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속 시대 읽기

오프라 윈프리를 꿈꾸는 방송인 김미화

오프라 윈프리를 꿈꾸는 방송인 김미화

  아무래도 아파 본 사람이 아픈 사람의 마음을 잘 이해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는 어릴 때 ‘가난을 등에 업은 소녀’였다. 지지리도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소녀시절 시장통에서 야채행상도 해보았고, 절치부심 스무 살에 개그우먼의 꿈을 이루었으나 가난한 살림에 쫓겨 밤무대를 뛰다가 방송국 피디에게 ‘찍혀’ 그의 꿈을 제대로 펴지 못하는 설움을 겪었으며, 여성으로 한창 행복할 나이에는 이혼의 아픔을 겪고 두 딸을 혼자 키우고 있다.

남부럽지 않게 성공했지만, 남 못지않게 고생도 해본 그는 그래서 다른 사람의 통곡 소리에 귀를 막지 못한다. 옆집 노인이 아프면 내 어머니가 아픈 것처럼 슬프고, 앞 동네 여성들이 호주제로 고통 받으면 남의 일처럼 여길 수가 없다.

다행히 하늘은 그에게 고통을 주는 대신 연민의 능력도 주었다. 그래서 그는 여전히 성공한 뒤에도 세상의 아픔을 반쯤은 함께 짊어지고 산다. 결식아동을 돕는 유니세프 한국위원회, 지구의 신음소리에 귀 기울이는 녹색연합, 여성차별에 맞서 싸우는 여성단체연합……. 그는 스스로도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각종’ 사회단체의 홍보대사 직함을 달고 있다.
남들은 “왜 이렇게 많이 하느냐?”고 묻지만, 그는 “눈에 보이면 외면할 수가 없어서”라고 답한다. 오히려 “나를 필요로 하는 곳에 가서 도와드렸을 뿐인데, 고맙게도 마음을 닦는 기회를 얻었다.”고 겸손해한다. 나이 들수록 멋있어지고, 사십대를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절로 만들고 있는 사람, 개그우먼 출신 방송인 김미화(43세) 씨를 만났다.

 

개그우먼 출신의 시사프로그램

 

“참, 투표 안 할 수도 없고, 새벽에 나가서 투표 했잖아요.” 그는 싫지 않은 표정으로 푸념을 늘어놓았다. 네티즌들은 지난 지방선거에 ‘가장 투표할 것 같은 연예인’ 1위로 김미화 씨를 꼽았다. 이런 영예를 안았으니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가운데도 투표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새벽이 아니면 투표할 시간도 없을 만큼 바쁜 한 주를 보내고 있다. 지난해 12월 1일에 시작한 SBS <김미화의 U>가 어느새 100회를 넘겼고, MBC 라디오 <김미화의 세계는 그리고 우리는>은 어느새 4년째 진행하고 있다. 일주일에 한번씩은 SBS <재미있는 TV 천국> 녹화를 하고, KBS 개그프로그램 <개그사냥>에서 심사도 보아야 한다. 이렇게 그는 마흔을 넘어서 전성기를 맞고 있다. 아니 아직 그의 전성기는 오지 않았다.
하늘은 남들을 돕는 자를 돕는 법이다. 그가 세상에 밀착할수록 세상은 그에게 관심을 두었다. 그가 2000년대 들어 사회운동에 동참하면서 방송인 김미화의 전성시대도 시작됐다. 물론 사회운동에 동참한다고 저절로 세상이 그에게 기회를 주는 것은 아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그는 일찌감치 방송에서 휴머니즘을 구현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품었고, 꿈을 이루기 위해 늦깎이로 대학생이 돼 사회복지학도 공부했다.

 

 

항상 책을 끼고 다니면서 세상에 관심을 가졌고, 기회가 닿으면 세상과 부대끼기를 주저하지 않는 그에게 세상은 꿈을 펼칠 기회를 주었다. 여성 연예인 출신으로 전무후무하게 시사라디오 방송 <김미화의 세계는 그리고 오늘은>을 진행할 기회가 주어졌고, 그는 성공했다.
솔직함이 그의 유일한 무기였다. 그는 방송을 하면서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했고, 궁금한 것은 물어보았다. 어떤 때는 어눌한 것처럼 보였지만 그의 진심은 인터뷰하는 사람의 마음을 열었고, 청취자들의 가슴을 열었다.

