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희궁 ‘방공호’의 미래는 어떠해야 할까

경희궁 ‘방공호’의 미래는 어떠해야 할까

글. 사진 권기봉 (작가, 여행가) warmwalk@gmail.com

언제부턴가 ‘평화의 섬’이라 불리기 시작한 제주도. 그러나 제주도는 그 별칭이 참 야속하다 싶을 정도로 아픔을 간직한 섬이다. 여행자의 눈에는 잘 띠지 않는, 아직 끝나지 않은 역사적 과제인 4.3을 논외로 해도 그렇다. 그것도 제주도를 찾는 여행자라면 으레 들르는 성산일출봉에서부터 확인할 수 있으니, 어떤 면에서는 의아하다고까지 해야 할까?

보통의 여행자라면 성산일출봉을 오른 뒤 곧 떠나거나 내려오는 길 오른쪽에 있는 ‘해녀의 집’에 들러 횟감을 사가는 정도다. 그런데 그 반대쪽, 그러니까 남쪽 포구를 지나 성산일출봉 밑으로 내려가보면 오래되지 않은 그리고 충분히 드러나지 않은 과거와 조우할 수 있다.

 

해수면에 나란하게 뚫려 있는 십수 개의 인공동굴들이 그것으로, 제2차 세계대전 말기였던 1945년 초 일제가 미군 상륙에대비해 제주도민을 강제동원해 판 것들이다. ‘바다의 카미카제’라 불렸던 카이텐[回天]과 신요[震洋], 즉 고속 어뢰정이나 모터보트를 몰아 적함정으로 돌진해 자폭하는 ‘인간어뢰(카이텐)’와 ‘모터보트 자살특공대(신요)’ 대기소로 쓰던 시설들이다. 성산일출봉 외에도 송악산과 화순항, 월라봉, 수월봉 등 제주도의 동-서-남해안을 따라 80여 곳에 무려 7백여 개가 뚫려 있다.

 

그것이 전부도 아니어서 송악산 북서쪽으로 이어지는 대정읍 상모리 일대의 알뜨르비행장 터에는 지난 1926년부터 짓기 시작한 콘크리트 격납고 약 20개 동이 남아 있다. 난징학살이 있기 직전 ‘세계 항공전 사상 미증유의 대공습’이라 일컬어지던 난징 폭격을 감행한 일본 오오무라[大村] 해군 항공대가 중간 기착지로 삼았던 곳이다. 또 어승생오름이나 셋알오름, 단산 봉우리 등 고지대에 있는 대공포와 고사포 토치카, 동굴 진지와 같은 생채기들은 지금도 아물지 못한 채 여전하다.

그렇다면 이 땅을 들쑤셨던 제국주의 일본의 광기가 제주도에만 남아 있는 것일까. 그럴 리 없다. 고층빌딩으로 가득한 수도 서울의 한복판에도 그 상흔, 특히 제2차 세계대전 말기의 물적 증거가 엄연히 존재한다. 조선의 5대 궁궐 가운데 하나인, 그러나 휑하기만 한 경희궁(慶熙宮)이 단적인 예다.

<조선 5대 궁궐 가운데 가장 많이 훼손된 경희궁>

현재 서울역사박물관 뒤에 자리잡고 있는 경희궁은 원래의 경희궁이 아니다. 건물도 위치도 하나 같이 제각각이다. 일제가 경희궁 터에 일본인 자제를 위한 통감부중학, 이후 경성중학교를 세운다는 구실로 비집고 들어간 이후 대부분의 건물을 야금야금 헐어버린 탓이다.


동국대에서 법당인 정각원으로 쓰이고 있는 경희궁 숭정전

그 방식은 경복궁 근정전 격인 경희궁의 숭정전을 남산 기슭으로 옮겨 일본 조동종 사찰인 조계사 본전으로 쓰는 식이었다. 지금 동국대학교에서 법당으로 이용하고 있는 정각원이 바로 경희궁의 정전이었던 숭정전이다. 왕이 집무를 보던 흥정당 역시 용산에 있던 광운사라는 사찰로 팔려나갔고, 활쏘기와 무예를 익힐 목적으로 지었던 관사대는 사직단 뒤로 옮겨져 여태 황학정이란 이름으로 이용되고 있다.


경희궁 흥화문은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는 사찰 박문사로 옮겨져 ‘경춘문(景春門)’으로 쓰였다.

정문인 흥화문의 처지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현 신라호텔 영빈관 자리에 들어선 박문사, 즉 ‘조선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기 위해 지은 사찰로 옮겨져 대문으로 쓰인 것이다. 목조 건물의 특성상 해체 조립이 가능했기 때문인데, 기본적으로는 창경궁을 ‘창경원’이라는 동물원으로 격하했던 것처럼 조선 왕실의 위엄을깎아내리기 위한 술수 그 자체였다. 그렇게, 1920~30년대를 지나며 경희궁은 담장 일부를 제외하고는 완벽하게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경희궁이 조선 5대 궁궐 가운데 가장 많이 훼손됐다는 말을 듣는 이유다.

