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딜쿠샤의 비밀’을 찾아

‘딜쿠샤의 비밀’을 찾아

글. 사진 권기봉 (작가, 여행가) warmwalk@gmail.com

지난해 2월 한 벽안의 여인이 인천공항에 발을 디뎠다. 10년 전인 2006년 아버지와 함께 온 이후 두 번째 방한이었다. 이번에는 조부모가 쓰던 생활 유품과 당시 시대상을 보여주는 사진과 편지 등 57건 168점의 자료를 서울역사박물관에 기증하기 위해서였다. 그녀의 이름은 제니퍼 테일러.

제니퍼의 증조 할아버지인 조지 테일러와 할아버지 앨버트 테일러, 그리고 작은 할아버지 윌리엄 테일러가 이 땅에 들어온 것은 대한제국 성립 1년 전인 지난 1896년이었다. 평안북도에 있던 운산금광을 위해서였다. 그런데 이들은 단순한 금광업자들이 아니었다. 일제강점기 이전부터 해방 직전까지 이땅에 살며 혹은 묻히며 격동의 역사를 함께 겪어온 산증인들이다.

<아버지와 3.1운동 소식의 타전>
앨버트와 메리 린리 사이에서 첫 아들 브루스 테일러, 즉 제니퍼의 아버지가 테어난 것은 지난 1919년 2월 28일이었다. 3.1독립만세운동 정확히 하루 전이었다. 지금의 서울역 맞은편에 있던 세브란스병원에서였다.

“... 나[메리 린리]는 일어서서 창가로 가 밖을 내다보았다. 카키색 군복을 입은 일본 군인들이 남대문을 지키고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또 길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흰 옷의 한국인들이 있는 것도 알았다. ... 그날 우리 아들이 태어났다. 나는 절반쯤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 병원에 큰 움직임이 있는 것을 알았다. 병실 문들이 여닫혔다. 소곤대는 소리와 외치는 소리, 쿵쾅거리는 소리와 살금살금 걷는 소리가 교차했다. 나중에는 내 방에 사람들이 슬며시 들락거리는 것을 알게 되었다. 눈을 떠보니 간호사가 아기 대신 서류 뭉치를 안고 있었다. 간호사는 그 서류를 내 침대보 속에 감췄다. 바깥 거리에서는 모든 게 난리였다. 간간이 들리는 비명소리, 총소리 그리고 찬송가를 낮게 부르는 소리도 들렸다. 끝없이 반복되는 커다란 외침이 들렸다. 만세! 만세! 그 소리는 맹수의 표효처럼 들렸다. 만세!

... (중략) ...

내가 앨버트 때문에 다시 깨어났을 때 방은 거의 어두워진 상태였다. 그는 허리를 구부려 내게 키스를 했고, 익숙치 않은 솜씨로 아기를 안아 올렸다. 그 바람에 감춰져 있던 종이들이 떨어져 내렸다. 앨버트는 당장 아기를 내려놓고 그 종이들을 불빛이 있는 창가로 가져갔다. 독립선언서잖아! 그가 놀라서 소리쳤다. 장담컨대 그에게는 신문사의 새 통신원으로서 독립선언서를 발견한 것이 자신의 후계자이자 친아들을 만난 것보다 더 흥분되는 일이었던 것 같다. 그날 밤 동생 빌[윌리엄]이 신발 뒤축에 독립선언서를 넣어 도쿄로 떠났다.”

당시 일화는 앨버트의 처이자 제니퍼의 할머니인 메리 린리 테일러가 남긴 수기 에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마침 앨버트는 금광업에 종사하는 한편 틈틈이 한 미국 통신사의 통신원 역할도 겸하고 있었기에 ‘뉴스’에 대한 감각이 남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동생 윌리엄으로 하여금 미국으로의 해저전신망이 연결되어 있던 일본으로 가게 해 3.1운동 소식을 ‘밖으로’ 알린 것이다. 이후에도 일본의 3.1운동 진압과정에서 자행된 제암리 학살 사건 등으로 조선총독과 담판을 벌인 것으로 알려져 있는 등, 앨버트와 그의 가족은 한국사의 주요 현장에서 목격된다.

그러나 그들 가족이 조선에서 영원히 단란한 가정을 꾸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1941년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면서 미국과의 밀월이 종말을 고하자 외국인 특히 미국과 같은 ‘적성국 시민’의 거주는 허용될 수 없었다. 6개월간의 수감과 가택연금…. 끝내 테일러 가족은 이듬해 5월 중립국이던 아프리카의 포르투갈령 모잠비크를 거쳐 미국으로 추방되고 만다.


