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속 시대 읽기

방송 진행자가 된 거리의 사회자 최광기

  1993년 도시빈민문화제 사회자로 데뷔하고, 1995년 민주노총 창립 문화제라는 기념비적인 행사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널리 알린 이래, 최광기(38)는 늘 ‘거리의 사회자’였다. 그는 쉽고 직설적인 언변, 탁 트인 목청, 그 만큼이나 시원시원한 말투로 집회 현장을 가득 메운 수천, 수만의 인파를 사로잡았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반대 당시 촛불집회의 마이크를 잡으면서 집회 사회자로는 이례적으로 자신의 이름 석자를 일반인들에게도 각인시켰다. 그랬던 그가 지난 5월, 거리가 아닌 방송에서 본격적으로 마이크를 잡기 시작했다.

SBS 라디오의 아침 시사 프로그램인 ‘SBS 전망대’(평일 오전 6~8시)의 진행을 맡게 된 것이다. MBC 라디오의 간판 프로그램인 ‘손석희의 시선집중’과 같은 시간대에 맞붙는 시사 프로그램의 진행자로 거리의 사회자 출신 여성이 발탁됐다는 점에서 세간의 이목이 집중됐다. 최광기를 만나 지난 4개월 동안 거리를 떠나 방송을 진행하면서 느낀 소회와 근황 등을 들어봤다.

‘거리’와는 다른 ‘방송’, 하지만 ‘광기’는 살아있다

“거리에서 사회 보는 것과 방송 진행은 완전히 다른 영역이더라구요. 사회자 경험이 벌써 15년 가까이 되어 가는데도 방송에서는 거의 초짜가 된 기분이에요. 거리에서는 무당의 살풀이같은, 정말로 풀어헤쳐진 ‘광기’같은 열정을 원해요. 하지만 방송에서는 정제된 ‘(최)광기’를 원하지요. 게다가 사회를 그렇게 오래 봤지만, 집회 사회의 특성상 모니터링이란 걸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거든요. 첫 방송 시작하면서부터 안팎에서 모니터링 결과가 들어오는데, 조사 하나, 어미 하나 틀린 것까지 지적을 당하니까 자꾸 조심스러워져서 마음 고생도 많았어요. 지난 넉 달 동안은 거리 사회와 방송의 근본적인 성격 차는 물론 시간 맞추기, 광고 등 방송의 크고 작은 것들에 익숙해지는 과정이었던 것 같아요.”

 

‘거리 사회’와 ‘방송 진행’의 차이 때문에 시행착오도 겪었지만, 사회자로서 최광기 고유의 장점들은 방송에서도 여전하다. “피디 말로는 목소리가 웬만한 남자 아나운서보다 더 크대요. 처음 방송 시작할 때 마이크에서 입을 멀찌감치 떨어뜨려서 진행하라는 주문도 받았지만, 아침에 제 목소리로 하루를 시작하면 잠이 확 깬다던데요.”

  하지만 힘차서 기분좋은 그의 목소리보다 더욱 중요한 건 거리에서보다 수위는 낮아졌을지언정 여전히 직설적이면서도 쉽고 편안한 그의 진행 스타일이다. “부동산 가격이 한창 문제되던 당시 한 재정경재부 관료가 제 프로그램에 출연했어요. 그분한테 ‘어디 사시냐?’고 물었더니, 강남에 사신다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집 값이 오르면 좋으시겠어요. 그래서 집 값 안 잡으시는 거 아니예요?’라고 받아친 적이 있어요. 부동산 문제라는 게 워낙 이해관계가 복잡하고 해법도 다양해 풀기 어려운 과제잖아요. 그걸 좀 툭 터놓고 쉽게 지적하고 싶었죠.”

소수자 목소리 대변하고파

재경부 관료나 정치인처럼 자기를 알리는 데 익숙한 인사들이 최광기의 방송에 나와 종종 식은땀을 흘린다면, 자기 목소리를 내는 데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정 반대로 편안함을 느끼는 편이다. 그건 최광기의 소수자 정체성과도 깊이 관련된 부분인데, 그는 “나 스스로 소수자이기도 하거니와, 소수자로 외면당하고 무시당하는 사람들의 작지만 개인적인 이야기를 전하는 역할을 하고 싶은 바람도 있다.”고 말했다. 

 수만 명이 운집한 속에서도 늘 한가운데 우뚝 서서 위풍당당했던, 지금은 매일 아침 그때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목소리를 전하고 있는 그이기에 최광기의 소수자 정체성이 선뜻 이해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뜻밖에 그는 녹내장으로 오른쪽 시력을 거의 상실한 장애인이다. 1997년에 녹내장 말기 선고를 받았고, 세상을 흐릿하게나마 볼 수 있는 날도 그리 오래 남지 않았다.

