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 기억을 만나다] 대한민국 광장민주주의의 탄생지, 광화문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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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 기억을 만나다] 대한민국 광장민주주의의 탄생지, 광화문광장

박한나 작가 / hanna_p@naver.com


(좌)광화문 광장의 세종대왕 동상 / (우)세월호 농성장 모습

외국인들이 줄을 섰다가 차례가 되면 세종대왕 동상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다. 방학을 맞은 아이들은 이순신 장군 동상 앞 분수에서 물놀이를 즐기고 부모들은 이 모습을 사진으로 담기 바쁘다. 4년 넘게 이곳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 세월호 천막에서는 자원봉사자들이 서명을 받는다. 길 끝에는 때에 따라 한 사람 또는 여럿이 다양한 문제의식을 제기하며 시위를 한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건너편으로 가기 위해 이곳을 스쳐 간다. 기록적 폭염이 이어지는 2018년 여름 광화문광장의 풍경이다.

다채로운 색깔이 공존하는 광장
광화문에서 세종로 사거리 사이에 길이 555m, 너비 34m의 광화문광장에는 이처럼 서로 다른 장면이 공존한다. 2009년 8월 1일 개장한 광화문광장은 경복궁을 잇는 관광지이자, 시민의 여가 시설, 의사 표현의 장(場)으로서 기능하며 서울의 랜드마크로 자리매김했다. 이름 그대로 광장(廣場)이다. 광화문광장이 만들어진지 올해로 10년이지만 사실 광화문 앞 세종로가 광장 역할을 한 것은 그 이전부터였다.

“광화문광장 하면 2002 월드컵이 떠올라요. 저 여기서 응원했거든요.” 신재일 씨는 아이들과 찾은 광화문광장에서 거리 응원을 추억했다. 당시 도로였던 세종로에는 차가 사라지고 응원 나온 시민들로 가득 찼다. 축구 경기도 흥미진진했지만 도로에 앉아 응원하다 처음 본 사람과 하이파이브를 하고 꼬리잡기 형태로 거리를 뛰어다니다 보면 그 자체로 흥이 났다. 현재 광화문광장 자리에서 시작된 거리 응원은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져 나갔고 이후 하나의 문화가 되었다.

의견을 내고 싶을 때도 시민들은 광화문 앞으로 모였다. 2002년 효순‧미선 추모 촛불집회와 2008년 광우병 소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가 대표적이다. 효순‧미선 추모 집회는 촛불집회라는 시위 방식을 대중에게 알렸고, 광우병 촛불집회는 최대 수십만 명의 시민이 참여하고 문화제 형식으로 진행돼 새로운 시위 문화를 만들었다. 사진작가 전현식 씨는 광우병 시위 때부터 광화문광장의 시대정신을 사진으로 기록하고 있다. “광화문광장은 시민이 자유롭게 나와서 의사 표현을 할 수 있는 시민의 광장이에요. 그 모습을 담기 위해 광화문광장을 자주 찾고 있죠.”

오래된 국가권력의 중심지
광화문광장이 위치한 세종로는 조선시대부터 중요한 공간이었다. 광화문은 조선의 법궁 경복궁의 남문으로, 국왕이 드나들던 정문이다. 이 광화문 앞 육조와 의정부에서는 나랏일을 맡아 처리했다. 육조거리는 가장 규모가 큰 종로상권과도 맞닿아 있어 지리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중심지 중에 중심지였다. 동시에 평민은 함부로 거닐 수 없는 지배층의 공간이자 국가권력을 상징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때문에 일제 강점기 시절, 일본은 조선총독부 건물을 경복궁 근정전 앞에 짓고 주요 기관과 시설을 세종로에 두었다. 국권을 빼앗고 식민 통치를 하기 위해 권력이 집중된 곳을 먼저 장악한 것이다.

해방 이후에도 분위기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세종로를 중심으로 정부청사와 여러 대사관이 자리를 잡았고 청와대도 가까운 곳에 위치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여전히 광화문광장 일대는 국가권력이 집중된 행정과 외교의 중심지이다.

