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국적 저항운동의 공간, 승동교회와 부민관을 찾아서

거국적 저항운동의 공간, 승동교회와 부민관을 찾아서

글. 사진 권기봉 (작가, 여행가) warmwalk@gmail.com

이제 한 달 뒤면 지난 1919년 3.1 독립만세운동이 시작된 지 꼭 99년이 되는 해를 맞는다. 그리고 1년 뒤면 100주년이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 흘러가는 사이 해방의 기쁨도, 4.19민주혁명의 영광도, 6.10민주항쟁의 성과도 이루어왔다. 그리고 올해 초에는 사상 처음으로 법을 초월해 법 위에 서려 했던 권력자를 법의 이름으로, 지극히 민주적인 절차로 법의 테두리 안으로 다시 밀어 넣는 역사의 전환점을 맞이하기도 했다. 앞서 민주주의의 길을 걸었던 국가들이 수백 년에 걸쳐 이룩해온 일을 성숙한 시민의식을 바탕으로 급속히 이룩해가고 있는 중이다.

그 중에서도 3.1운동의 기억은 남다르다. 앞서 동학이 있기는 했으나 전국적 차원의 운동으로서는 3.1운동을 넘어서기 힘들다. 과연 그 운동은 어떻게 준비되었으며 그 공간들은 어떻게 남아 있을까.

1919년 3월 시작된 만세운동은 전국 각지로 퍼져 나가며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다만 문제는 이른바 민족대표라는 이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자마자 곧바로 경찰에 자수하는 바람에 하마터면 독립만세운동이 시작되지도 못하고 끝났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때, 그 간극을 메운 이들이 있었으니 바로 학생들이었다.

학생들이 모여 거사를 준비한 장소가 서울 한복판에 지금도 남아 있다. 바로 서울 인사동 초입에 있는 ‘승동교회’다. 3.1운동이 벌어지기 약 열흘 전인 1919년 2월 20일, 김원벽을 비롯한 학생대표들이 이 교회에 모여 학생 지도자대회를 열었다.

사회단체 사무실이나 학교 등에서 모일 수도 있었겠지만 당시는 일제에 의해 강압적인 무단통치가 벌어지던 때였다. 그렇기에 학생들은 일제의 감시가 다소 소홀한 종교시설, 그 중에서도 승동교회로 모임 장소를 잡았다. 거사 당일 사람들이 모이기 좋은 탑골공원이 지척이라는 점도 승동교회가 모임 장소로 정해지는 데 한몫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학생들은 매일 같이 승동교회에 모여 독립만세운동을 준비했다고 한다. 당시 각 학교나 종교단체별로 운동을 하는 것보다 힘을 합치는 것이 낫겠다는 중요한 판단을 내린 곳도 승동교회였다. 보성전문과 연희전문, 세브란스의전, 불교계와 기독교계 그리고 천도교계까지 모두 함께 행동하기로 합의를 이뤄낸 것이다. 3.1운동의 주체를 단일화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독립만세운동 준비는 급물살을 타게 됐다.

이같은 승동교회를 두고 ‘3.1독립만세운동의 아지트’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게다가 대한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 이른바 YWCA가 창립된 곳도 승동교회였다. 명실공히 승동교회는 3.1운동의 아지트로서만이 아니라 여성들의 사회활동에도 일익을 담당했던 현장이다.

붉은 벽돌이 인상적인 승동교회가 완공된 것은 지난 1912년으로, 몇 차례의 증축을 거쳐 지금에 이르고 있다. 지금은 주변 건물들에 가려 주요 도로에서는 잘 보이지 않지만 얼마 전 건립 110주년을 기념해 보수공사까지 끝마쳐 말끔한 외관을 자랑한다.

그런데 젊은 학생들 주도로 진행된 항일운동이 그것으로 끝은 아니었다. 3.1운동이 일제강점기 초기에 벌어진 저항이었다면, 해방이 채 한 달도 남지 않은 1945년 7월 말에도, 항쟁은 끊이지 않았다.

서울시청 근처를 지날 때 성공회성당과 코리아나호텔 사이에 흰색 건물 한 채가 서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지금은 ‘서울시의회’라는 간판을 내걸고는 있지만 해방 이후부터 지난 1975년까지는 대한민국 국회의사당으로 사용되었던 건물이다.

