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의 첫 희생양 :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의 흔적을 찾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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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의 첫 희생양 :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의 흔적을 찾다

글 한종수/ wiking@hanmail.net​​​​​​​​​ ​​ ​

 

그야말로 파란만장했던 우리나라 현대 정치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 중 하나가 1975년의 인혁당, 1959년의 조봉암, 1961년의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의사법살인이었다. 이 중에서도 조용수 사장의 사법살인은 인혁당과 조봉암 사건에 비해 대중들에게 덜 알려져 있다. 그가 사법살인으로 세상을 떠난 날은 55년 전인 1961년 12월 21일, 5.16쿠데타가 일어난 지 반 년 밖에 되지 않았다. 당시 조용수 사장의 나이는 32세에 불과했으니, 만약 그런 비극을 당하지 않았다면 지금까지도 생존이 가능한 나이였다. 더구나 그는 언론인이었다. 일제강점기에서도 언론인에 대한 사형집행은 없었고, 그렇게 많은 비극이 일어난 해방직후 미 군정시기, 한국전쟁, 이승만 정권 치하에서도 적어도 언론이 공식적으로 사형집행을 당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조용수 사장은 예외 중의 예외였던 것이다.


조용수 사장 사진

이 비극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4.19 이후 급속하게 풀린 언론의 자유를 맞아 많은 신문들이 창간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혁신계를 대표하는 신문이 1961년 2월 13일 창간된 '민족일보'였다. 창간을 주도한 사장 조용수는 경남 진주 태생으로서 일본 메이지 대학에서 공부한 유학파였는데 민단에서도 활동을 한 바 있었다. 민족일보는 이름에 어울리게 평화적인 조국통일과 부정부패 고발, 노동대중의 권익 옹호를 사시로 내세우고 언론계에 돌풍을 일으켰다. 발행부수는 다섯 손가락 안에 들었고 특히 가판은 단연 1위였다. 특히 진보적인 통일론을 주도했는데, 여기에 위협을 느낀 장면 정부는 창간자금을 조총련이 지원했다는 ‘의혹’을 내세워 뒷조사에 들어갔다. 결과론일지 모르지만 이 ‘의혹’은 결국 그의 목숨을 빼앗는 비극의 시작이 되고 말았다.

민족일보 본사는 광화문에 있었는데, 인쇄시설을 갖추지 못해서 관보나 마찬가지였던 인근의 서울신문에 인쇄를 맡겨야 했다. 그래서 장면 정부는 서울신문에 압력을 넣어 이를 중단시키는 편법까지 동원했다. 이로 인해 민족일보는 며칠 동안 발행되지 못했는데, 그래도 이 신문은 장면 정부가 제정하려던 데모규제법과 반공특별법이라는 2대 악법 반대투쟁에 앞장서 이를 좌절시키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운명의 1961년 5월 16일에 쿠데타가 일어났고, 이틀 후 조용수 사장은 신문사 직원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죄목은 간첩인 이영근으로부터 조총련계 자금을 지원받아 북한괴뢰집단이 주장하는 ‘평화통일’을 선전했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민족일보는 겨우 92호 만을 내고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면 박정희가 민족일보를 이렇게 가혹하게 다룬 이유는 무엇일까? 정설은 당시 박정희가 쿠데타 성공의 열쇠를 쥐고 있던 미국이 그의 과거 남로당 경력으로 인해 자신을 인정하지 않을까하는 걱정 끝에 반공이라는 기치아래 희생양을 찾았다는 것이다. 그중 하나가 대표적인 혁신계 신문이었으며 당시에 통일문제를 다루고 있던 민족일보를 그 희생양으로 삼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민족일보 사건 구속자는 13명, 그 중 사형선고자는 3명이었다. 해외언론계로부터 뜨거운 구명운동이 일어났지만 효과는 제한적이었다. 사형집행은 사장인 조용수에게만 이루어졌고, 나머지는 감형되어 석방되었으며, 상당수는 복권은 물론 전향하여 박정희와 전두환 치하에서 주요 공직을 거치고 훈장도 받았다. 심지어 간첩이라는 이영근조차 일반 국민들이 받을 수 있는 국민훈장 무궁화장까지 추서 받았으니 그 인물들이 간첩이거나 창간자금이 북한의 공작금 일리가 만무하다. 더구나 박정희 스스로 11년 후, 7.4남북공동성명을 통해 평화통일을 전면에 내세웠으니 말이다. 사법살인 세 사건의 희생자에게는 모두 ‘평화 통일’을 주장했다는 명확한 공통점이 있었다.


민족일보에 게제된 경협비준 비판에 관한 기사

마지막으로 조용수 사법살인과 관련한 인물 중 놀랍게도 이회창씨가 등장한다. 조용수에게 사형을 언도한 ‘혁명재판부’의 세 판사 중 한 명이 바로 그 였던 것이다. 이회창씨의 변명을 그대로 옮기면, 당시 26세로 막 판사 생활을 시작한 신참시절이었고 쿠데타 세력이 혁명재판부로 판사를 차출해갔는데 선배들이 모두 그 사건에 참가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이다. 물론 20대 중반에 불과한 그가 그 재판에서 감히 다른 판단을 내릴 환경이야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법을 다루는 판사가 사람목숨을 그런 식으로 처리했으니 이제는 인생의 마지막을 보내고 있는 나이이니 만큼 지금이라도 유족들에게 사과해야 하지 않을까? 어쨌든 대쪽이라는 별명을 가진 그에게도 이런 ‘흑역사’가 있다는 사실은 우리나라 현대사가 얼마나 어두운 면이 많았는지를 잘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조용수 사장은 혼자 사형당하지 않았다. 한 날 한 시에 함께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인물은 3.15부정선거의 주범 최인규 전 내무장관, 곽영주 전 경호실장, 그리고 정치깡패로 악명이 높았던 이정재와 임화수였다. 이 비극은 한국 현대사가 얼마나 아이러니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라 할 것이다. 민족일보의 비극은 조용수 사장 하나로만 끝나지 않았다. 13년 후 1974년 4월 9일 자행된 인혁당 사건 사법살인 희생자 8명 중 하나인 이수병 열사가 민족일보 기자 공채 시험에 수석으로 합격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바로 일어난 5.16 쿠데타로 인해 실제 기자 생활은 거의 하지 못했다.


경기도 광주의 조용수 사장 묘

인혁당 사건과 마찬가지로 민족일보 사건도 재평가가 이루어졌다. 2007년 4월 10일 재심청구가 올라갔고, 다음해 1월 검찰의 상고 포기로 무죄가 확정되었으며, 손해배상 확정도 이루어졌다. 조용수 사장의 무덤은 남한산성 입구를 지나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 면에 있다. 필자가 방문했을 때에는 무슨 일인지 봉분의 일부가 무너져 있어 가슴을 아리게 했다. 물론 위령탑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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