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구술) 이야기

우리의 소중한 꿈이 깨지고 있다

 
새해 첫 아침을 열며 명나라 문인 진계유가 쓴 안득장자언(安得長子言)을 생각한다.
고요히 앉아본 뒤에야 평상시 마음이 경박했음을 알았다. 침묵을 지킨 뒤에야 지난날의 언어가 조급했음을 알았다. 일을 뒤돌아본 뒤에야 전날에 시간을 허비했음을 알았다. 문을 닫아 건 뒤에야 앞서의 사귐이 지나쳤음을 알았다. 욕심을 줄인 뒤에야 예전에 잘못이 많았음을 알았다. 정을 쏟은 뒤에야 평일에 마음 씀이 각박했음을 알았다. ……

경박했고 조급했으며 욕심이 많았기에, 침묵으로 과거를 성찰하고 미래를 계획하는 ‘텅 빈 충만’을 누리기를 새해를 맞아 소망한다. 텅 빈 충만을 바라기엔 그러나, 지난 한해가 너무나 소란했다. ‘꽉 찬 공허’라고밖에 달리 표현할 길 없는 빈 말들의 잔치로 어지러웠다. 철 지난 공화국 시절에서나 종종 보아왔던 장면들이 현재에 오버랩 되어, 흡사 한편의 옛날 영화를 보고 있는 듯, 과거가 관에서 튀어나와 현재가 되었다. 다시는 떠올리거나 보고 싶지 않던 영화. 그것을 틀고 돌리는 자들의 구태와 견강부회(牽强附會)하는 모습들을 시시각각으로 보아야 했다. 흐르는 물에 눈과 귀를 씻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런 판국에 어찌 새해를 맞았다고 희망을 말하겠는가. 칼릴 지브란의 표현처럼, 우리들의 귀가 도시의 시끄러운 소음을 삼켜야 하는데, 어찌 그 귀로 들판의 노래를 들을 수 있겠는가 말이다.

역사책을 고쳐서 역사를 바꿔보겠다고 하는 무서운 일이 일어나기도 하니, 사필(史筆)의 매서움을 모르는 자들이 설치고 있는 것이다. 과거 독재권력에 기생하며 영화를 누렸던 세력들이 쿠데타와 독재를 부추기고 대신 피로써 쌓아올린 4월혁명과 부마항쟁, 5·8민중항쟁, 6월항쟁을 지워버리겠다는 것이다. 민주화운동의 지난하고도 찬란한 역정을 역사에서 아예 지워버리고 싶은 집단들의 파렴치한 정치선동에 맞서, 이 땅의 모든 양심들에겐 깨어 일어나 두 눈 부릅뜨고 거꾸로 가려는 역사의 수레바퀴를 되돌려놓아야 할 무거운 시대적 책무가 어깨를 누른다.

이 밑 모를 역사 역주행의 망령이 한반도를 배회하는 2009년 새해 벽두에 박종철을 떠올린다는 것은 고통스럽고 무람하기까지 하다.
1987년 1월 14일,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 마치 구약의 시편에서 말하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연상시키는 가파른 나선형 계단을 올라가 철문을 열면, 창문도 없이 고문용 욕실만 뎅그러니 있는 509호에서 박종철은 죽었다. 당시 전두환 정권은 “탁!하고 책상을 치니, 억!하고 죽었다”고 주장했었다. 박종철이 죽음으로 지킨 것은 일차적으로는 선배의 소재였다. 우리 같이 범속한 이들에겐 그런 게 목숨과 맞바꿀만한 것은 아니라고 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런 사소해 보이는 약속과 인간에 대한 작은 배려가 함께 모여 세상을 바꾸는 법이다. 그가 고통 속에 세상을 떠난 그 자리에서 유월항쟁의 싹은 텄다. 그리고 박종철 열사를 역사의 제단에 바친 우리는 유월항쟁으로 민주주의의 찬란한 꽃을 피워냈다.

박종철 사망 1주기를 맞아 박노해가 지었던 시를 꺼내 읽으며, 지금 또다시 그를 불러도 되는 것인지 나는 적잖이 망설여진다.
 

(중략)
아 종철아!
너를 죽음에 이르기까지 캐내던
네 동지들은 지금도 수배자로 쫓기고 있다
민중의 희망이 쫓기고 있다
민중의 행복이 쫓기고 있다
지금도 차가운 감방에 정치범들이 갇혀 있다
민중의 자유가 갇혀 있다
이 나라의 진실이 갇혀 있다
지금도 노동자와 민중들이 투쟁하다 탄압 당하고 있다
우리의 사랑이 깨지고 있다
우리의 소중한 꿈이 깨지고 있다 (중략) (「이제 우리 다시 너를 부른다」에서)

우리가 한 때 목숨 바쳐 이룩하고자 했던 것은 서로에 대한 사랑이 충만한 세상이었고, 그러한 세상을 향한 소박한 꿈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부자가 될 지도 모른다는 집단환상에 빠져 사랑이 깨지고 소중한 꿈이 박살나고 있으니, 우리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물신주의야 말로 민주주의 후퇴의 가장 커다란 원인은 아닐까. 사랑을 회복하고 꿈을 되살리는 일, 이것이 경제회복이나 주가상승보다 시급한 일은 아닌지, 부자 되는 일만이 시대의 필연이라며 부자 열풍에 감염되었거나 속은 국민들이라면 새해를 맞아 한번쯤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할 화두가 아닐까 싶다. 탐욕을 줄인 뒤에야 비로소 예전에 잘못이 많았음을 알아챘던 진계유처럼, 성찰하고 다시 추스르자.
바/로/잡/습/니/다
12월호 사료이야기의 내용 중 녹목구어는 연목구어의 오자이기에 바로잡습니다
글·사료 어수갑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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