광장을 완성하는 시민의 목소리
국가권력의 중심지 광화문 앞 세종로 일대를 광장으로 바꾸고 사회 변화를 주도한 것은 시민이었다. 통치를 받던 백성에서 나라의 주인이 된 시민은 권력의 억압에 저항했다. 선거도 없이 자리에 앉은 대통령이 정무를 휘두르고 이에 저항하던 청년들이 고문을 받다가, 최루탄에 맞아서 세상을 떠나자 보고만 있지 않았다. 시민들은 ‘독재 타도’와 ‘호헌 철폐’를 외치며 세종로와 태평로로 나왔다. 아스팔트 도로 위에서 민주주의의 싹을 틔운 것이다. 이것이 1987년 6·10항쟁이다.

그로부터 30년만인 2016년 시민들은 한 목소리를 내며 다시 광화문광장으로 나왔다. 2014년 겨울부터 세월호 천막 서명대에서 자원봉사를 하고 있는 목선재 씨는 이때를 광화문광장에서 보낸 기간 동안 가장 인상 깊은 순간으로 꼽았다. “특조위(4·16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가 해체되어서 의기소침해졌을 때였어요. 사람이 지나가도 서명해 달라는 말도 선뜻 못했죠. 그 즈음 촛불집회가 시작됐어요. 토요일마다 서명대에 나왔는데 한 주 만에 이 광장을 촛불이 가득 메우고 있는 거예요. 그때 정말 전율이 확 느껴졌어요.”

시민들은 홀로 또는 친구‧연인과 함께, 어린아이가 탄 유모차를 끌고 가족과 함께, 휠체어를 타고, 트랙터를 끌고 각자 모습 그대로 촛불을 들었다. 국가권력의 중심지를 시민의 촛불이 뒤덮었고, 광장의 힘은 국가가 아닌 시민에게 있음을 증명했다. 이를 통해 바뀐 것은 광화문광장의 주체만이 아니었다. 시민 스스로가 가장 많이 변화했다. 광화문광장에서 촛불을 들었던 송시원 씨는 “촛불집회 참여 이후 정치사회적 인식이 달라졌어요. 움직이고 소리 내면 바뀌는구나 하고요.”라며 국정농단 촛불집회는 우리 모두에게 좋은 사회적 경험이었다고 말했다.

더 활짝 열릴 광화문광장을 향한 기대
광화문광장에서 낸 시민의 의견이 모두 받아들여지진 않는다. 국가로부터 거절당하거나 관심도 받지 못한 이야기가 훨씬 더 많다. 이곳에서 목소리를 내려면 서울시에 허가부터 받아야 한다. 이명박정부 때에는 충돌을 방지한다는 명목으로 촛불시위 때 컨테이너 박스를 쌓은 바리게이트가 쳐 지기도 했다. 故 백남기 농민이 물대포에 맞아 쓰러진 것도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민중총궐기대회에 참석했을 때였다. 시민의 힘이 커졌다고 해도 시민 개인이 상대하기에 공권력은 여전히 막강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은 꾸준히 광화문광장으로 나온다. 덕분에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가 발전하고 시민의식도 성장하고 있다. 서울시는 이러한 흐름에 발 맞춰 광화문광장을 건전한 문화 활동과 자유로운 의사 표현의 공간으로 규정하고, 이를 보장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국정농단 촛불집회 당시, 서울시는 집회에 참가한 시민들이 안전하고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도록 도와 호응을 얻기도 했다. 상업성을 띄거나 사회적 갈등을 조장·유발하는 행사나 인근 주민 사생활 침해는 엄격하게 제한한다.

나아가 서울시는 월대와 해태상을 원위치로 복원한 역사광장과 시민들이 다양한 활동을 향유하고 화합하는 소통공간 시민광장을 목표로 광화문광장을 새롭게 조성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하지만 새로운 광화문광장의 모습이 구체적으로 그려지고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지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어떤 결론이 나더라도 지난해 6·10민주항쟁 30주년 기념사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언급한 광장의 본질은 반드시 지켜지길, 시민이 아로새긴 광장의 역사가 지속되길,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가 더욱 단단해지길 간절히 소망한다.

“6월 항쟁은 우리 사회에 광장을 열었습니다. … 민주주의가 정치, 사회, 경제의 제도로서 정착하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일상에서 민주주의로 훈련될 때, 민주주의는 그 어떤 폭풍 앞에서도 꺾이지 않을 것입니다. 6월 항쟁의 이름으로 민주주의는 영원하고, 광장 또한 국민들에게 항상 열려있을 것입니다.”
 - 6·10민주항쟁 30주년 기념식 <대통령 기념사>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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