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구술) 이야기

서울지하철 민주노조의 기수, 정윤광

서울지하철 민주노조의 기수, 정윤광

 

글·유경순 youkslifehanmail.net 

 

30년 넘게 한 길을 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도 노동운동의 외길을. 1970년대 노동현장에 참여한 학생운동가들 중 어떤 이들은 노동에 적응을 하지 못하여 현장을 떠나기도 하고, 1990년 전후의 사회주의 붕괴로 운동의 좌표를 상실하고 떠난 이들도 많다. 또는 오랜 노동운동을 한 이들 중에는 제도정당 활동으로 행보를 옮기기도 했다. 아주 소수의 사람만이 여전히 노동운동 곳곳에서 활동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 중 한 사람이 정윤광이다.

민청학련사건과 노동현장 참여
정윤광은 1971년 교련반대데모 등 학생운동도 열심히 하면서, 한편으로는 한국문화연구회, 대학연합 서클인 두레를 만들면서 현장 실태조사, 현장 체험 등을 통해 노동현장에 대한 관심을 키워갔다. 1974년 그는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되었다가 1975년 석방되자 동료들과 같이 노동현장으로 들어갈 결심을 굳혔다. 정윤광은 기술을 배우기 위해 1976년 하반기에 동천직업훈련소를 다녔으나, 자격증을 따는 것이 쉽지 않았다.

공장에 들어갈 생각을 하고 있다가, 형이 하는 공장 일을 돕다가, 노동도 좀 하고 하면서 거기 용접기 있어서 용접 좀 배우고 있었고. 그때는 금속 기계 이쪽이 핵심 산업이다 생각해서, 그런 공장 들어가려면 기술이 필요했고, 처음에는 선반을 하고 싶었는데, 선반은 학원도 없고 그래가지고 그냥 용접을 했죠. 그래서 본격적으로 학원에 기술을 배우자 해서 동천직업훈련소라고, 서대문 경찰서 맞은편에 있었어요. 거기 76년 후반기엔가 들어가 배우기 시작해가지고 77년 4월인가에 끝났어요. 기술 배우는 과정이 힘든 건 없고, 그런데 자격증을 못 따서 그냥 취직을 하려했어요.

자격증을 따지 못한 채 정윤광은 1977년 인천 만석동의 한 공장에 취업해서 부족한 기술력을 배우려 했다. 그 해 7월 경 다시 구로동의 화성보일러 제작소에 들어가 일하면서 그는 짬짬이 환경관리, 열관리 1급자격증을 획득했다. 그러다가 1979년 600여 명 규모의 부산파이프로 사업장을 옮겼다. 그때 10.26사태가 일어났고 1980년 서울의 봄 국면이 열리면서 노동자들의 투쟁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열린 정세를 틈타 정윤광은 어용노조를 들쑤셔 임금인상투쟁을 하도록 압박했다. 결국 어용 집행부는 현장의 분위기에 밀려 파업을 벌였다. 그는 파업이후 노동자들을 모아 소모임을 진행했다.

1987년 8월 서울지하철의 노조결성
한편으로 정윤광은 대공장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조직 운동을 할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마침 서울지하철공사에서 채용공고가 나자 입사를 했다. 그 당시 그는 정권의 감시 대상이었다. 그가 서울지하철에 들어갈 때도 신원조회를 당했지만 3.4호선을 급하게 개통하는 상황 덕분에 일단 입사할 수 있었다. 여기저기서 비공개로 소모임을 하던 흐름이 모여, 마침내 1987년 8월 17일 노조를 결성 했다. 정윤광도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노조활동에 참여했다.

지하철 들어가서는 일찍부터 소그룹을 만들었어요. 보일러실에 있는 사람부터 쫙쫙해서 "우리 학습하자"하고 또 다른 부서 다니면서 학습그룹 쭉 만들죠. 그러다 87년 초에 이미 노동자들은 분위기가 뜨기 시작했어요. 노동자투쟁이 꼭 6월 항쟁하고서 갑자기 생긴 게 아니라는 거죠. 어느 날인가 최종진이 전화해서 "노조 만든다. 결성대회 언제 하니까 형님도 오라"고 해서 좋다고. 서울역에서 저녁 6시에 한다고 해서 갔는데 2시간 기다리자 결성대회 끝나고 온 거에요. 정보가 새는 것 같아서 모인 사람들이 앞당겨서 그냥 해버린 거야. 그래서 뒷자리에 제가 참석했어요. 당시에 발기인이 57명이예요. 이튿날, 노동부에 노조결성 신고하고, 군자 보고대회 하고, 그렇게 쭉쭉 지역 돌면서 진행했고. 나는 설비 쪽 조직담당을 해서 조직을 해요 그 때는 가입원서 써들고 막 몰려드는 거야. 처음에 4,000명 이상이 가입해요. 내가 조직담당을 하다가 노조가 인정되면서 선전홍보를 맡기로 하고. 간부명단을 본사에 다 주는데, 이때부터 내가 공개적으로 나섰는데 공사에서 뭐 쫓아내려고 안 하더라고.

