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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 희망이 있다

평화시장 어느 헌책방

평화시장 어느 헌책방
-전태일기념사업회 전 상임이사 민종덕

글·최현정 chhjung평화시장 어느 헌책방 사진paran.com

기나긴 싸움, 죽음, 수배생활을 이야기했다. 평생을 가지고 씨름했던 익숙한 말들을 막힘없이 풀어내는 전라도 사투리에 심지가 굳다. 노동자들의 단결된 투쟁. 입에 딱딱 맞아 떨어지는 노동운동 구호가 그렇게 소박하고 부드러울 수 없다. 사람을 아끼라고 나무라는 말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죽음을 말하면서도 하나도 슬프지 않다. 그저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것만 같다. 쾌청하다. 힘이 난다.

전태일기념사업회 전 상임이사 민종덕 선생님. 전태일을 뒤따라 노동자로서 살아왔다. 인터뷰 원고를 쓰는데 동희오토 농성장에 철거깡패들이 닥쳤다는 소식이다. 그렇다. 나아가야지. 갈 길이 멀다. 민종덕 선생님은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마음에 움튼 싹, 햇살 같은 전태일을 만나다

1953년, 동학혁명군이 첫 승리를 거뒀다던 전북 정읍 황토현 근처에서 태어났다. 동학군에 가담했던 이웃 할아버지의 이야기가 전설이 되는, 동학혁명기념탑을 귀하게 여긴 성장터에서 컸다. 그러다 보니 마음 안에 무언가가 어떤 싹을 틔웠나 보다.

"중학교 때였어요. 군수가 1년에 한 번 씩 동학혁명 기념탑에 방문을 하는데, 시골 마을을 지나가야 할 것 아니에요. 60년대이니 오두막집도 있는데 높은 사람에게 그런걸 보이면 안 된다 해서 그 집을 철거했다는 이야기가 들렸어요. 농민들이 부정과 불의에 항거해서 일어난 동학운동인데, 군수가 지나간다고... 농민들이 못 사는 모습을 없애는 것이 아니고 어떻게 하면 농민들의 삶을 낫게 살게 해야 하는 그런 관이 되어야 하는데 어린 눈에도 동학혁명 정신과는 전혀 다르다는 생각을 했죠."

그러던 1969년, 가족들은 고향을 떠나 서울로 이사를 갔다. 먹고 살 노릇이 안 되니 모두들 도시로 향하던 그런 시절이었다. 마음고생, 몸 고생 무지 했다.

"시골에서 서울 와서 학교 다니면서 신문 배달하고 공장도 다니고 했을 것 아니에요. 그런데 실컷 일을 부려 먹다가, 월급 때 제대로 안주는 경우가 많았죠. 힘들어서 다른 데로 옮기게 되면 그 동안 밀린 임금을 안 주는 거예요. 월급 받으러 가면 별로 사람 취급 하지도 않고 관심조차 안 주고. 지쳐서 포기하게끔. 한참 그 나이 굉장히 감수성도 예민한 시기일 때 세상에 대한 설움을 많이 당했죠."

평화시장 어느 헌책방 사진 그러던 중에 전태일을 만났다. 우연히 집어들은 헌 잡지에서였다. 마음 깊이 움튼 싹이 햇살을 만난 셈이었다.

"그 때 집에서 돈 대주고 학교 다니기 어려우니 어떻게 하든지 공부하려고 백방으로 노력을 했었죠. 혼자 독학하기도 하고 야간학교 들어가기도 하고. 공장 생활을 하면서 책방을 돌아다니기도 하고. 공부에 대한 목마름이 한창인 이런 시기를 지났었던 거죠. 당시 평화시장 1층 전체 청계천 쪽 가게가 다 헌책방들이었죠. 그런데 74년도쯤에 우연히 어떤 책방에 가서 신동아 잡지를 보니까 전태일에 관한 기사들이 나있더라고요. 71년도 1월호랑 4월호던가."

충격이었다. 전태일은 나와 같은 노동자였다. 그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바뀌었다. 헌 잡지에는 전태일의 주소가 적혀있었다. 서울시 도봉구 쌍문동 208번지. 그곳으로 무작정 찾아갔다. 무슨 생각이었을까. 훗날 수많은 세월을 함께 걷게 될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선생님도 그렇게 만났다. 당장 평화시장에 취직을 하고 노조 일을 시작했다.

"기왕에 노동자 생활을 할 바에는 전태일이 몸담았던 곳에 와서 한번 노동자 생활을 하자. 전태일이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고 죽었는데 뭔가 이대로 끝은 아닐 거다, 뭔가 있을 거다. 74년도에 처음 평화시장에 취직을 해서 내가 뭐 노동운동을 한다든지 구체적인 거는 잘 몰랐지만 전태일의 뜻을 이어가기 위해 뭔가 할 일이 있을 거라는 막연한 생각이 있었습니다."