문제는 다른 궁궐들과는 달리 해방 이후 복원사업을 하려 해도 쉽지가 않았다는 점이다. 팔려나간 것 가운데 건물만 있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경희궁의 동쪽 8만여 제곱미터의 땅이 1922년 조선총독부 전매국 관사를 지으면서 잘려나갔는데, 해방 뒤 소유권이 민간에 넘어가면서 사무실과 주택이 밀집된 공간으로 바뀌고 말았다. 구세군회관에서부터 성곡미술관을 지나 대한축구협회가 있는 곳 언저리까지 격자형으로 구획된 지역이 바로 그곳이다. 또1927~28년에 지금의 새문안길을 확장할 때에는 경희궁의 남쪽 구역이 도로로 편입돼 사라지기도 했다.

그랬던 경희궁을 그나마 다시 고쳐 짓기 시작한 것은 1988년 들어서였다. 해방 이듬해 경성중학교 자리에서 문을 연 서울중고등학교가 1980년 현대건설에 터를 팔고 강남으로 이전해 간 뒤, 그 자리에 빌딩을 지으려 했으나 문화재 때문에 개발이 쉽지 않아 고민하던 현대건설로부터 서울시가 땅을 사들이면서 가능해진 일이었다. 그러면서 신라호텔에 있던 흥화문을 다시 옮겨 왔고 숭정전을 비롯한 다른 전각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새로 지어 올렸다. 그리고 그 즈음, 왕과 왕비가 생활하던 공간인 융복전과 회상전 터 바로 옆에서 ‘방공호’가 발견됐다. 태평양전쟁의 전황이 일본에 극도로 불리하게 돌아가던 1944년 초, 일제가 미군의 공습에 대비해 구축한 방공호였다.

<일제, 경희궁에 방공호를 파다>

“조선총독부 체신부 직원들이 학생들을 데려다 꽤 오랜 시간 강제로 일을 시켰습니다. 그땐 수업이고 뭐고 없었지요. 그저 흙을 파고 나르고 또 흙 파고 나르고... 그렇게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때 경성중학교 학생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방공호 파는 데 동원됐어요. 일본 학생이든 조선 학생이든.”

방공호 건설 당시 경성중학교 학생으로서 실제로 노역에 동원됐던 최준희 씨는 14년 전인 지난 2003년 이렇게 말했다. 최 씨는 “일제가 통신시설을 갖춘 전시사령부로 쓰려고 지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말도 덧붙였는데, 이는 종로구청 공원녹지과 시설관리원으로 1991년 이래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일해 왔다는 김용훈 씨의 증언과도 거의 일치했다.

“체신부 입장에서는 혹시 미군의 폭격으로 통신선이 끊기더라도 전후방만이 아니라 일본 본토와의 통신도 가능케 해야 하지 않았을까요? 체신부에서 가까우면서도 안전하고, 또 통신 전파를 쏘고 받을수 있을 정도로 높은 지대를 찾다 보면 여기 경희궁 밖에 없었을 겁니다.”

당시 조선총독부 체신부는 방공호에서 약 7백미터 떨어진 현재의 세종로 KT 본사 자리에 있었다. 딴에는 궁궐과 같은 문화재 구역 안에 방공호를 만들면 미군의 폭격을 피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도 했을 것이다.

굳게 닫힌 철문을 열고 들어가 둘러본 방공호는 거대했다. 너비 약7미터에 높이 5미터, 길이는 50미터 남짓한 2층 구조였다. 최대 3미터 두께의 콘크리트로 벽을 마감한 곳이 있을 정도로 전체적으로 견고해 보였다. 복도를 사이로 20개 정도의 크고 작은 방들이 양쪽으로 줄지어 있었는데, 전체 규모는 장정 1~2백 명을 족히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넓었다. 흰색 타일이 붙어 있는 세면장과 화장실로 보이는 방도 있는 것으로 보아 일정 기간 동안 방공호 밖으로 나가지 않고도 생활할 수 있도록 만든 것 같았다.

특히 최근까지도 건설 당시의 모습이 거의 그대로 유지되고 있던것은 의외였다. 김 씨는 “예전에 서울고등학교 아이들이 벙커 천장에 뚫려 있는 환기통을 통해 자꾸 아래로 내려와 말썽이었을 때 환기통 중간을 벽돌로 막아버린 적이 있다”고 했는데, 환기통을 막았던 벽돌은 지난 2003년 5월 서울시가 현장조사를 하면서 제거할 때까지 정말 그대로 남아 있었다. 지난해 여름 내부수리 때와 최근에도 다시 들어가서 확인해 보았지만 곰팡이만 좀더 끼었을 뿐 그 구조나 상태에는 역시 변함이 없었다. 처음 지을 때 그만큼 세심한 공을 들였던 것으로 보인다.

<방공호를 판 것은 일제만이 아니다>

아이로니컬한 것은 해방 뒤에도 비슷한 즉 문화재를 방패막이로 삼은 이들이 있었다는 점이다. 일제가 판 창덕궁 부용지 옆의 방공호 근처에 있던 또다른 방공호가 그것으로, 박정희정권 시절이던 지난 1976년 전쟁과 같은 국가비상사태에 대비해 수립한 ‘충무계획’에 따라 만든 방송용 방공호다.

