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을 찾아서

“소설 <태백산맥>의 흔적, 옛 보성여관”을 찾아

“소설 <태백산맥>의 흔적, 옛 보성여관”을 찾아

글. 사진 권기봉(작가, 여행가) warmwalk@gmail.com

일본 교토의 ‘철학자의 길’이나 프랑스 아를의 ‘고흐의 길’ 등 철학자나 문학가, 예술가들의 작품의 배경이 되는 ‘길’들은 사람들의 감수성을 한껏 자극한다. ‘괴테의 집’이나 ‘루쉰의 집’처럼 작가의 공간은 작품을 넘어 그 작가와 시대를 이해하게 하는 하나의 다리가 되어준다. 지난 시대 바쁘게 달려오기만 한 한국은, 그러나 작가의 작업공간은커녕 작품 탄생의 배경이나 공간 하나 제대로 가꿔어오질 못했다. 전남 벌교의 보성여관을 복원하기 전까지는...

벌교로 가는 길은 멀었다. 용산역에서 KTX산천에 몸을 실은 뒤 순천역에 닿으면 다시 버스나 택시를 타야 했다. 그렇게 수 시간을 달려야 닿을 수 있는 전남 보성군 벌교읍... 행정구역 상으로는 보성군에 속해 있지만 정작 보성보다는 순천시에 더 가까운 느낌이었다.

그래서인지 벌교는 지난 1948년 일어난 ‘여수 순천 반란사건’, 이른바 ‘여순사건’의 뜨거운 회오리 바람이 불어닥친 현장이었다. 이어 한국전쟁을 전후한 시기 벌어진 빨치산 활동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그런 벌교의 모습을 소설가 조정래는 대하소설 <태백산맥>에서 “악질 빨갱이 염상진 사살”이라고 큼지막하게 씌여진 채 사람 목이 내걸렸던 벌교역과 “소화다리 아래 갯물에고 갯바닥에고 시체가 질펀허니 널렸는디, 아이고메 인자 징혀서 더 못 보겠구만이라... 사람 쥑이는 거 날이 날마동 보자니께 환장 허겄구만요”라고 표현한 소화다리에 응축해 묘사하고 있다.

다시 지은 것이기는 하지만 벌교역이 그 자리에 그대로이고 소화다리와 소설 속 인물인 지주 김범우의 집이 여전한 것처럼, <태백산맥>에 나오는 장소들이 벌교에는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 가운데 소설에 ‘남도여관’으로 등장하는 ‘보성여관’이 지어진 지 77년만에 새단장을 끝내고 지난 2012년 6월 다시 문을 열었다. “지금이 어느 때라고, 반란 세력을 진압하고 민심을 수습해야 할 임무를 띤 토벌대가 여관잠을 자고 여관밥을 먹어?”라며 등장했던 바로 그 남도여관이다.

“토벌대장 임만수가 벌교에 열흘 정도 머무는 동안 벌교의 지주들은 말할 것도 없고 보성의 지주들까지 남도여관의 뒷문을 드나들었다”는 빨치산 토벌대원들의 숙소로 보성여관은, <태백산맥>의 무대 가운데 정식으로 복원된 최초의 사례다.

<“글로, 소설로 옮기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보성여관은 일제강점기였던 1935년에 지어진 2층 목조 건물로 한옥과 일식이 혼합되어 있다. 해방 뒤에도 한 동안 여관으로 사용되었으며 1988년부터는 상점으로도 사용됐고, 2004년에는 건축적, 문학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등록문화재 제132호로 등재되기도 했다. 2008년 문화재청이 매입해 보성군, 문화유산국민신탁과 함께 복원사업을 하기 전까지 보성여관에 거주하며 지킴이를 자처해온 나종필-윤보임 부부는 “소설에서는 남도여관으로 불렸지만 당시에도 이름은 보성여관이었다”며 말을 이었다.

“1979년이었을 겁니다. 근처 벌교 남초등학교에서 20년 동안 교편을 잡다가 퇴직해 금은방을 냈는데 보성여관이 매물로 나왔더라고요. 아마 5만 원인가 주고 샀을 겁니다. 80년대초 태풍 사라가 몰아닥친 뒤 재건축 붐이 일기 전까지 보성여관이 벌교는 물론 보성군 전체에서 가장 으리으리한 여관이었어요. 방도 10개가 훨씬 넘었고, 2층 다다미방은 넓게 하나로 틀 수도 있었거든요. 국회의원 선거 때만 되면 내로라 하는 이들이 여관 2층 다다미방에서 바로 뒤 남초등학교 운동장에 모인 청중들을 향해 유세를 하곤 했을 정도였고요.”

복원된 보성여관 2층 다다미방으로 올라가 보니 윤 씨의 말대로 남초등학교의 시원한 운동장이 시야에 들어왔다. 한때 국회의원들은 저곳에 모인 이들을 상대로 유세했고, 그 전에는 저 곳에 집합시킨 빨치산들을 처형했으리라. 소설 속 이야기라고는 하지만 보성여관을 중심으로 벌어진 일들은 근거 없는 상상의 산물만은 아니었다. 한옥과 일식이 혼합된 1935년 건립 당시와 비슷한 모습으로 복원된 보성여관을 공교롭게도 같은 날 찾은 조정래 작가는 벌교에서의 유년 시절 3년을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벌교는 여수 등을 통해 들어온 일본인들의 전진기지 역할을 하던 곳입니다. 그 중에서도 제가 보성여관을 택한 이유는 이곳이야말로 당시의 생활사와 근대 건축의 특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고, 특히 한국 근현대사의 살아있는 현장이었기 때문이예요. 당시 사람들 중에 시국에 관련 있는 자 치고 이곳을 거쳐 가지 않은 이가 없었을 정도였거든요. 게다가 바로 뒤 초등학교 운동장이나 벌교천에 걸린 소화다리에서 벌어진 일들을 저는 두 눈으로 똑똑히 봤지요. 글로, 소설로 옮기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투숙객들의 사생활을 보장하기 위해 안마당에 있는 화단도 일부러 축대를 높게 만들어 서로의 방이 보이지 않도록 했다”고 보성여관의 특징들을 짚어주기도 했다. “나무로 만든 일본식 건물의 특성상 방음은 잘 되지 않지만 시각적으로나마 서로에게 방해가 되는 걸 피하고자 만든 장치였다”는 것이다.

<사람들의 발걸음을 불러모으는 ‘태백산맥 문학기행길’>

조정래 작가가 가슴 속 깊은 곳에 박힌 결심을 실행으로 옮긴 것은 1983년 들어서였다. 6년 동안 썼던 소설 <태백산맥>을 열 권의 책으로 묶어 펴낸 것이다. 벌교에서 시작된 소설은 지금까지 1천만 부 이상 팔렸고, 매년 1만 명 이상이 소설의 자취를 찾아 벌교로 찾아든다.

2011년에는 보성군이 <태백산맥>에 나오는 주요 무대를 잇는 ‘태백산맥 문학기행길’을 조성해 사람들의 발걸음을 불러모으고 있다.'태백산맥문학관'에서 소화다리, 중도방죽, 벌교 읍내와 벌교역, 진트재(진토재)로 이어지는 이 길은 총길이가 약 8킬로미터로 넉넉잡아 세 시간 안팎이 걸리는데, 그 중심에 바로 보성여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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