"노동자들의 단결된 투쟁. 그 길을 알게 되니까 사람 자체가 달라진 거죠. 무엇을 위해 살고, 어떻게 살고, 어떻게 사는 것이 인간답게 살게 되는가를 몸으로 느끼게 된 거죠. 그래서 고문도 당하고 구속도 당하고 수배도 되고. 그런 속에서도 그게 인간답게 사는 길이므로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청년정신

75년도 노동시간단축 투쟁에 임한 것이 첫 투쟁이었다.

"당시 평화시장은 아침 8시 반이나 9시에 출근을 해요. 그리고 오후 1시에서 2시로 점심시간 정해져 있어요. 그런데 퇴근 시간은 정해져 있지 있었어요. 옛날에는 통행금지가 있었으니까 막차 시간이 퇴근시간이에요. 집에 가까운 사람들은 11시 반이 퇴근일 수 있어요. 나같이 집이 멀면 버스 막차시간에 맞춰서 퇴근하게 되고. 휴일도 첫째 셋째 일요일만 쉬었고. 설이나 추석 대목 때는 연속해서 철야 작업을 하죠. 대목 때 옷이 왕창 나가기 때문에 사장들이 한 몫 잡기 위해서 옷을 엄청 많이 만들게 되고. 그걸 대주기 위해서 공장에서는 일주일이고 계속 철야 작업을 해 나가죠. 실제로 전태일이 우리는 기계가 아니라고 분신하면서 구호를 외쳤는데. 정말 기계는 기름이라도 쳐가고 열이 심하면 열이라도 식히는 건데 사람이..."

첫 싸움에서 노동자가 이겼다. 당시로는 혁명적이었다. 노동시간을 채우면 수 백 개의 공장에서 동시에 일제히 전깃불을 내리는 방식으로 해결했다. 사람들의 호응이 거세게 일었다. 힘을 모으면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전율로 느꼈다. 그것을 바탕으로 다음의 운동이 전개될 수 있었다.

작업을 마친 늦은 밤에 퇴근해서라도 책자와 자료를 뒤져가면서 노동법을 공부했다. 어찌 그런 열정이 있었는지 지금 생각하면 모르겠다. 스무 살 남짓할 때였다. 그 파릇파릇한 나이에 딴 생각은 안 하셨냐 물으니 그런 것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고 했다. 뜻을 모아 함께 싸우면 그 뜻이 이뤄진다는 것을 보았다. 참으로 많은 동료들이 함께 공감을 하고 좋아하니 신이 나고 재미났다. 그런 삶이 흡족하기 그지없었다. 스무 살의 열정으로 진짜 투쟁을 했다. 지금 생각에도 혁명 같은 것은 젊은이들이 나서야 한다고 말한다. 가진 것도 없으니 잃을 것도 없고, 한 가지만 죽기 살기로 좇으니 단순할 뿐이다. 그렇지만 가장 명쾌한 진짜 투쟁이 된다. 내 삶만 돌보는 것이 아니므로. 사람들이 함께, 사람을 위해서 싸우는 것이므로.

청계피복노조의 힘이 커지자 정부에서는 그 힘의 원천이었던 노동교실을 없애고 당시 실장이었던 이소선 선생님을 구속했다. 77년이었다. 노동운동탄압에 저항하는 농성을 벌이다 경찰들에게 에워싸인 끝에 빼앗겼던 노동교실이 있던 3층 건물에서 결사의 심정으로 뛰어내렸다. 25살 민종덕이었다. 실은 그 해 7월 초에 피혁 공장에서 일하던 둘째 형이 공장 폐수구 청소를 하다가 목숨을 잃었다. 한여름 유독 가스가 심해서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이었는데도 경비 절감한다고 사람을 시킨 거다. 하나를 향해 달려가는 젊은이가 형을 잃고, 이소선 어머니가 구속되고, 노조 교실을 빼앗기게 되자 이걸 해결하려면 누구 하나 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이 죽기로 했다. 추락할 때 엉덩이가 무거웠기에 살긴 살았는데 부상은 심했다. 역시 딴 생각은 없었다. 병원에 누워서 조합 측의 요구 조건은 들어줬는가가 먼저 궁금했단다.

"전태일은 바보라고 놀림 받았어요. 이것저것 안 따지고 계산 안하는 사람. 가장 순수하다는 거죠. 젊었으니까. 이 순수함이 바로 청년 정신이지요, 전태일 정신. 그 다음에 그럼 이것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도전했잖아요. 어떻게끔 되게. 지 혼자 잘 먹고 잘 살려 하는 것이 아니라, 뭔가 개혁하고 개선하려는 이런 정신은 청년들에게 있어요. 나이 먹은 사람들에게 기대할 바가 아니에요. 지금의 나도 그렇지만."

