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구술) 이야기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창립대회 발기문과 창립선언문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창립대회

발기문과 창립선언문

 

글·권형택 kwon1956kdemo.or.kr

 

 

1983년 9월 30일 저녁 7시 성북구 돈암동에 있는 가톨릭 상지회관에 허수룩한 차림의 청년들이 긴장된 얼굴로 삼삼오오 모여들기 시작했다. 80년 광주민중항쟁이 피의 진압으로 막을 내린지 3년여 만에 민주화운동의 새로운 봉화를 들어올린 민청련의 창립대회에 참석하고자 모여든 청년들이었다. 70년대 유신독재시대를 청춘을 바쳐 온몸으로 독재정권과 싸워온 학생운동 출신의 청년 활동가들이 민주화투쟁의 굳은 결의를 가지고 다시 모인 것이다. 광주항쟁 이후 전두환 정권은 정당, 사회단체, 개인을 막론하고 일체의 정부비판 활동을 허용하지 않았고 언론에도 재갈을 물렸던 터라 경찰의 감시가 삼엄했다. 그러나 비밀리에 준비해온 민청련이라는 민주화투쟁단체를 띄우는 이날 모임은 60명 정도가 당국의 감시를 뚫고 상지회관에 모여 창립대회를 치름으로써 일단 성공한다. 

1983년 민청련의 출범
뒤늦게 모임장소를 알고 출동한 성북서 경찰들은 참석하려고 모인 사람들 상당수를 들어가지 못하게 봉쇄하고 또 그 중 일부를 연행했지만 결국 모임을 막아내지는 못했다. 경찰들은 미리 회관 내에 들어와 있는 60여명의 청년들도 전원 연행하겠다고 위협하면서 해산을 종용했다. 그러나 천주교 시설 내에 무단으로 침입할 수는 없었기 때문인지 결국 자기들이 지목하고 있는 새 집행부 명단을 제시하고 이들을 창립대회가 끝난 뒤 연행하겠다는 약속을 받고 일단 뒤로 물러난다. 김근태 의장을 비롯한 내정된 집행부들도 일단 창립대회를 치르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보고 경찰의 요구를 수락한다. 공개단체를 표방하고 있는 터라 창립이후에 경찰이 연행한다면 연행될 뿐 막을 방법도 없었던 것이다.
경찰들과 설왕설래하는 동안 시간이 흘러 9시가 넘어서야 겨우 창립대회가 시작되었다. 경찰들의 사전검속으로 창립대회를 준비한 많은 핵심 청년들이 참석하지 못했고, 문익환 목사를 비롯한 재야 어른들도 거의 모시지 못했다. 그나마 의장으로 내정되었던 김근태 씨가 참석해 대회를 주관할 수 있었던 것은 불행 중 다행이었다. 대회는 부의장으로 내정된 장영달 씨가 "우리는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지 않은가?"라는 발기문을 낭독하면서 시작되었다. 이어서 "민주, 민중, 민족통일을 우리 모두에게"라는 창립선언문을 김근태 의장이 낭독함으로써 민청련은 공개대중정치투쟁단체로서 정식 출범하게 되었다.
12시 가까이 되어 창립대회를 마치고 약속대로 김근태 의장을 비롯한 신임 집행부는 경찰에 전원 자진 연행되어 갔다. 필자도 다른 회원들과 함께 뒤에 남아 웃으며 의연하게 연행되어가는 이들 집행부를 전송하며 분을 삭였던 기억이 난다.
발기문과 창립선언문은 대회 준비과정에서 사전에 등사판으로 인쇄해 200여 부 정도 대회장에 들여와 배포되었고, 외신을 비롯한 언론기관에도 보도자료와 함께 돌렸다. 아마도 국내언론에는 보도되지 못하고 일부 외신에만 보도되었던 걸로 안다. 지금 사료관이 보관하고 있는 창립선언문은 대전에 있었던 가톨릭농민회 본부에서 보관하다가 기념사업회에 기증한 것인데 당시의 원본이 확실한 것 같다. 발기문은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이 기증한 것으로 원본은 아니고, 그 후에 복사한 복사본으로 보인다.

