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네시스, 세상의 소금> - 경이로운 세계에 바친 거장들의 헌사

<제네시스, 세상의 소금> - 경이로운 세계에 바친 거장들의 헌사

글 성지훈/ acesjh@gmail.com​​​​​​ ​​​​

“그 곳에서부터 나는 길을 걸어서 갔다. 우리들이 이제 막 빠져나온 전쟁은 아직 삶의 완전한 개화(開花)를 허락하지 않고 있었지만, 라자로는 이미 무덤 밖에 나와 있었다. 나즈막한 산기슭에는 보리와 호밀이 자라고 있었고 좁은 계곡 바닥에는 푸른 초원이 펼쳐져 있었다.

단순히 육체적 정신적 힘만을 갖춘 한 사람이 홀로 황무지에서 이런 가나안땅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는 것을 생각할 때면 나는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조건이란 참으로 경탄할 만한 것이라는 것을 깨닫곤 한다.“ - 장 지오노, <나무를 심은 사람> 중

# 태초에 빛이 있었다
영화는 사진의 의미를 설명하며 시작한다. ‘Photograph’의 어원은 그리스어로 ‘빛’을 뜻하는 ‘Phos’와 ‘그리다’란 뜻의 ‘Graphos’가 결합된 것이다. 다시 말해 ‘빛으로 그린 그림’이 곧 사진이다. 그래서 사진작가 세바스티앙 살가두는 빛으로 그리는 사람이다. 살가두에게 세상은 너무 어두웠다. 빛으로 무언가를 그려내야 겨우 밝아질만큼. 혹은 빛으로 무언가를 그려내기에 충분할만큼. 그는 어둠이 있는 곳을 찾아다녔다. 브라질의 금광, 남미의 내전, 아프리카의 난민촌. 전쟁과 기아, 빈곤, 탐욕, 자본주의. 그는 그 어둠들 위에 빛으로 그림을 그렸다.

브라질의 농장에서 태어나 경제학을 전공한 살가두는 브라질의 정치적 박해를 피해 프랑스에서 국제커피협회에 들어가 일하게 된다. 그곳에서 우연히 카메라를 잡게된 살가두는 안정적이고 윤택한 삶을 저버리고 사진을 찍는 삶을 선택했다. 세상이 조금 더 아름다워질 수 있다고, 인간이야말로 세상의 소금과 같은 존재라고 믿었던 젊은 살가두는 세계 곳곳을 누비며 ‘세상의 소금’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실로 인간은 참 흉포한 짐승이었다. 전쟁과 살육, 착취와 폭력의 참상을 담아내던 살가두는 마침내 인간은 구원받을 수 없는 종족, 살아갈 자격조차 없는 종족이라는 절망감에 도달하고 만다. 르완다, 수십만의 사람들이 사라지고 죽어간 그 참혹의 현장에서 마침내 살가두는 사진을 찍는 여행을 끝냈다. 그리고 인간에 대한 믿음, 더 나은 세계에 대한 믿음도 끝냈다. 셔터를 누르는 시간보다 눈물을 닦아내는 시간이 더 길어진 즈음이었다.

인간에게 실망한 그가 다시 찾은 곳은 브라질의 고향이었다. 그러나 세상과 인간을 사랑하는 법을 가르쳤던 그의 고향도 과거와 이미 달라져 있었다. 새들도 악어도 울창한 숲도 사라져버렸다. 황폐한 민둥산이 돼버린 고향의 땅에 그는 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10년간 250만 그루의 나무를 심는동안 황폐해진 민둥산엔 새와 악어들이 돌아왔다. 죽은 땅에 생명이 깃들었다. 그리고 회의와 절망뿐이었던 살가두에게도 다시 무언가가 돌아왔다. 말라붙은 매미의 고치와 뿌리내린 나무와 흰개미의 행렬. 태어나는 것과 죽어가는 것, 생명.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다시 인간. 그는 다시 카메라를 잡았다. 그렇게 태곳적 신비와 아름다움을 경외하는 프로젝트 ‘제네시스(창세기)’가 시작됐다. 살가두는 제네시스 프로젝트를 통해 인간은 물론 살아있는 뭇 생명들에 대한 경의를 표한다.

# 나무를 심은 사람
살가두가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다큐멘터리 사진을 찍을 때 일부 비평가들은 그가 사물을 너무 아름답게 미화한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살가두는 그런 비판에 대해 단호하게 “그들은 실제로 아름답다”고 반박한다. 그는 “그같은 비판을 하는 건 서방의 부유한 자들”이라며 “가난하고 고통스러운 삶에 놓인 이들은 당연히 추하고 비참할 것이라는 생각이 그런 비판을 만들어낸다”고 지적한다. 부유와 풍요는 오히려 태곳적의 본질적 아름다움을 소멸시키고 있다고 주장한다.