행촌동의 지명이 유래한 권율 장군의 은행나무.

돈의문이 있던 강북삼성병원 초입 사거리에서 서울교육청 앞을 지나 한양도성길을 따라 인왕산 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사직터널 위쪽으로 커다란 은행나무가 한 그루 보인다. 조선시대 때 이 동네를 가리키는 이름이 ‘은행동(銀杏洞)’이었으며, 1914년 일본이 행정지명을 개편한 뒤 지금까지도 ‘행촌동(杏村洞)’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된 나무다. 임진왜란 당시 행주대첩을 이끈 권율 장군이 집터에 직접 심었다고도 알려져 있다. 다만 지금은 주변에 다세대주택 등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어 당시의 모습을 그려보기 힘든데, 1924년 7월 14일자 <동아일보> 3면에 실린 “내 동리 명물 - 행촌동 은행나무” 기사를 통해 어렴풋하게나마 은행나무의 내력을 좇을 수 있다.

“…… 이 은행나무의 춘추는 얼마나 되었는지 자세히 아는 이가 없으나 노인네의 전하는 말을 들으면 사직(社稷) 안에 있는 태조대왕 수식송(手植松; 태조가 심은 소나무)과 벗할 나이 아니면 연치 존장(年齒尊丈; 나이가 많다는 의미)이 단단하다 합니다. 그리고 물구즉신(物久則神; 물건이 오래되면 조화를 부린다는 뜻)이라더니 낫살[나잇살]이 많아서 아는 일이 있는지 보통 해에는 열매가 열리지 않다가 나라에 큰 일이 있으려면 한 번씩 열린다는 말도 있습니다. 몇해 전까지는 엉클한 뿌럭지[뿌리]를 드러내어 오고가는 사람을 붙들어 앉히고 구름 같은 그늘로 덮어주며 “내가 너희들 몇대 조부터 이렇게 정답게 굴었다” 하는 듯하더니 지금은 코 큰 양반의 울타리 속에 들어가서 예전 인연을 다 끊어버리고 “어느 몹쓸 놈이 나를 팔아먹었노” 하고 궂은 비를 눈물 삼아 뿌리고 있습니다.”


현재 딜쿠샤 주변으로 여러 건물이 들어서 있어 전체 모습을 조망하기가 쉽지만은 않다.

기사에서 말하는 “코 큰 양반”이 바로 제니퍼의 조부모 앨버트 테일러와 메리 린리 테일러다. 제니퍼의 아버지 브루스를 낳고 4년이 지난 1923년에 터를 사들여 3층짜리 서양식 주택을 짓기 시작한 것인데, 실제 집이 완공된 것은 1년이 지나서였다. 인왕산 자락 한양도성에 거의 맞붙은, 권율 장군의 은행나무 바로 앞에 서있는 붉은 벽돌건물 ‘딜쿠샤(Dilkusha)’가 바로 그것이다.

사실 지난 2006년에 제니퍼와 아버지 브루스가 방한하기 전까지만 해도 이 붉은 벽돌 건물의 정체는 오리무중이었다. 애당초 양기탁과 어니스트 베델이 공동 창간한 <대한매일신보> 사옥으로 알려져 오다 1995년 즈음 진위 논란이 일었다. 건물 벽면에 새겨져 있는 “DILKUSHA 1923”과 “P.S. ALM CXXVII-I”이라는 문구가 궁금증을 증폭시킨 탓이다. 딜쿠샤란 단어도 생소했고 ‘여호와가 집을 세우지 않으면 세우려는 자의 수고가 헛되고 여호와가 집을 지키지 않으면 파수꾼이 보초를 서도 헛일’이라는 내용의 ‘구약성서 시편 127장 1절(P.S. ALM CXXVII-I)’이 새겨져 있는 이유를 말해줄 사람이나 기록도 없었기 때문이다. 제니퍼의 아버지 브루스는 당시 이렇게 말했다.

“어머니가 인도 북동부 지역을 여행하다가 러크나우에 있는 딜쿠샤(Dilkusha)라는 고성을 찾았다고 합니다. 딜쿠샤는 우르두(Urdu)어로 ‘열린 마음’ 혹은 ‘행복한 마음’을 뜻한다고 하는데요, 18세기 영국인들이 만든 건물이었는데 어머니가 갔을 때에는 이미 폐허로 변해 있었지만 그 모습조차도 참 아름다웠답니다. 그래서 언젠가 집을 갖게 된다면 꼭 그 이름을 붙이겠다고 하셨대요.”