그러나 초기부터 노조는 현장문제를 투쟁으로 해결하자는 조합원들의 요구와 위원장의 투쟁회피 분위기로 갈등을 빚고 있었다. 정윤광과 몇몇의 간부들은 민주노조를 세워내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이들은 노동문화 보급과 교육활동을 집중적으로 진행하거나 부서마다 전부 위원회를 꾸려 활동을 하면서 학습도 꾸준히 할 수 있도록 현장 기반을 다져나갔다.

위원장이 처음부터 투쟁을 앞장 서 할라고 안 해요. 어쩔 수 없이 파업을 해야 되는데 자꾸 피하고. 예로 "본사 농성 하자" 딱 들어갔는데 위원장은 안 가고 사무실에 있고, 우리는 무기한 농성하기로 한 건데, 위원장이 노무과장하고 쓱싹 해가지고 "전부 철수해라" 이렇게 또 지시가 떨어져버렸어요. 그래 간부들이나 대의원들이 열 받고. 그래서 나하고, 부위원장, 사무국장 뭐뭐해서 7~8명이 "노조 제대로 세워보자"며 위원장을 견제해나가죠. 우리 중에 몇 명이 단체교섭을 주도적으로 하고, 그러면서 현장 간부들, 지회장들, 대의원들 규합을 했고. 부서마다 전부 위원회를 다 꾸렸어요. 제가 선전홍보를 직접 하면서 교육문화 쪽에서 역할을 했어요. 각 위원회마다 학습도 하고. 그러다 위원장이 자꾸 딴 짓을 해서 88년에 2대 위원장을 새로 뽑았는데, 이 사람도 6개월 하다가 정리해요

노조 위원장으로 파업투쟁을 이끌다
1989년 서울지하철 3대 위원장 선거에 정윤광은 후보로 나섰다. 일부에서는 활동가의 역할은 뒤에서 지원하는 것이라며 반대하기도 했으나, 정윤광은 스스로를 수년간 노동을 한 노동자라고 인식했고, 무엇보다도 들끓고 있는 조합원들의 불만을 조직해야 노조가 바로 설 수 있다는 판단으로 출마한 것이다.

3대 위원장 선거 때 내가 후보로 나간다니까 일부 활동가들은 "아, 활동가가 뒤에서 도와주면 되지. 직접 나가느냐" 뭐라 했는데, 나는 내가 십 몇 년을 공장에서 살고 있는 노동자인데, 노동자 활동가고, 당연히 자기가 할 역할이 있으면 해야 되는 거지하는 생각으로 후보로 나간 거죠. 그때 직급체계 통일이 안 되고, 근무 수당도 안 주고 여러 문제가 쌓여서 불만이 엄청나게 있어서, 선거서 우리 구호가 딱 2주 파업으로 승리하겠다! 이거에요. 다른 거 필요 없어요. 그냥 조합원들은 안 되도 좋으니까 파업을 위한 파업이라도 한 번 하자 는 분위기였으니까. 그리고 내가 민청학련 경력 이런 거 그대로 다 드러내니까 아, 이 친구는 진짜 급이 다르다 하는 반응이었고. 조합원들이 저를 선택해 3대 위원장에 당선된 거죠.

그는 위원장이 되자마자 그 동안 현장에 누적된 불만인 직제개편문제를 가지고 처음으로 현장 파업투쟁을 결정했다. 파업과정에서 공권력침탈로 그는 취임 29일 만에 구속되었다.

89년도 지하철노조의 최대 현안은 직제개편 문제였는데, 일반직 기능직 고용직으로 직종간 차별문제가 심각했거든요. 처음 노조 만들어 단체협약 때 이 문제가 큰 틀에서 정리되지만, 이후에 실행이 안 되었는데 1, 2기 집행부에서 싸우지 못한 거죠. 그러니 다를 "제대로 파업 한번 해봤으면 좋겠다"는 분위기였죠. 그래서 파업 전야제를 하는데 2,500명이 넘게 참여해요. 그 자리에서 "시청으로 가자"고 요구가 나와서 시청 앞으로 가서 농성을 벌이니까 공사가 긴장했죠. 그러면서 무임운행을 기습적으로 밀어 붙이자 시민들이 95% 넘게 호응해서 4일을 진행해요. 모두들 신났어요. 결국 이틀 만에 교섭에서 100%다 따냈는데, 새벽에 시장이 갑자기 서명에 응하지 않아요. 청와대에서 틀은 거 에요. 우리 파업이 노동운동에 미치는 영향이 크니까. 그래서 노조간부들 구속조치 때려져요. 다음 지도부 꾸려서 파업대오에서 내보내고, 저는 끝까지 파업 장에 있다가 공권력이 침탈되면서 구속된 거죠.