셋째 아들이 중앙정보부에 끌려다니기 시작하자 아버지는 사색이 되셨다. 아, 그런데 운동하는 사람은 세상에서 제일 말 안 듣는 사람이라고. 그것도 청년정신이다. 노동교실 빼앗기고 난 뒤에는 조그마한 방을 하나 얻어서 집에 들어갈 생각은 안하고 늦은 밤 동료들과 모여서 전태일 평전을 읽고 또 읽었다.

1970년 전태일_ 그리고 2010년

"전태일은 더 어리고 힘없는 사람의 입장에 서서 살아 실천했고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간 거 아니에요. 그런데 지금 말로는 전태일 정신 하면서도 실제로는 큰 사업장에서 비정규직 사업장을 인정 안한다던지. 전혀 전태일 정신과는 반대로 행동하고 있어요. 전태일은 미싱사였어요. 그런데 공장 안에서 가장 힘이 약한 시다들 편에 들려면 힘이 있는 재단사 위치에 서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됐고 그래서 시다들을 위해서 미싱사 기득권을 포기하고 재단사 꼬마노릇부터 다시 시작했어요. 미싱사 월급이랑 재단보조사 월급은 차이가 커요. 비정규직 문제가 있으면 이들과 함께 가는 게 그야말로 전태일 정신입니다. 기득권을 지키면서 체면으로 운동하는 건 그건 운동이 아니지."

전태일이 산화해간 40년 전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오늘. 법과 제도는 바뀌었지만 사람이 바뀌지 않았기에 세상도 여전히 제자리걸음일 뿐이라고 말한다. 운동하는 자기 세대도 이미 기득권 세력. 스스로를 간절히 성찰하지 않으면 변할 수 없다는 생각이다. 정치 세력화 논의가 한창일 때에는 정치를 권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돈이 없으니 정치를 하려면 돈을 준 사람을 위한 정치를 하게 된다. 그렇게는 못한다. 성격도 유들유들하기는 틀렸다. 정치는 아니었다. 대신 정신을 택했다. 88년부터 전태일기념사업회를 꾸리고 지금껏 살았다. 얼마 전에는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77년도 청계피복노조 강제해산과 81년 강제해산이 위법이었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제 국가의 사과를 받아내고 무죄 판결을 받아낼 일이 남았다.

아내는 공장에 들어가서 노동 운동을 하고 싶다고 찾아왔던 대학생이었다. 85년도 전두환 정권이 잠시 유화 제스처를 부릴 때 아내와 결혼했다. 구류 중이던 아내를 찾아가 청혼을 했다. 벙 찐 아내 표정이 아직도 기억난다. 그런데 곧 자신이 구속되었고, 이어 아내는 산골 마을에서 선생님을 하게 되어 내내 떨어져 살았다. 생각을 함께 나누었던 아내. 2003년이 되어서야 드디어 함께 살 수 있게 됐다.

평화시장 어느 헌책방 사진 "진짜 억울하게 당한 사람은 정말 환장할 노릇입니다. 그런데 나는 억울한 생각을 가진 게 별로 없어요. 부당한 사회에게 분노할 일은 많이 있는데, 개인적으로 분노할 건 없어요. 내가 청소년 시절에 당했던 것들에 대해서 가만히 생각하면 이런 운동 식으로 풀지 않았으면 굉장히 왜곡되게 풀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많이 들어요. 왜곡될 수 있죠 뭐 한창 그 나이 때. 그럼 억울한 거지. 하지만 자기 주체적 삶의 방법으로 해결해 낸 것이 다행이죠. 요즘 청년들도 전태일에게 배우고 여기서 희망을 찾아야 해요. 요즘 스펙에 목숨 걸잖아요. 개인 능력 부족한 게 문제가 아니거든요. 구조적으로 안 되는데 아무리 스펙 쌓아봤자. 전태일이 뭐 대단한 철학이나 지식이 있는 사람이오, 참 별 볼일 없는 사람이오. 오늘 청년들이 아무리 어렵다 해도 전태일 만큼 어렵지는 않을 거예요. 굶기를 밥 먹듯 하고 길에서도 자고 거지처럼 생활을 했는데도 한 번도 절망한 사람이 아니에요. 절망의 끝에서 희망을 가진 사람이거든. 전태일처럼 정말 인간에 대한 사랑이 없이는 그런 게 안보이죠."

전태일이 희망적일 수 있었던 까닭은 자기 문제에 빠지지 않고 이웃과 전체를 생각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절망에 빠진 청년이여 사람을 보게 되면 희망을 찾지 못할 리 없다. 1974년 평화시장 어느 헌책방의 민종덕 선생님처럼, 이들도 우연히 전태일을 만나기를 간절히 바라며.

글·최현정 평화로운 공동체 만들기에 관심이 많은 임상심리학자. 역서에 주디스 허먼의 『트라우마』, 피터 엘사스의 『고문 폭력 생존자 심리치료』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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