국회의사당으로 쓰이던 근 25년의 시간 동안 그곳에서는 이승만 전 대통령의 종신집권을 위한 ‘사사오입 개헌’, ‘국가보안법 파동’ 등 한국 현대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은 굵직한 사안들이 논의되고 결정됐다. 그리고 그 앞 공간은 3.15 부정선거에 항의해 불타 오른 열기가 4.19로 이어진 곳이기도 하다. 5․16 군사쿠데타 때에는 국회 간판을 떼고 재건국민운동본부가 차려졌으며, 박정희 대통령 집권 후에는 한일협정 비준 파동과 3선 개헌 파동 등이 일어나는 등 숱한 정치 격변의 소용돌이 한 가운데에 있었다.

그런데 건물 앞 화단 한쪽에 놓여 있는 작은 표지석을 보면 건물의 역사가 훨씬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거기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부민관 폭파 의거 터
1945년 7월 24일 애국청년 조문기, 류만수, 강윤국이 친일파 박춘금 일당의 친일 연설 도중 연단을 폭파했던 자리

애당초 이 건물은 일제가 지난 1935년 오늘날 세종문화회관과 같은 문화예술 공연장으로 만든 것이었는데, 친일 정치집회도 종종 열렸다. 세 명의 청년, 아니 청소년들이 거사한 1945년 7월 24일에도 마찬가지였다. 조선과 만주국 등에서 몰려온 인사들이 친일 집회를 열고 있던 것이다. 그때, 조선은 물론 일본으로 건너가서도 일을 해야 했던 조문기, 류만수, 강윤국 등 세 명의 10대 청년이 독립운동사에 있어 가장 마지막의 의거 가운데 하나를 결행했던 것이다.

당시는 해방을 채 안 달도 남겨놓지 않은 시점이었다. 태평양전쟁 이후 지지부진해 보이기도 했던 독립운동이 해방의 그날까지 끊이지 않고 계속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중요한 현장, 바로 부민관이다. 

그러나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작은 안내판 달랑 한 개 뿐이다. 건물만 하더라도 지난 1980년 태평로 확장공사를 하면서 적잖은 부분이 헐렸고, 1985년 제3별관을 헌 뒤에는 지금처럼 목욕탕 굴뚝같은 첨탑과 성냥갑 같은 어색한 건물만 남게 됐다.

건물의 문화재적 지위도 ‘지정문화재’가 아닌 ‘등록문화재’ 정도여서 국가의 승인 없이도 임의로 철거되거나 현상이 바뀔 수도 있는 실정이다. 일반 개인이 소유한 건물이 아닌데 무얼 걱정하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일개 지자체 지도자의 의지에 따라 경성부청을 거쳐 서울시청으로 쓰이던 건물이 지난 2008년 기습적으로 철거될 뻔만 전례가 있는 것이 한국의 오늘이다. 

세 명의 독립운동가들도 결국엔 하나둘 스러져 갔다. 가장 오랜 삶을 산 조문기 선생의 경우 평생을 <친일인명사전> 발간을 비롯한 친일청산운동에 매진하다 지난 2008년 결국 향년 81로 생을 마쳤다. 적잖이 쇠락한 옛 부민관 건물도 영원히 헐리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누군가는 ‘인상도처유상수’라고 말했다. 곳곳에 현자가 숨어있다는 말이렷다. 그런데 알고 고면 우리나라 곳곳이야말로 역사적 숨결이 숨쉬는 현장 박물관과도 같다. 그것도 박제된 옛 것이 기억만이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늘 맞딱뜨리는 갈등과 고민의 순간에 정답은 아닐지언정 해답의 단초를 제공해주는…… 그래서라도, 즉 뒤틀린 역사와 그걸 바로 잡기 위해 목숨 바친 이들의 역사를 되새겨 보기 위해서라도 승동교회와 옛 부문관 근처를 지날 때 한 번이라도 더 유심히 살펴봐야 할 것이다. 동시에 그 둘만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 주변을 늘 살펴야 하는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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