추방 이후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데만 66년이란 세월이 걸린 앨버트에게는 딜쿠샤가 허물어지지 않은 채 서있는 것만으로도 놀라운 일이었다. 또한 아직까지도 명확하지 않은 한국 근현대사의 복원에 있어서도 딜쿠샤의 정체가 밝혀진 것은 더 없이 값진 일이었다.

그러나 그런 역사적인 의미와는 상관 없이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딜쿠샤는 열댓 가구에 이르는 점유자들의 차지였다. 소유권은 기획재정부에 있지만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새 주인’이 하나둘 늘어난 것이다. 딜쿠샤를 위탁관리하고 있는 한국자산관리공사에서는 “국유재산법상 공시지가의 2%를 변상금 명목으로 부과하고는 있지만 강제집행을 하지는 않고 있다”고 말한다. “비록 불법이기는 하지만, 거주자들의 처지가 넉넉한 이들이 아니기에 무턱대고 쫓아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이주대책을 마련해주자니 법적 근거가 없고 형평에도 맞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오랜 기간 보수가 이루어지지 않아 딜쿠샤는 내외부 모두 전반적으로 쇠락한 상태다.

심지어 안전진단 결과 더 이상 사람의 거주가 불가능할 정도로 쇠락한 것으로 드러나기도 한 상태였다. 육안으로만 대충 보아도 여기저기 떨어져 나간 벽돌이며 부서진 콘크리트 사이로 보이는 철근이 위태롭게 느껴진다. 일본 군인들이 왔을 때 가족이 몸을 숨겼다는 1층과 2층 사이의 계단 밑 공간이나 2층 서재의 벽난로, 현관이나 마룻바닥, 계단, 창틀 등은 함부로 없애거나 덧댄 나머지 누더기처럼 변해가고 있다. 한 마디로 딜쿠샤의 운명이 경각에 달려 있었다.


관리 상태가 지극히 열악한 나머지 한국자산관리공사가 긴급 보수공사를 실시하기도 했다.

한국자산관리공사가 일부 보수공사를 하면서 당장 붕괴 위험은 사라진 딜쿠샤…. 과연 앞으로는 어떤 운명을 이어가게 될까. 일단 서울시에서는 현재 딜쿠샤에 거주하고 있는 주민들로 하여금 다른 곳으로 이주하도록 하고 3·1운동 100주년을 맞는 2019~2020년까지 테일러가의 거주 당시 모습으로 재현할 계획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앞서 지난해 11월에는 딜쿠샤를 배경으로 한 영화 <딜쿠샤>도 개봉돼 시민들의 호응을 얻기도 했다. 아직 완벽하게 드러난 것은 아니지만 그 동안 베일에 가려져있던 비밀들이 하나둘 풀리면서 시민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는 딜쿠샤…. 독립운동에 있어 조선인만이 아닌 외국인의 역할도 궁금하다면 한 번쯤 들러볼만한 곳이다.

## 함께 둘러볼만한 곳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묘원에 있는 앨버트 테일러의 묘비(왼쪽)와 그의 아버 조지 테일러의 묘비(오른쪽).

제니퍼의 증조부 조지와 조부 앨버트의 묘는 미국이 아닌 한국에 있다. 서울 합정동에 있는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묘원’이 그곳이다.

조지는 내한 12년만이자 향년 일흔아홉이 되던 1908년에 묻혔고, 앨버트는 일본에 의해 추방돼 미국으로 돌아간 지 6년만인 1948년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난 그 해에 유골로나마 한국으로 돌아와 양화진에 안장돼 있다.

생전 “내가 한국이 아닌 곳에서 죽게 되면 재라도 꼭 가져다 묻어달라”는 말을 되뇌였던 앨버트였기에, 그의 처 메리 린리가 남한 정부가 들어서자마자 미군 군함에 유골을 싣고 돌아와 소원을 이뤄준 것이다.

또한 메리 린리는 지난 1982년 향년 아흔둘에 세상을 떠나 미국 캘리포니아에 묻혔는데, 2006년 아들 브루스와 손녀 제니퍼가 방한할 때 묘의 흙을 떠와 앨버트 묘에 뿌리고, 앨버트 묘의 흙을 떠다가 캘리포니아의 메리 린리 묘에 뿌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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