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의 함성 - 민정당 연수원 점거 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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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의 함성 - 민정당 연수원 점거 농성 

글 한종수/ wiking@hanmail.net

 

1985년은 여러모로 뜨거운 해였다. 2월 8일 김대중이 귀국했고, 나흘 후 치러진 2.12 총선에서 ‘선명야당’ 신민당이 등장해 돌풍을 일으켰다. 5월에는 ‘반미운동의 대중화’가 시작된 미 문화원 점거 사건이 일어났으며, 한 달 후에는 한국전쟁 이후 첫 번째로 구로 공단에서 동맹파업이 일어나 한국 노동운동의 한 획을 그었다. 이렇게 2년 후 일어날 6월 항쟁의 전조가 여기저기서 일어나고 있었다. 이 해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사건은 한국 현대사 특히 민주화 운동사에서는 변방 중의 변방인 송파구(당시는 강동구) 가락동에서 일어났다.     

1985년의 여러 고무적인 변화에도 불구하고 전두환 일당의 폭압 통치가 여전하던 시절, 점점 바람이 차가워지기 시작한 11월 18일, 서울 시내 14개 대학에서 나온 전학련 소속의 학생들 191명이 문을 연지 반 년 밖에 되지 않은 가락동 농수산물 시장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그 중에는 여학생들도 무려 56명이나 있었다. 비장한 표정의 학생들은 간단한 지침을 전달받고 그들이 해야 할 일을 시작했다. 그 가운데에는 후일 유서 대필 사건으로 구속되었다가 최근에 무죄판결을 받은 한국의 드레퓌스 강기훈, 선풍적인 인기를 자랑하던 팝캐스트 <나꼼수>에서 거침없는 입담을 자랑하다가 옥고를 치렀던 정봉주, 19대 총선에서 경기도 화성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된 이원욱도 끼어 있었다. 

84년 11월의 민정당사, 85년 5월의 미 문화원 이후 점거농성단 규모로는 최대 ‘병력’이 민정당 중앙정치 연수원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쉽게 정문을 돌파한 그들은 깜짝 놀랐다. ‘통이 크신’ 대통령이 총재로 있는 당의 연수원답게 정문에서 강당까지의 거리가 상당했기 때문이다. 뒤에서는 전경이 쫓아오고 점거해야 할 건물은 꽤 멀었지만, 학생들은 그야말로 가슴이 터져 나갈 정도로 질주하여 점거에 성공했다. 그런데 연수원에는 뜻밖의 무기가 학생들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바로 생수통이었다. 어린 시절, 필자는 부모님이 “서양사람들은 물도 사먹는데”라고 ‘기막혀’ 하신 말씀을 기억한다. 사실 일반 민중들은 불안한 수돗물 대신 주로 보리차를 마시고 가끔 약수물을 받아 마시던 시절이라 생수라는 말 자체가 생소했다. 그런데 그 시기에 정의 사회를 이루신다는 민정당 어르신들은 이미 차별화된 생수를 즐겼던 것이다. 어쨌든 그 꽉 찬 생수병들이 학생들의 ‘짱돌과 깬 블록’ 대용물이 됐다. 전경들은 우박같이 쏟아지는 물병 세례에 곤욕을 치르며 성을 내주고 말았다. 덕분에 3-40분만 버텨도 다행이라고 여겼던 농성은 무려 6시간 30분을 이어가는 ‘대첩’을 이룩했다. 엄청난 숫자의 취재진들이 모여들어 연수원 마당을 메웠고, 일부는 연수원 내부로 들어가 학생들의 요구 사항을 취재하기도 했다.  

그 동안 학생들은 “독재 타도”, “양키 고 홈” 등의 구호를 외쳤다. 7장의 현수막과 2장의 태극기가 걸렸는데 현수막의 내용은 “군부 독재 타도하자!”, “파쇼 헌법 철폐” 등이었다. 학생들은 군부 독재 타도와 이를 지원하는 미국을 비난하고 민주 헌법을 제정해야 한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한 다음 A4 용지 2장에 담은 <민정당 중앙정치연수원 점거 농성 학우들의 20개 요구사항>을 뿌렸다. 주요 내용은 광주원흉 5적(전두환, 노태우, 박준병, 권정달, 위컴)의 처단, 매판 독점 자본 해체, 새마을 운동본부 등 전두환 정권 친위세력의 권력형 부조리 공개 및 책임자 처단, 언론 기본법과 보도지침 등 언론에 대한 통제 철폐와 정권의 나팔수인 KBS 해체 등 정치 사회 각 분야에 걸쳐 있었다. 


학생들은 석유와 프로판 가스 등으로 분신, 자폭 하겠다고 위협했지만, 학생들의 10배가 넘는 12개 중대 2,100명의 병력과 소방차 8대를 동원한 경찰은 3차례나 진입을 시도한 끝에 대형 사다리 차를 타고 들어가 연수원을 ‘함락’시키는데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옥상에서 투신한 홍익대학교 김영중은 허리를 다쳤고, 2층의 일부는 화염병으로 인해 불에 타기도 했다. 

집권 여당의 성채를 공략한 대가는 혹독했는데, 연행자 전원에게 ‘폭력, 방화 사범’으로 몰아 구속 영장이 신청되었기 때문이다. 미 문화원 사건 때에도 그 정도는 아니었고 민정당사 점거 농성 때에도 “개전의 정이 역력한” 이들에 대해서는 기소유예도 ‘베풀’었지만 이번에는 허리를 다친 학생까지도 구속 영장을 피하지 못했다. 

일이 이렇게 커지자 검찰에 비상이 걸렸다. 영장을 작성해야 할 검사의 손이 모자랐기 때문이었다. 공안부 인력만으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되어 검찰은 일반 검사까지 차출했다. 실제 구속자는 다행히 ‘82명’에 머물렀지만 이 ‘대량 구속’의 기록은 바로 1년 후인, 1986년 10월 28일 ‘건대 항쟁’에서 1천 2백명이 넘는 구속자를 내면서 그야말로 가볍게 경신된다. 

이 연수원을 둘러싼 소동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4년 후인 1989년 11월 8일에 충남대 학생회장 박영순을 위시한 46명의 학생들이 다시 점거 농성을 벌였기 때문이다. 1992년에는 3당 합당 끝에 탄생한 민자당이 이제는 송파구가 된 가락동 정치교육원 부지를 부실기업인 ㈜한양에 매각한다는 기사가 보도되었다. 민자당의 대권후보 경쟁이 과열되던 시점에서 나온 이 보도는 특혜대출 시비와 정치자금 수수설 등 지저분한 추문으로 이어졌다. 


현재 가락동 연수원은 존재하지 않고 그 자리에 쌍용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몇 동 되지 않은 작은 단지인데, 정황상 당시의 연수원 부지를 전부 쓴 것 같지는 않고, 주위에 있는 학교와 상가도 당시에는 연수원 부지가 아니었을까 싶다. 현장에는 당연하겠지만 그 때의 함성을 기억하게 만드는 어떤 흔적도 남아있지 않다. 그렇다고 민주적이지도 않고 더더구나 정의롭지 않았던 거대 여당의 연수원이 존재했다는 흔적 역시 남아 있지 않다. 

현장 주변은 전형적인 계획된 신도시로써 횡단보도도 찾기 어려운 대로와 아파트 숲이다. 건너편의 최신식 타워형 아파트와 현장에 서있는 성냥갑형이라고 불리우는 판상형 아파트가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는데, 30년이나 지났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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