“내가 전문가가 아니니까 몰라도 이해해주고, 전문가가 아니라서 제 방송이 쉽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비전문가의 역설’이다. 과연 개그우먼 출신 여성이 시사프로그램 진행을 제대로 할 수 있겠느냐는 우려를 깨끗이 씻고, 2004년에는 문화방송 연기대상 라디오 우수상도 받았다.

 

그의 못 말리는 솔직함은 쉽지 않은 커밍아웃으로 이어졌다. 호주제 폐지가 뜨거운 논란에 휩싸였을 때, 그는 “나는 김미화가 아니라 박미화였다.”고 ‘뜨겁게’ 커밍아웃했다. 어머니가 재혼해서 새 아버지와 살면서 겪었던 자신의 아픈 가족사를 더 아픈 여성들을 위해서 기꺼이 내어 보였다. 그가 여성단체연합을 비롯한 사회단체의 홍보대사직을 단순히 명예로 여기지 않는다는 증거였다. 그는 “하마터면 가족들과 의절할 뻔 했다.”고 돌이켰다. 자신의 커밍아웃으로 어머니를 비롯한 가족들이 상처를 받은 것이다. 가족과 의절할 뻔한 위기를 겪었지만, 그의 두 번째 커밍아웃은 이어졌다. 그는 <김미화의 U>를 진행하면서 장애가 있는 첫 아이를 낙태한 사실을 털어 놓았다. 이렇게 솔직한 그 앞에서 사람들은 무장해제 당하고 솔직해 질 수밖에 없다.

공익성이 강한 토크쇼 진행

그의 성공은 라디오에서 텔레비전으로 이어졌다. 한국의 오프라 윈프리를 꿈꾸는 그는 공익성이 강한 토크쇼 <김미화의 U>를 진행하고 있다. <김미화의 U>는 <오프라 윈프리 쇼>를 벤치마킹했음을 숨기지 않는다. 저널리즘과 휴머니즘을 결합한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었던 그에게 <오프라 윈프리 쇼>는 좋은 모델이었다. 굳이 흉내 내지 않아도 삶의 내력이 오프라 윈프리와 닮았다. 가난 탓에 고생한 어린 시절이 닮았고, 여성으로 고통을 경험한 역사도 비슷했으며, 무엇보다 고통을 응시하는 솔직함이 닮았다. 그의 커밍아웃처럼 오프라 윈프리는 흑인 여성으로 십대시절 강간당한 경험을 용감하게 고백했다. 그래서 <김미화의 U>는 그에게 단순한 프로그램 이상이다.

그는 <김미화의 U>에 대해 “낮 방송대 프로그램이라 시청률에 매달리지 않고 여러 가지 실험을 해볼 수 있어 좋다.”면서 “공익적인 내용으로 사회를 조금은 바꾸는 방송을 만들고 싶다.”고 희망했다.

그는 이 프로그램을 함께 만드는 젊은 작가, 피디들과의 작업이 더없이 즐겁다. ‘젊은 피’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는 젊은 사람과 일하면 젊은 감각도 배울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그는 “방송예산이 부족해 진행에 더빙까지 일인다역을 해야 하지만 마음이 통하는 젊은 사람들과 함께 작업하니까 힘든 줄 모른다.”고 말했다. 그는 나이든 사람이 먼저 다가가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언제나 함께 작업하는 친구들에게 “선생님”이 아니라 “언니”라고 부르라고 당부한다. 어느새 개그우먼 ‘김미화’ 보다 방송인 ‘김미화’가 자연스러워진 현실에 약간의 불만도 느낀다. 그는 “같이 일하는 친구들이 내가 어쩌다 오락프로그램에 나오면 저렇게 망가지는 여성과 내가 일을 하고 있었나 하면서 낯설다고 한다.”고 말했다. 공익성이 강한 프로그램을 오래 진행하다 보니 어느새 개그우먼 김미화가 잊혀지고 있다는 걱정이다.