“사회를 볼 때도 시력은 계속 안 좋았어요. 앞이 안 보이는 바람에 무대에서 떨어져 오른팔을 다쳤고, 그때 상처로 지금도 오른팔이 제대로 펴지지 않는 또 다른 장애가 생기기도 했죠. 많은 사람들이 제 얘기를 알게 되면 이래요. ‘어머, 눈 어떻게 해?’라고. 뭐 어쩌라구요. 눈은 이미 이렇게 된 건데. 그런 걱정 해줄 시간에 저 같은 사람들과 어떻게 살 지를 고민해봤으면 좋겠어요. 이른바 다수자들이 소수자들에 대한 생각을 바꾸고, 말을 바꾸고, 행동을 바꾸는 데 미력하나마 제 힘을 보태고 싶어요.”

소수자라는 정체성이 최광기에게 이런 의지를 심어줬다면, 그에게 구체적인 방법을 터득하게 한 건 바로 상계동 어머니학교에서의 교사 경험이었다. 최광기는 대학시절 ‘딱 한 달’이라는 선배의 말에 넘어가 당시 철거촌이었던 상계동에 있는 어머니학교에 첫 발을 내딛었다. 하지만 ‘한 달’은 ‘십 년’이 됐고, 그는 ‘상계동 어머니학교 처녀 교장’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최광기는 “배움이 짧았던 어머님들한테 보다 쉽고 재밌게 한글을 가르치기 위해 이런 저런 방식들을 적용해봤던 게 지금의 나를 있게 한 버팀목이 된 것 같다.”며 그 시절을 떠올렸다.



“집회 사회를 보든, 정치인 연설 트레이너를 하든, 방송을 진행하든 제 원칙은 한결같아요. ‘쉽고, 편안하게!’ 연설 트레이너를 할 때도 정치인들이 이구동성으로 저처럼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가며 편하게 가르쳐주는 선생은 없었다고 하는데, 그게 다 처녀 교장 시절 쌓은 현장 경험에서 비롯된 거예요. 이런 노하우와 더불어 가진 것 없이 정말 고되게 남편과 자식들을 건사하면서도 건강한 웃음을 잃지 않았던 어머님들을 보며 인생의 이치를 깨달았는데, 이것도 덤이라고 하기엔 너무 중요한 경험이었죠.”


지금은 유쾌한 변화기, 제 목소리 지키는 사람으로 남을 것

대학 사회학과에 진학해 사회에 눈을 뜬 뒤 20여년 동안 끊임없이 자신을 바쳐 일해왔던 최광기는, 자신의 이름을 딴 방송을 시작한 요즘 “아무리 피곤해도 새벽 4시면 눈이 번쩍번쩍 뜨이는 인생의 유쾌한 변화”를 받아들이고 있다. 그는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했지만 이념이나 원칙을 쫓느라 건강도 개인적인 행복도 돌보지 않은 채 껍데기처럼 살았던 게 사실”이라며 “우리 속의 나보다는 나를 중심으로 우리를 봐야겠다는, 거대담론보다 생활을 바꾸는 운동과 일상의 작은 변화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차에 재충전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고 말했다.

 


물론 ‘재충전’을 위한 희생도 크다. “얼마 전 아침에 출근해서 모니터를 보는데 대추리에 공권력이 투입됐더라구요. 그 공포와 불안을 너무 잘 알기 때문에 돌아버리겠더군요. 그날 방송하는 내내 허둥대며 눈물을 흘렸어요. 그러고 난 뒤 대추리에서 사회를 봐달라는 연락이 왔어요. 하지만 시사 프로그램을 진행하다 보니 사회적으로 민감한 이슈가 걸린 집회는 사회를 맡는 게 어려워서 정중히 거절했는데, 죄인이라도 된 듯 죄송했지요.”
하지만 그는 “마음은 언제나 거기(거리)에 가 있고, 언제나 관심을 놓지 않고 있다.”며 “재충전한 뒤 사람들 앞에 더 좋은 모습으로 서겠다.”고 다짐했다. 
“운동판에서 1980년대를 거쳐 온 많은 사람들이 사회 각계 주류로 진출했어요. 하지만 ‘금뱃지’같은 권력을 얻으려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잊고, 지켜야 할 약속들을 지키지 않고 있는 건 아닌지 되돌아볼 때라고 생각해요. 저 같은 사람이 방송 진행자가 된 것도 운동권들이 주류로 진출한 한 예겠죠. 하지만 전 앞으로도 지킬 것은 지키는 사람으로 남을 거예요. 꾸준히 제 고유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으로 남고 싶어요.”



전정윤 한겨레신문 기자
사진제공 최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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