인간을 사랑했기 때문에 인간본위의 세계가 만드는 잔혹한 참극에 절망했던 그는 인간 역시 자연의 일부이며 그 일부로서 전체의 아름다움에 일조하고 있음을 깨닫고 비로소 인간다운 삶, 인간의 아름다움을 예찬하게 된다. 200만 그루의 나무를 심고 그 숲에서 다시 새와 악어와 폭포와 개미떼를 만난 다음이다. 그 이후 살가두의 세계에서 인간이란 자연에 대립하는 존재가 아니라 자연 속의 존재가 된다. 그리고 그는 다시 인간을 그렸다. 어둠 위에서 빛으로.

확실히 오늘의 시대는 이제까지 우리가 의문의 여지없이 받아들인 많은 상식과 관념들을 근본적으로 의심케한다. 근대의 문명을 유지해온 낡은 세계관에 대한 의심이다. 세계와 자연을 인간의 의지대로 조종할 수 있다고 믿는 세계관, 인간과 자연을 분리시키는 이원론적 세계관, 물질과 성장을 숭앙하는 세계관, 과학과 기술이 삶을 구원할 것이라고 믿는 세계관. 이제는 흡사 종교가 되어버린 것 같은 ‘산업’에 대한 근본주의적 숭배는 어쩌면 성서의 첫 구절을 바꾸어버릴지도 모른다. ‘태초에 경제가 있었느니라’. 경제 만능주의, 생명보다 이윤을 앞세웠던 근대의 세계는 폭력과 야만을 낳았다.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인간이란 본디 그렇게 흉폭한 존재라고 여기며 더 흉폭해지는 것으로 다른 존재들의 폭력에 맞서려고 했다. 그러나 본디 만물은 서로 돕는 법이다. 썩어 땅에 묻힌 시체가 싱그러운 봄 꽃과 달콤한 열매의 양분이 되는 것. 땅이 주는 지혜로 절망을 극복하고 다시 아름다움을 찾아나서는 것.

# 사물이 거울에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습니다
영화를 만든 빔 벤더스는 <사물의 상태>와 <베를린 천사의 시>를 만든 영화감독이다. <부에나 비스타 소셜클럽>과 <피나>로 예술인들의 예술과 삶을 관찰해온 벤더스의 3번째 연작 다큐다. 벤더스 감독이 살가두와 그의 아들 줄리아누와 함께 여행을 떠나며 담기 시작한 영상이 이 다큐멘터리 영화의 모태가 됐다.

카메라를 들고 있는 사람이 카메라를 들고 있는 사람을 찍기 때문에 이 영화에서 스크린은 ‘창’보다는 ‘거울’에 가깝다. 살가두의 시선이 벤더스의 카메라를 통해 본인을 응시하게 되거나 반대로 벤더스는 살가두의 사진에 든 자기의 모습을 확인하고 그 모습을 다시 자기의 카메라를 통해 살가두에게 전달한다.

영화는 계속해 카메라를 거울의 기능으로 차용한다. 살가두의 사진 작품은 영화의 화면을 구성하는 가장 큰 요소인데, 이는 카메라가 살가두의 사진을 담은 것이 아니라 살가두가 본인의 사진을 다시 바라보는 모습이다. 빛의 정도를 조율함에 따라 사진과 살가두의 얼굴이 교묘하게 겹치며 오버랩되는 장면은 살가두가 자신의 사진을 관객이나 벤더스에게 해설하는 것 보다는 자신의 지난 삶을 관조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벤더스의 시선을 빌린 관객들은 그 대화의 주체가 돼 사진을 두고 살가두와 대화하거나 사진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효과를 경험한다. 거울을 보며 독백하는 것같은 살가두의 내래이션은 자기고백이기도 하면서 이 영화가 단지 살가두의 사진을 전시함에 그치지 않게 한다. 영화 속의 사진과 인물, 대화들은 거울을 통해 보이는 것처럼 실제보다 가깝게 보인다.

거장과 거장이 만나 삶과 세계, 예술과 생명에 대해 이야기하고 관찰하는 두 시간은 경이롭다. 살가두의 고절한 사진은 물론이고 벤더스의 흑백영상도 비견할 바 없이 탁월하다. 내래이션 역시 훌륭한 종교철학 서적을 읽는 듯 현학적이고 고상하다. 이 영화는 관람보다 체험에 가깝다. 거장들의 세계를 잠시나마 엿보며 경타할 수 있는 놀라운 체험이다.

목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