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속 시대 읽기

향수를 넘어 내일을 향하는 안치환의 노스텔지어

향수를 넘어 내일을 향하는 안치환의 노스텔지어 

하필이면 그날이 4월 19일이었다. 안치환(40) 씨는 이날 오전의 4·19혁명 기념행사에서 노래를 부르고 왔다고 했다. 막연히 ‘수요일’로 기억했던 인터뷰 날이 마침 4·19혁명 기념일이었던 것이다. 무슨 노래를 했냐고 물었더니 <진달래>를 불렀다고 했다. ‘그날 쓰러져간 젊음 같은 꽃 사태가~’라는 노랫말로 4·19 영령들을 기리는 <진달래>는 마침 안치환 씨가 지난달에 발표한 앨범 「비욘드 노스탤지어」에 수록돼 있다. 「비욘드 노스탤지어」는 <임을 위한 행진곡> 이전의 민중가요를 담고 있다. 일제 시대 독립군이 불렀다는 <해방가>로 시작해서 <농민가>를 거쳐 ‘코카콜라 한병!’이라며 익살맞게 경제개발시기의 세태를 풍자한 <코카콜라>까지, 민주화운동 시대의 노스탤지어를 자극하는 스물 한 곡의 노래가 이어진다. 시기로 구분하면 1980년대 중·후반 전투적 민중가요가 등장하기 전까지 대학가에서 불렀던 노래들이다.

그의 뿌리가 된 노래들

안치환 씨는 「비욘드 노스탤지어」의 노래들에 대해 “나의 뿌리를 이루는 노래들”이라고 말했다. 그는 “노래를 연습하고 녹음하면서 울컥 울컥해서 노래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순간이 많았다.”고 말했다. 그 노래를 같이 했던 얼굴들, 그 노래를 불렀던 시절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조금은 뜻밖이었다. 안치환 씨가 1980년대 이전의 노래를 담은 앨범을 발표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솔직히 ‘또 야?’라는 생각과 ‘얼마나 팔릴까’ 하는 생각이 겹쳤다. 음반시장의 극심한 불황 속에서 이제는 아련함마저 스러져가는 그 시절의 그 노래들을 굳이 다시 부른 이유가 궁금했다.

더구나 안치환 씨는 이미 1990년대 중반 같은 시대의 노래들을 모아서 「노스탤지어?」라는 앨범을 발표한 적이 있다. 이 음반은 상당한 호응과 적지 않은 비판을 받았다. 그의 표현대로 “그 음반은 적잖이 팔렸으며, 과거를 상업화한다는 ‘비난’도 받았던” 터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느새 10년이 흘렀다. 안치환 씨는 “또다시 쓴 소리를 들을 지도 모르지만, 기록 작업의 의무감을 느꼈다.”고 했다. 1980년대 중·후반 이후의 노래들은 그나마 음반작업이 이루어졌지만, 1980년대 초반 이전의 노래들은 제대로 된 레코딩 조차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뼈아픈 사실 하나. 이제는 안치환이 아니면 더 이상 그 노래들을 음반으로 만들어낼 가수도 남아 있지 않다. 안치환 씨는 “음반시장이 워낙 불황이라 이제 욕 먹을 일도 없지 않겠느냐”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했다. 음반시장의 불황은 역설적이게도 그에게 홀가분하게 기록 작업을 다시 할 기회를 마련해주었다. 기록 작업이라고 생각하면서 음악적 욕심도 자제했다. 그는 “음악적 기교를 자제하고 원곡에 충실하려고 했다.”고 말했다. 그래서 대부분 3분을 넘지 않는 수록곡들은 기타를 위주로 한 단출한 편곡으로 만들어졌다.

그 많던 민중가수들 중에 남은 이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아니 회한을 느낀다. ‘그 많던 민중가요 가수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민중가요는 1980년대 문화운동을 대표하는 예술장르였다. 사람들은 모이면 민중가요를 불렀다. 거리에서는 투쟁가를 부르면서 분노하고 모임에서는 서정적인 민중가요를 부르면서 눈물을 흘렸다. 불과 10여 년 사이, 1990년대를 통과하고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민중가요의 영향력은 급격히 떨어졌다. 영화계에서 ‘운동권’ 출신 인사들이 상당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에 견줘 민중가요의 급격한 쇠락은 격세지감이란 말을 실감하게 했다. 

