나는 일이라는 판단이 서면 똑 부러지는 발언을 서슴지 않았던 권 씨. 그는 세계 여성의 날이었던 지난달 8일(수) 방송인 김미화(42) 씨 등과 함께 ‘성평등 디딤돌’로 선정됐다. 2001∼02년 평등가족 홍보대사, 호주제 폐지를 위한 길거리 캠페인 동참, 관련 행사 사회자 등으로 활동하며 호주제 폐지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은 것이다.
“양성평등이나 호주제 폐지 같은 문제에 대한 지식이 많은 것도 아니고, 젠더의 관점에서 세상을 볼 수 있는 교육을 받은 적도 없습니다. 하지만 호주제가 상식에 어긋나는 일이라는 것만은 분명해 보였습니다. 저도 집에 가면 평균적인 한국 남자들 보다 조금 나은 수준밖에 안 되지만, 딸아이를 낳고 기르면서 앞으로 속상할 일이 너무 많을 것 같았습니다. 지금은 생각나는 대로 표현하고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는 딸이 제도권 교육을 받으면서 자유롭던 표현과 행동을 꺾게 될 모습을 상상하니, 너무 속이 상했습니다.”

 


한국 대신 성차별이 덜 한 외국으로 딸을 조기유학 보내는 방법도 있었다. 하지만 ‘가족은 함께 밥 먹고 살 부비며 같이 살아야 한다.’는 소신을 가지고 있는 그인지라 조기유학은 얼토당토 않은 일이었다. 교육의 질이 높은 사립학교에 보내는 것도 한 방법일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역시 현재 한국 사학재단의 자질을 생각해 보니, 딸을 건강한 아이로 키울 확률이 10%도 안 되는 것 같아서 포기했다. 고심 끝에 권 씨가 생각해낸 것은 “지금 당장 바뀌진 않겠지만 바꾸려는 노력은 해 봐야겠다.”는 것이었다. 나중에라도 딸에게 “우리 딸이 살아갈 세상을 위해 아빠는 그래도 노력이라도 해봤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권 씨는 이렇게 남녀차별은 상식에서 어긋나는 일이라는 ‘판단’에 딸 가진 아빠로서의 ‘공감’ 그리고 주어진 환경에서 할 수 있는 일에 대한 ‘고민’들을 보태 호주제 폐지 운동에 나섰다. 한국여성단체연합이 ‘성평등 디딤돌’로 인정했을 만큼 열심히 활동했지만 “사회는 최광기 씨 같은 좋은 분들이 다 봤고 난 그냥 옆에 서 있었다. 사회를 잘 못보기 때문에 가만히 있었던 건데, 그것 마저도 여성 사회자에 대한 배려라고 좋게 봐주셔서 상을 주신 것 같다.”며 다시 슬쩍 칭찬을 피해갔다.

정치적 소신 드러낸 배우


권 씨는 결코 대단한 일이 아니라는 듯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칭찬들을 부담스러워했다. 하지만 성향이 다양한 대중들과 소통해야 하는 직업적인 특성상, 문화·예술인 그 중에서도 특히 배우가 정치·사회적 소신을 공공연하게 밝히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권 씨 역시 호주제 폐지 운동에 얼굴을 내민 뒤-본인은 대수롭지 않다지만-고충을 겪기도 했다. 호주제에 찬성하는 시청자들이 권 씨가 출연하는 광고의 광고주들에게 항의 전화를 거는 사태가 벌어졌던 것이다. 더구나 권 씨는 지난 2001년 ‘안티조선 영화인 선언’에 영화배우로는 드물게 이름을 올렸다.

대중들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조선일보에 드러내놓고 반기를 든 것이다. 많은 이들이 결코 쉽지 않았을 그의 행보에 찬사를 보내면서도 걱정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하지만 권 씨 자신은 그 점에 있어서 오히려 태연했다.

“사실 이익이 된다고 생각하는 많은 것들이 얼마나 얄팍합니까. 그걸 깨닫고 나면 편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얄팍한 이익을 움켜쥐기 위해 뒷말만 하고 있으면 세상은 퇴행하고, 스트레스도 더 쌓입니다. 솔직하게 말하고 실천에 옮기면 몸과 마음이 편해집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원칙을 갖는 게 중요하고 말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말만 하고 아무 것도 안 하면 창피하잖아요. 가령 저 같은 경우, 5년 전 선언했던 안티조선 원칙을 아직도 지키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조선일보와 인터뷰를 안 하기도 하고, 출연작을 홍보할 때도 방송사나 극장 홍보담당자에게 ‘어쩔 수 없이 홍보자료를 보낼 수는 있겠지만 내가 나온 사진은 좀 빼고 보내라’고 먼저 얘기합니다.”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하는 권해효


지난달 20일(월) 저녁 서울 종로구 낙원동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린 ‘한국영화 1996’에서 권 씨의 처음이자 마지막 ‘영화 주연작’인 박헌수 감독의 <진짜 사나이>가 재상영 됐다. 10년 전 ‘양심수 1일 감옥 체험’에 섰을 무렵 권 씨의 모습이 스크린을 가득 메웠다. 박헌수 감독은 상영을 마친 뒤 ‘관객과의 대화’에서 “권해효는 10년 전 그때도 의견이 많고 분명한 배우였다.”고 평가했다. 당시로선 무척이나 ‘앞선 영화’를 선뜻 택할 정도로 좋고 싫음이 분명했고, 촬영장에서 감독에게 자신의 의견을 거침없이 제시할 정도로 똑 부러지는 배우였다는 것이다. 대통령 탄핵을 반대할 때, 호주제 폐지를 주장할 때 그랬던 것처럼, 무대 위나 카메라 앞에서도 할 말은 하고 말 한대로 움직이는 그의 태도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평가였다.
지난 1990년 연극 <사천의 착한 여자>로 데뷔한 그는 무대 안팎에서 일치하는 이런 태도를 바탕으로 배우로서도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해왔다. 그를 대중들에게 널리 알린 텔레비전 드라마에서는 일명 ‘선배·동료 전문배우’로 통하며 가장 눈에 띄는 조연배우 가운데 하나가 됐고, 연극무대에서는 주목받는 연극의 안정감 있는 주연배우로 명성을 쌓았다. “지난달 26일 방송을 마친 KBS 주말드라마 <인생이여, 고마워요>와 이달 9일까지 공연하는 연극 <날 보러 와요>에 동시에 출연하며 정신없는 나날을 보냈다.”는 그는, 곧 이어 인간복제 문제를 다룬 영국 극작가 샘 셰퍼드의 2인극 <어 넘버> 무대에도 오를 예정이다.

 


전정윤<한겨레신문 기자>/ 사진 황석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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