목적이 방송전파 송출에 있었으니만큼 모습도 일제가 만든 것들과는 다소 달랐다. 5톤짜리 방송용 중계차를 댈 수 있는 공간이 있었으며 근처에는 약 15미터 높이의 방송용 철탑도 4기나 솟아 있었다. 군사독재정권의 문화재 활용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창덕궁옆의 창경궁을 비롯해 조선 성종과 정현왕후의 묘인 선정릉, 숙종과 장희빈의 묘가 있는 서오릉, 고종의 후궁인 순헌귀비 엄씨의 묘영휘원 등에도 방송용 방공호를 파고 높다란 철탑을 세워 올렸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면서 문화재를 국가안보를 위한 볼모로 삼는 행위를 우려하는 목소리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남북 분단이라는 특수한 상황에 놓여 있는 만큼 군사 시설물의 중요성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그 장소가 굳이 역사와 문화의 숨결이 응축돼 있는 궁궐과 왕릉일 필요가 있느냐는 지적을 피할 길이 없게 된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문화재를 방패 삼는다고 해서 그곳이 군사적 타격목표물이 되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기 때문이다. 지난 2003년 미국이 이라크를 침략했을 미군의 이라크국립도서관 폭격으로 메소포타미아와 고대 그리스로마 문명을 기록한 3천여권의 희귀본 대부분이 불에 타거나 약탈됐고, 바벨탑과 공중정원으로 유명한 바빌론 유적지 한복판에 군사기지를 짓는 통에 4천 년 역사의 현장이 무참히 파괴되고 말았다. 이라크 군인들이 이라크국립도서관으로 숨어든다는 것이, 바빌론 유적지에 군사기지를 세우면 차마 이라크군이 공격해오지 못할 것이라는 것이 지극히 반문명적인 두 행위의 구실이었다. 결국 경희궁 방공호를 제외한 서울과 그 주변에 산재해 있던 일제의 방공호와 그 뒤 군사정권이 만든 방송용 방공호 및 첨탑들은 2002~2003년 무렵 철거를 시작해 지금은 모두 없애버린 상태다.

<경희궁 방공호의 미래는?>

문화재 구역 안의 유일한 방공호인 경희궁 방공호는 이제 어떻게해야 할까. 군사독재정권 때의 그것처럼 철거만이 능사일까? 서울시와 종로구청, 관리를 맡고 있는 서울역사박물관, 그리고 문화재 관련 운동가나 관심있는 시민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하다. 다만 지난 1990년대까지와 다른 점은 부정적인 역사가 녹아 있는 건축물이나 공간, 즉 ‘네거티브 유산이니 없애버려야 한다’는 주장이 상대적으로 큰 호응을 얻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나간 식민지 시절의 슬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현장이니 없애야 한다는 주장보다는 그렇기 때문에 남겨두고 기억해야 한다는 의견이 공감대를 넓혀가고 있는 모양새다.



‘을사늑약의 현장’ 중명전은 네거티브 유산이라는 이유로 붕괴 직전까지 방치되다 가까스로 보수됐다. 현재 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실제로 경희궁 방공호에 대해 크게 두 가지 안이 제시되고있다. 문화재 관련 운동가들 중 일부는 일제의 수탈과 억압 등을 보여주는 박물관 등으로 활용하자는 입장이고, 서울역사박물관 등에서는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근현대 역사 유물을 보관하는 수장고로 이용하고자 하는 방안을 갖고 있다. 전자는 일제강점기와 관련한 네거티브 문화재로서 1905년 을사조약의 체결 현장인 ‘중명전’ 정도가 알려져 있는 현실에서, 서울역사박물관처럼 시민이 많이 모이는 장소에 지난 시대를 증언해주는 또 하나의 현장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다. 또 후자는 서울 각 지역을 재개발하는 과정에서 도시의 성장사와 시민들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근현대 유물들을 많이 모았는데, 새로 큰 돈을 들여 수장고를 짓느니 이미 있는 방공호를 보수해 이용하는 게 낫지 않겠느냐는 생각에서다.

그 무엇도 정답은 아닐 것이다. 중요한 것은 관이 일방적으로 결정하는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는 점이다. 비록 지난한 과정이 되더라도 여러 의견을 모으고 그 속에서 더욱 합리적인 해답을 찾아가는 과제가 앞에 놓여 있다. 그러한 과정에서 네거티브 유산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의 수준도 한층 성숙해 갈 것이기 때문이다. 지난 1995년 ‘역사를 바로 세우겠다’며 조선총독부 청사를 철거했지만 정작 건물 하나 부숨으로써 과연 무슨 역사가 바로 섰는지 의아했던, 심지어 무슨 역사를 바로 세우겠다는 거였는지조차 불분명했던 경험 이후 네거티브 유산을 대하는 한국 사회의 인식 지평은 이제 더 넓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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