 
 

안치환 씨는 “‘파업전야’ 만들던 사람이 멜로영화를 만들기도 하지만, 노래운동 하던 사람은 민중가요를 부를 수밖에 없는 것 아니냐”는 말로 ‘격세지감’을 해석했다. 그만큼 가수라는 직업의 운명은 운신의 폭을 좁히고, 주류 안에서 살아남는 일을 어렵게 했다.
민중가수 출신인 안치환도 지난 세월동안 주류 가요계 안에서 때로는 자신을 지키면서 때로는 오해받으면서 가수의 길을 걸어왔다. 그래서 오늘, 가수 안치환은 사람에 따라 다르게 기억되기도 한다. 노래교실의 어머니들은 안치환을 <내가 만일>을 부른 발라드 가수로 알 수도 있고, KBS의 열린 음악회를 통해서만 그를 본 젊은 세대는 그를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를 부른 가수로 기억할 수도 있다. 그에게 이런 현실을 물었더니 그는 “제 히트곡은 <철의 노동자>에요.”라고 잘라 말했다. 그러고 보면, 그의 노래 중에서 20년 가까이 집회 현장에서 불려 온 <철의 노동자> 만큼 많이 불린 노래가 있겠는가. 물론 안치환 씨를 <광야에서>,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를 작곡하고 부른 민중가수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다수다. 하지만 세월은 이렇게 그에게 몇 개의 얼굴을 선물했다.



그가 몇 개의 얼굴을 가지는 동안 그 옆의 얼굴들은 사라져갔다. 민중가수 출신으로 가요계에서 자리를 잡은 가수는 매우 드물다. 그래서 그에게는 ‘살아남은 자의 슬픔’도 묻어난다. 그는 “존경할만한 선배가 없다”고 했고, “함께 가는 동료도 드물다”고 했다. 거의 ‘유일한’ 생존자에게 사람들은 기대가 크고 요구가 많다. 어떤 노래를 하면 변했다는 비판이 나오고, 또 어떤 노래를 하면 향수에 의지한다는 비아냥도 들린다.
이렇게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의 대중도 바뀌었다. 그는 “예전에는 대학축제나 집회에 자주 불려갔다면 요즘에는 시민단체나 지방자치단체 행사에서 부르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그의 대중이 운동하는 젊은층에서 중장년층, 어린아이까지 포함하는 다양한 시민으로 바뀐 것이다. 그의 젊은 대중이 나이 들면서 가정을 이룬 영향이기도 하다. 대학에 가도, 예전에는 축제에 초대됐지만 요즘에는 특강을 하러 간다. 그는 “교수님들이 특강시간을 마련해서 나를 부르는데, 학생들에게 노래도 들려주고 시대배경도 설명해 준다.”며 “교수님들이 내 노래를 듣고 리포트를 써오라고 하기도 한다.”고 웃었다.


거꾸로 가는 세상을 향해 도전하는 가수

 

그렇게 세월이 흘렀지만, 그는 록음악으로 거꾸로 가는 세상에 도전하고 포크음악으로 현실의 아픔을 노래하면서 가수의 길을 걸어왔다. 그는 8장의 앨범을 통해 세상에 대한 발언을 멈추지 않았다. 고 김남주 시인의 시를 빌어 잊혀져가는 시대정신을 되새겨 왔고, 자신의 음악으로 희망이 사라져가는 시대의 암울함을 노래해 왔다. 
세상이 갈수록 가벼워졌지만 그의 노래는 세상의 흐름을 거스르기도 했다. 2004년에 발표한 8집 앨범에서는 오히려 발언의 강도를 높였다. 효순이와 미선이를 추모하는 노래를 만들었고 미국에 대한 직설적인 비판을 담은 노래도 담았다. 음악적으로는 록음악과 포크음악의 사이에서, 때로는 두 장르를 넘나들면서 음악적 실험을 계속해 왔다.

올해로 마흔, 어느덧 그도 중년이다. 인터뷰 도중 걸려온 딸의 전화를 받으면서 목소리가 살갑게 바뀌는 아버지다. 그에게는 중학교 1학년 아들과 초등학교 5학년 딸이 있다. 밥벌이의 고달픔에 시달리고 교육문제를 걱정하는 나이다. 주변의 친구들을 보면 나이를 실감하게 된다. 그는 “친구들을 보면 참 안 그럴 것 같은 친구들도 세상에 길들여져서 살아가는 모습을 보게 된다.” 면서 “일상에 매몰된 삶을 자꾸 건드려서 사람들을 생각하게 하고, 자기 안위만을 위하는 세상을 조금은 불편하게 하는 노래를 해 왔고, 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이미 올 가을에 발표할 9집 앨범 작업을 상당히 진행한 상태다. 8집 앨범이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를 강조했다면 9집 앨범에는 보편적인 일상사를 담고 싶다고 했다.



그는 앞으로 물신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소통의 단절을 경고하고 소통의 가능성을 일깨우는 노래를 하고 싶다고 했다. 그것이 그가 생각하는 오늘날의 민중가요다. 그리고 자신의 노래가 밝고 희망적이었으면 좋겠다는 소망도 덧붙였다. 또 하나 해야 할 기록 작업이 있다면……. 국악풍의 노래들을 모아서 음반을 만드는 일이다. 민중가요의 한 흐름을 이루었던 민요풍의 노래들을 다시 부르고, 새로운 민요풍 노래도 만들어 음반을 내고 싶다.
이렇게 안치환은 여전히 청바지를 고집하는 40살의 민중가수로 살아가고 있다.


신윤동욱<한겨레21 기자>/ 사진 황석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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