그는 “공익성 프로그램을 하다 보니까 이제는 가벼운 프로그램에서는 불러주지도 않는다.”며 웃었다. 요즘에 뒤집기를 벼르고 있다. ‘더 망가져야겠다’고 다짐도 한다. 그는 “가벼운 프로그램에 나와야 무거운 프로그램을 진행해도 가볍게 보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자신을 끝끝내 “코미디언”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나의 단 하나의 전문성을 꼽자면 코미디 전문가”라며 “시사프로그램으로 단련해서 다리에 힘이 붙으면 언젠가 시사코미디를 꼭 하고 싶다”고 말했다. 목소리를 흉내 내고 뒤로 넘어지면서 웃기는 시사코미디가 아니라 시사만화의 한 컷처럼 풍자와 위트가 한 순간에 농축된 시사코미디를 하고 싶은 것이 그의 바람이다. 그래서 굳이 신인 개그맨들에게 조언을 해주는 <개그사냥>의 심사위원을 자처하며 개그맨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다.
그는 개척자의 부담감도 느낀다. 한국의 코미디언 어느 누구도 가지 않았던, 아니 가지 못했던 길을 개척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잘 못 하면 후배 앞길 막는 선배가 되지 않느냐”며 “내가 잘 하면 코미디언 후배들의 일자리를 창출하는 것이 되니까 은근히 책임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코미디언이라는 고향을 잊지 않은 그의 각오는 단단하다. 그는 “우스개 소리로 ‘웃기고 자빠졌네’ 그러잖아요.”라며 “정말로 웃기다 무대에서 자빠져 죽고 싶다.”고 희망했다.


마흔이 아름다운 사람, 김미화


그는 이제 솔직함을 넘어 솔선수범 하려고 한다. 그는 “요즘엔 어떻게 방송을 통해서 어려운 이웃을 도울까 고민한다.”고 말했다. 얼마 전 <김미화의 U>에서 시도한 ‘100만 원의 행복’이라는 프로그램은 그의 첫 번째 솔선수범 작품이다. ‘100만 원의 행복’은 100만 원의 창업지원금을 어려운 이웃에게 주는 내용이었다. 남들에게 도움을 청하기 전에 그가 먼저 3천만 원을 내놓아 어려운 이웃 30명에게 100만 원씩 창업자금을 지원했다. 그리고 캠페인은 월 1회 ‘U 천사 데이’로 이어지고 있다. 이렇게 사회활동에 자선활동까지 더해지면서 어느새 그는 정치권에서도 탐내는 이름 석자가 됐다. 정치의 계절이 다가오면 심심찮게 그에 대한 기사가 나온다. 그는 “아무리 정치에 관심 없다고 해도 자꾸 정치에 얽힌 기사가 나온다.”며 “좋은 일을 할수록 오히려 운신의 폭이 좁아진다.”고 하소연했다. 이렇게 스스로 의심을 받으니, 선·후배들에게 좋은 일에 동참하라고 사회운동에 함께 하자고 권유하기도 어렵다. 괜히 선·후배들까지 의심을 받으면 어쩌나, 걱정이 앞서는 탓이다.


그는 “선·후배들을 끌어들였다가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까 무서워 사회단체에서 도움을 청하면 ‘내가 해드릴게요’하게 된다”며 “그러다 보니까 직함이 많아졌다”고 웃음을 지었다.

참, 그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와의 인연도 잊지 않았다. “지난해인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 주최한 캠프에서 사회를 봤는데, 젊은 부부들이 지방까지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캠프에 참여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 뜨거운 열기에 놀랐다.”고 말했다. 새삼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배웠다는 것이다. 이렇게 나이 들수록 멋있어지는 그는 마흔 셋에도 여전히 감동하고 배우면서 전진한다.


신윤동욱 한겨레21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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