민청련 창립선언문과 발기문
이 두 문건은 유신, 긴급조치 시대에 학생들이 데모할 때 사용했던 것과 같은 등사판으로 인쇄했다. 문건의 글자체에서 알 수 있듯이 일반 사무용 타이프라이터로 원지를 타이핑하고 이것을 등사판에 걸어 먹물로 인쇄한 것이다. 평판에 롤러를 손으로 밀어 등사하던 것보다는 조금 진화한 것으로 원통형 판에 원지를 붙이고 핸들로 돌려 등사하는 등사기를 사용했다. 당시에는 일부 기독교 단체들에서 인쇄소의 청타 인쇄를 이용하기도 했던 때인데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는 아마도 창립대회의 보안문제가 컸던 것 같다.
이 두 문건의 초안 작성은 필자의 기억으로는 창립대회를 준비하는 한 소모임에서 이루어졌던 것으로 안다. 그 소모임은 문학평론하던 김도연(작고), 문화운동가 황선진, 그리고 필자 등으로 구성되었는데, 발기문은 김도연씨, 창립선언문은 황선진 씨가 기초하였고 소모임에서 토론하여 자구를 수정하고 다듬었다. 물론 이 초안들은 신임집행부, 특히 김근태 의장의 감수를 거쳐서 수정되었는데, 발기문은 대체로 원안 그대로 되고, 창립선언문은 김근태 의장의 생각이 많이 반영되어 수정된 것으로 기억한다.
이 두 문건은 길이도 짧고, 격문 형식의 글이기 때문에 이것을 통해서 민청련의 이념이나 운동론을 온전히 파악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민청련의 이념과 운동론은 다음 해 1984년 3월에 발행되는 민청련 기관지 <민주화의 길>에서 비교적 상세히 전개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 두 문건에서도 민청련운동이 지향하는 바에 대한 개략적인 틀을 엿볼 수 있다. 이 문건에서 민청련운동은 멀리는 동학혁명과 일제하 항일독립운동, 가까이는 4·19혁명의 반봉건, 반식민, 반독재 민족민주운동의 연장선상에 있음을 밝히면서, 동시에 분단을 강제하는 외세와 군사독재권력에 대항하는 통일지향운동이고, 핵전쟁 위기에 반대하는 평화운동임을 선언하고 있다.
그리고 권력집단의 반민중성에 대항하여 가난과 소외를 극복하고자하는 민중의 주체적 역량을 강화하는 운동임도 강조한다.
또한 이 시기에 민청련운동이 시급히 요청되는 이유가 바로 80년 5월 광주시민대학살에 있음을 천명하여 군사정권의 아킬레스건을 정면으로 겨눈다.

92년 전국청년단체협의회가 창립되면서 활동 마감
당시에 사진을 찍지 않았기 때문에 창립대회의 상황이나 참석인사들의 면모를 볼 수 있는 사진이 전혀 남아 있지 않은 것은 참으로 아쉬운 일이다. 하지만 창립대회 이후에 단체 자체가 존립할지 여부도 확신할 수 없는 엄중한 상황에서 정보기관의 소중한(?) 정보로 바쳐질 수도 있는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민청련은 집행부는 공개되었지만 회원조직이나 그밖의 참모조직은 비공개를 유지했기 때문에 그 이후에도 87년 6월항쟁 이전까지는 내부행사에서 사진을 찍어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다.
민청련은 창립 이후 87년 6월항쟁까지 전두환 군사독재에 맞서 민주화운동의 선봉에 서서 줄기차게 투쟁하여 많은 성과를 남겼다. 그리고 6월항쟁 이후에 청년대중조직으로 전환하여 92년까지 활동하다가 대중적 청년운동 전국조직인 전국청년단체협의회가 창립되면서 자진 해체하여 활동을 마감한다.
창립멤버 중 김근태 의장, 장영달 부의장, 이해찬 상임위 부위원장, 박계동 홍보국장 등 여러 사람들이 제도정치권에 진출했고, 그 밖의 많은 회원들이 민청련 창립의 정신을 간직하면서 사회 각계에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민청련 조직과정에 참여했고 일선에서 투쟁하다가 돌아간 고 채광석, 고 김도연, 고 김병곤, 고 홍성엽, 고 이범영, 고 안희대, 고 박기상, 고 김기설 등은 민주화운동사에 길이 기록되어야할 인물들이다.


 

글·권형택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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