1990년 11월 출감한 정윤광은 노조 위원장으로 복귀했다. 이어 그는 연대를 위한 대기업회의에서 1991년 공동 활동, 공동투쟁을 모색했다. 그러나 정권은 대기업간의 연대활동을 차단하려고 1991년 수련회 중인 연대회의 지도부를 구속했다. 정윤광은 다시 구속되었다.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위한 행보
이 시기 사회주의 붕괴를 둘러싸고 주변에서 많은 동요가 있었다. 일부에서는 사회주의 노선을 포기하고 합법정당활동으로 돌아서거나, 일부 노동운동가들은 전망을 상실하고 운동을 정리하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현장에 발을 딛고 있는 정윤광은 새로운 모색을 위한 고민을 안게 되었지만, 사회변혁과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89년부터 동구권이 붕괴되면서 91년도 신문이고 잡지고, 뭐 학자들이 붕괴 안 될 거다 뭐 이랬다가 붕괴되자 혼란이 막 왔죠. 노동계에서는 관념적이거나 정치활동을 하는, 현장하고 떠 있는 사람들이 타격을 받고. 저는 현실 사회주의는 뭔가 잘못됐으니까 무너진 거다. 그러나 사회주의라는 이념은 옳다. 우리가 올바른 사회주의를 세워야 되는 거다는 생각을 한 거죠. 어떻게 세울 거냐 하는 문제는 있지만, 직접 현장에 있는 사람들은 타격이 좀 적어요.

1991년 석방된 정윤광은 전노협의 중앙위원과 대외협력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민주노총 건설에 참여했다. 민주노총이 만들어지고 1996,7년 노동법개정총파업투쟁을 경험하면서 대중적으로 정치세력화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정윤광은 민주노총 정치위원장을 맡아 민주노동당 창당에 참여하면서 민주노동당 준비위원회의 조직위원장도 맡았다.

민주노총이 만들어지면서, 강령 2항에 정치세력화를 넣었어요. 저 역시, 자본가들 정당만 있는데, 노동자 민중을 대표하는 합법 진보정당이 필요하다는 생각이었으니까 진보정당 창당 과정에서 민주노총이 대의원대회에서 참여를 결의하고, 내가 민주노총 정치위원장이니까 진보정당 창당추진위 실행위원장을 맡았어요. 집행책임자지. 그 다음에 민주노동당 창당준비위에는 내가 조직위원장을 맡았죠. 그렇게 민주노동당에 참여한 건데, 그런데 민주노총이 개량적으로 돼버리니까 갈등이 생기죠. 거기에 민주노동당이 노동자들과 분리되면서 합법정당의 한계를 느끼고. 민주노동당이 분리되어 진보신당 만들어지고 할 때는 참여 안하는 거죠.

지금은 사회변혁을 위해 노동자정치조직화에 힘을 쏟을 때
30여년이 넘는 현재까지 현장운동을 할 수 있었던 힘에 대해, 그는 자신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고, 그냥 하나의 삶을 살 뿐이라고 말한다.

나 같은 사람이 혼자는 아니잖아요? 나이가 내가 좀 더 들었지만. 그 시기 이후에 신념을 견지하고 열심히 활동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이 있고, 저는 이게 내가 살아가는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뭐 특별한 거라기보다 하나의 삶을 살고 있다고 봐요. 나는 노동운동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하고 그 다음에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생각은 갖고 있지만, 그 방향으로 발전은 못했다고 봐요. 그러나 그것도 중단할 문제가 아니잖아요? 또 방법을 찾아야 되는 거고. 응! 그러니까 이게 계속 하는 거라고 보고.

오히려 긴 시간의 노동운동을 통해 그는 자신의 운동에 대해 반성을 한다. 그동안 노동운동의 발전을 위해 노력했으나 변혁적 관점의 철저하지 못한 것과 동시에 변혁을 지향하는 운동가들을 조직적으로 양성하는데 힘쓰지 못한 것이다.

환갑이 넘은 그는 오늘도 작은 체구에 배낭을 걸머지고 투쟁의 현장을 누비며, 전국운수노동조합에서 산별노조건설 활동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 또한 사회변혁을 위한 노동자 정치조직건설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글·유경순 역사학 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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