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을 찾아서

‘탄광의 판화가’와 르포 작가가 된 시인

‘탄광의 판화가’와 르포 작가가 된 시인

글. 사진 권기봉(작가, 여행가)/ warmwalk@gmail.com

얼마 전 일본 타가와에 다녀왔다. 큐슈의 후쿠오카와 키타큐슈 사이에 위치한 타가와시립미술관에서 열린 한 전시회를 보기 위해서였다. 고(故) 센다 우메지[千田梅二]의 판화전이었다. 국내에는 아직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작가 센다 우메지. 그는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이후 실제로 탄광에서 광부로 일하며 작품 활동을 했던 판화가다.

그에게 있어 탄광은 단순한 작품활동의 소재이기에 앞서 처절한 삶의 현장이었다. 그렇기에 그의 작품은 현장성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다. 또 기록사적인 측면에서도 상당히 의미 있는 작품들을 여럿 남겼다. 작품마다 깨알 같은 글씨로 그림의 내용을 텍스트로 적어둔 것이다.

이를 테면 당시 광부들의 세부적인 급여명세서 항목과 내용, 그리고 갱내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작업과 의미 등을 마치 인류학적 조사 보고서를 작성하듯 세세하게 기록해 둔 것이다. 어두운 갱내를 밝히는 데 쓰는 전등에 한 번 기름을 넣으면 얼마 동안 사용할 수 있는지, 광부 1인당 채탄량은 얼마이며, 성인 남성 한 명이 옮길 수 있는 탄의 한계량이 얼마인지, 광부들 사이에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온 금기와 작업 요령 등도 최대한 적어두려 노력한 흔적이 엿보인다. 광부들의 하루 일과 역시 매우 상세하게 적어 두었는데, 바로 그런 이유로 그의 작품들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한계가 느껴지는 대목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한국의 여느 민중미술에서처럼 자본가들의 착취가 제도화된 부조리한 현실을 갈아엎겠다는 의지, 권위주의적인 사회 분위기를 혁파하겠다는 몸부림 등은 발견할 수 없었다. 그저 탄광 안팎의 풍광을 최대한 사실적으로 기록하려 했던 면모만 엿보일 뿐이다. 어떤 면에서는 지극히 현실 순응적이며 운명론적인 느낌마저 들었다. 그가 일하기 직전까지 일제에 강제동원되어 일해야만 했던 수많은 조선인 광부들의 이야기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물론 그렇다고 센다 우메지의 가치가 폄하되어서는 안된다. 정식 미술교육을 받지 않은 상태였음에도 스스로 깨우쳐 판화작업을 계속해간 점이나, 자기 자신만이 아닌 주변의 이야기에 관심을 기울이고, 또 그것을 기록하고 세상에 알리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 당시의 열악했던 탄광 노동환경의 실상을 세상에 알린 것도 그의 덕분이었다.

실제로 그의 그런 노력과 정신은 지금도 면면이 이어지고 있는 듯했다. 타가와에서 북쪽으로 약 25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나카마. 그곳은 한때 일본에서 탄광 산업이 가장 번창했던 곳 중 하나다.

그곳에서 구순을 바라보던 모리사키 카즈에[森崎和江] 시인을 만났다. 그녀는 이 지역의 주요 산업이었던 탄광업에 대해,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곳에서 일해온 조선인 광부들의 절절한 삶을 르포르타주, 즉 르포를 통해 고발해온 작가이다.

그녀가 일본사회에서는 거들떠보지 않던 조선인 광부들에게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그 자신이 일제강점기였던 지난 1927년, 지금의 한국 대구에서 태어나 10대 시절을 보낸 것과 무관하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엔 어린 시절이었기에 당연하게도 조선인들의 삶과 피식민지인의 현실까지는 속속들이 알지 못했다고 한다. 예를 들어 난방을 하거나 밥을 할 때마다 석탄을 이용하곤 했는데, 그 석탄이 낙동강가에 있는 조약돌처럼 어디에나 있는 줄 알았다는 것이다.

시간은 그렇게 흘렀고 32살 때인 1958년, 비로소 석탄이 어디서 왔는지를 알게 되었다는 모리사키 카즈에. 패전 뒤 일본으로 돌아와 살던 중 우연히 “광부를 모집한다”는 내용의 ‘한글’ 포스터를 보았다는 것이다. 일본 땅에서 일본어가 아닌 한글 포스터가 붙어 있었기에 호기심이 발동했고 어린 시절의 기억도 떠올라 포스터에 적혀 있는 번호로 전화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는 물었다.

“아무리 다녀도 일본에서는 석탄 덩어리가 보이지 않는데 도대체 어디서 석탄이 나오는 건가요? 그리고 왜 일본어가 아니라 한글로 포스터를 붙였나요?”

상대방이 잠시 뜸을 들이더니 돌아온 대답은 딱 한 마디였다고 한다.

“선생님이 서 계신 땅 밑에서 들려오는 조선인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일제강점기에는 강제동원돼 온 조선인들이, 패전 뒤에는 일본에 남겨진 조선인들, 즉 재일조선인들이 위험한 막장에서 고단한 삶을 이어가고 있던 것이다.

모리사키 선생은 그 직후 인생과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던 시인에서 새벽 3시에 갱도로 들어가 한 밤 중이 되어야 나오는 조선인 광부들의 현실을 고발하는 르포 작가로 변신한다. 그리고는 50여 년째 근대 일본의 어두운 면을 고발하는 동시에 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일본의 책임을 지적하는 작품을 발표해 오고 있다. 센다 우메지가 판화로 광부들의 삶을 지상으로 드러냈다면 모리사키 카즈에는 텍스트를 통해 조선인 광부들의 삶을 세상 밖으로 끄집어낸 것이다.

타가와시립미술관을 나오며 지난 1980~90년대를 수놓았던 ‘리얼리즘’이 안개처럼 사라져버린 듯한 오늘날의 한국 미술 현실이 시야에 들어왔다. 센다 우메지의 판화작품들은 사회에 대한 발언과 참여를 꺼리는 지금의 주류 한국 미술에 대해서도 질문을 던지고 있는 듯했다. 또한 일을 늦게 시작한 이상 명이 다하는 그날까지 펜을 놓지 않겠다는 모리사키 카즈에에게서는 스스로 깨우치는 삶을 사는 사람에게서나 풍기는 특유의 경건함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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